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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564회 작성일 2022-04-02 11:40
[모던 경성]“피압박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한다”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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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경성]“피압박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한다”

[뉴스라이브러리 속의 모던 경성] 저항시인 이상화,1934년 대구 교남학교(대륜중고) 권투부 창설 주도…조선어, 작문교사로 재직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이름난 저항시인 이상화(李相和·1901~1943)는 스포츠 마니아였던 모양이다. 민족운동가들이 세운 대구의 사립 교남학교(현 대륜중고) 교사로 있던 1934년 권투부 창설을 주도했다.

당시 이상화에게 수업을 받은 졸업생 손만호는 이런 증언을 남겼다. “모든 직원들은 학생들의 기질이 거칠게 되고 문제아를 만든다면서 극구 반대했으나, 상화 선생님께서는 ‘피압박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는 혼자 끝까지 주장을 하셔서 권투부를 창설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신체의 단련이 곧 독립투쟁의 힘을 기르는 것이라 생각하셨던 것이다.”

이상화는 1934년 '피압박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한다'며 교남학교 권투부 창설을 강력하게 주장해 관철시켰다.  권투부 선수들과 함께 한 이상화(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이상화 자신도 경성 중앙학교 시절 야구선수를 할 만큼 스포츠를 좋아했다./대륜중고등학교 역사관 소장
이상화는 1934년 '피압박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한다'며 교남학교 권투부 창설을 강력하게 주장해 관철시켰다. 권투부 선수들과 함께 한 이상화(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이상화 자신도 경성 중앙학교 시절 야구선수를 할 만큼 스포츠를 좋아했다./대륜중고등학교 역사관 소장

◇1930년대 인기 스포츠, 권투

1930년대 권투는 조선의 인기 스포츠였다. 젊은 여성들이 경기장 링사이드에서 손뼉 치며 응원할 정도였다. ‘요사이 권투가 조선에도 수입되어 부녀들도 링사이드에서 손뼉을 친다. 통쾌한 운동이나 생명을 촌탁(忖度)할 수도 없는 위험한 시합이다. 다만 이 권투에 있어서는 ‘넉아웃’을 당하야도 재기하려는 그 정신이 좋음으로 기개가 커진다.’(조선일보 1933년11월19일 ‘필마를 타고ㅡ스포츠의 보편화’, 파란 부분을 누르면 옛날 기사를 볼 수있습니다.)

20세기 초 조선에 들어온 권투는 1929년 조선권투구락부가 발족하고 2년 뒤 전용체육관이 들어서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1932년 LA올림픽(황을수·라이트급)과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규환·웰터급)에 조선인 권투선수가 일본 국가 대표로 출전할 만큼 실력 뛰어난 선수가 많았다.

서정권은 ‘복싱의 신(神)’으로 불린 당대 최고의 스타 권투선수였다. 열여덟 살이던 1930년 전일본아마추어선수권대회를 석권한 뒤, 이듬해 프로로 전향했다. 1932년 여름 활동무대를 미국으로 옮긴 서정권은 서부 일대를 중심으로 3년간 54회 대전을 치르면서 세계플라이급 6위까지 올랐다.

이상화(왼쪽)와 맏형인 독립운동가 이상정 장군, 가운데는 이상정 아내이자 조선의 첫 여성 비행사 권기옥이다./조선일보 DB
이상화(왼쪽)와 맏형인 독립운동가 이상정 장군, 가운데는 이상정 아내이자 조선의 첫 여성 비행사 권기옥이다./조선일보 DB

◇승승장구한 교남학교 권투부

1934년 권투부를 창설한 교남학교는 배종민, 신구실, 이종식, 한경동 등 뛰어난 선수들을 배출한 명문으로 떠올랐다. 특히 신구실은 창단 첫해인 1934년 9월 조선체육회·전조선아마추어권투연맹이 경성운동장 특설링에서 주최한 제1회 全조선아마추어권투선수권대회에 출전, 플라이급 준우승을 차지했다. 신구실은 일본 전수(專修)대학에 유학하면서 1936년 12월 전일본아마추어권투선수권대회 관동대표로 선발될 만큼 두각을 나타냈다.( ‘조선4선수, 관동선수권 획득’. 조선일보 1936년12월7일)

교남학교 권투부의 성취는 신문에도 보도됐다. ‘최근 수입된 운동으로서 선풍적 인기를 집중하면서 일반에게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음을 본 대구교남학교에서는 학생의 체육을 목표로 3년전에 동교에 링을 설치하고 맹연습을 한 결과,밴텀급 조선선수권 획득의 후보자인 신구실 군 등을 내었으며….’(‘남북에 호응약진하는 우리 운동계의 현세도’, 조선일보 1936년1월4일)

대륜고가 작년 '대륜100년사'를 준비하면서 발굴한 이상화 자필이력서. 1922년 '동경 아카데미 프랑세 수료'와 그해 4월부터 1923년 3월까지 명치대학 불어학부에서 수학했다고 썼다. /대륜중학교 소장
대륜고가 작년 '대륜100년사'를 준비하면서 발굴한 이상화 자필이력서. 1922년 '동경 아카데미 프랑세 수료'와 그해 4월부터 1923년 3월까지 명치대학 불어학부에서 수학했다고 썼다. /대륜중학교 소장
1933년 8월1일자로 발행된 이상화의 교남학교 강사임용허가서.  '조선어 및 한문'담당 강사로 임용됐다./대륜중학교 소장
1933년 8월1일자로 발행된 이상화의 교남학교 강사임용허가서. '조선어 및 한문'담당 강사로 임용됐다./대륜중학교 소장

◇교남학교 교사로 6년8개월 재직

이상화의 마흔둘 삶에는 활동 내역이 정확히 규명되지 않은 게 여럿 있다. 그중 하나가 교남학교 교사 근무 기간이다. ‘이상화평전’을 낸 김학동 서강대 명예교수는 ‘1938년 교남학교 교사로 취임해 무보수로 영어와 작문을 가르치다. 그 기간은 4년여라고 하지만, 정확한 기간은 알 수없다’고 썼다.

대륜중고등학교가 작년 개교 100년을 맞아 ‘대륜 100년사’ 출간을 준비하면서 발굴한 1차 자료는 이상화의 활동 공백을 밝혀줄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선 이상화가 교남학교 교사로 재직한 때는 1933년 8월부터로 보인다. 경북도지사가 교남학교 설립자 김도균에게 발행한 ‘교원 임용허가서’가 1933년 8월1일자이기 때문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강사로 채용된 이상화의 담당 과목은 ‘조선어 및 한문’이었다.

‘대륜 100년사’는 이상화의 재직기간을 ‘1933년8월1일~1939년3월30일’로 실었다.(’대륜100년사’ 767쪽) ‘대륜 100년사’ 편찬위원장 석은동 대륜고 교사는 “이상화가 형을 만나러 중국에 가거나 경영난으로 학교가 잠시 문 닫은 기간을 제외하면 1939년3월말까지 학교에 적을 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상화는 교남학교 재직시절, ‘태백산이 높솟고, 낙동강 내다른 곳에’로 시작하는 대륜고 교가 노랫말을 썼다.

◇이상화의 자필 이력서 ‘경성기독청년회 영어과 수료’

또 하나 주목할 자료는 이상화의 자필 이력서다. 교사 임용 허가서류를 내면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이력서에는 ‘1920년 경성기독교청년회 영어과 수료’ ‘1922년 동경 아테네프랑세 수료’ ‘1922년 4월1일 동경 명치대학 불어학부 입학, 1923년 3월25일 수료’한 것으로 기재돼있다. 이상화가 경성 중앙학교(현 중앙고) 3학년을 다니다 1918년 3월 그만둔 뒤 금강산을 유람했다거나 대구의 3.1운동 학생 시위를 주도하다 사전 검거를 피해 경성에 올라와 고향 친구인 성악도 박태원의 하숙집에 함께 기거한 사실은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때 YMCA영어과를 다닌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아카데미 프랑세 수료 후, 명치대 불어학부 1년 수학

이상화의 일본 유학 시기와 기간도 논란거리였다. 이상화의 벗 백기만 시인이 출간한 1951년작 ‘상화와 고월’을 비롯, 이어령의 ‘한국작가전기연구’나 김용성의 ‘한국현대문학사탐방’ 등의 연구서는 이상화의 도일 시기를 1923년초(또는 봄)로 썼다. 유학기간도 1년 쯤으로 봤다.

하지만 이상화의 자필이력서에 따르면, 아테네 프랑세를 수료하고 1922년4월부터 1년간 명치대학 불어학부에서 수학한 사실이 확인된다. 프랑스 유학을 목표로 한 이상화가 늦어도 1922년 초엔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얘기다. 아카데미 프랑세는 1913년 개교한 사립 불어학교로 지금도 도쿄 간다에서 성업중이다. 그간 이상화가 아카데미 프랑세에서 불어를 배웠다는 사실을 알려졌으나 명치대학 불어학부에서 1년간 수학했다는 사실은 이력서를 통해 새로 드러났다. 이상화는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의 참상을 목격하고 이듬해 봄 귀국했다. 따라서 유학기간도 2년 가량이란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마돈나, 나의 침실로’로 주목

이상화는 1922년 고향 친구 현진건의 소개로 ‘백조’ 동인에 참가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발을 내디뎠다. 그해 1월 나온 ‘백조’ 창간호에 ‘말세의 희탄’, ‘단조’를 실으면서 데뷔했고, 이듬해 9월 ‘백조’3호에 실은 ‘나의 침실로’로 주목을 받았다. 1924년 일본서 귀국한 뒤, 홍사용 박종화 나도향 박영희 등 ‘백조’ 동인들과 어울렸고, 파스큘라, 카프 같은 사회주의 성향 문학단체에서 활동했다.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스물다섯 살이던 1926년 ‘개벽’ 6월호에 발표했다.

이상화는 시국 사건이 터질 때마다 경찰에 붙들려가 고초를 치렀다. 1927년 대구로 낙향했으나 일제 감시는 이어졌다. 맏형 이상정은 중국군 장성으로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활약한 독립운동가였다. 1937년 중국에 건너가 맏형을 만나고 귀국했다가 대구경찰서에 붙잡혀 2개월간 고문과 구금을 당한 끝에 석방됐다.

◇조선일보 경북지사장 지내

이상화의 조선일보 근무 경력도 그동안 미스터리였다. 대부분의 이상화 연보는 1934년 ‘향우들의 권고와 생계 유지를 위해 조선일보 경북 총국을 맡아 경영했으나 경영미숙으로 1년 만에 포기했다’고 썼다. 하지만 조선일보 자료를 확인한 결과, 이상화가 조선일보 경북지사장으로 일한 시기는 1938년 3월부터 12월까지 9개월 남짓이다. 1938년 4월1일자 조선일보 사보(제6호)에 따르면, 이상화는 3월19일자로 경북지사장에 임명됐다. 이상화가 평생 거의 유일하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진 직업이었다.

상화가 교남학교에 몸담을 당시, 학교는 늘 경영난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월급을 제대로 주지 못했다. 이상화 생애를 다룬 책들은 ‘무보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썼다. 이상화 연구자인 김학동 서강대 명예교수는 ‘상화는 직장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유산으로 일본 유학도 갔고 귀국해서도 계속 유산을 팔아서 살았다’고 했다. 사업 경험 없는 시인이 지사를 운영하기엔 무리였던 모양이다. 조선일보 1938년 12월22일자엔 경북지사장 해임 인사가 실렸다.

◇IOC위원 지낸 사회학자 이상백이 동생

이상화는 1943년 4월25일 위암으로 마흔둘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한국사회학회 초대 회장이자 조선체육회이사장, IOC위원을 지낸 이상백(1904~1966)이 동생이다. 이상화는 저항시인으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참고자료

김학동, 이상화평전, 새문사, 2015

김윤식, 유종호 외, 근대문학, 갈림길에 선 작가들, 민음사, 2004

대륜100년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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