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몽룡(64회) - 아!!! 통한의 만루홈런 > 모교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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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건 조회 2,525회 작성일 2009-08-12 17:43
윤몽룡(64회) - 아!!! 통한의 만루홈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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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평의 아이&메모]담 넘고 즐거웠던 추억의 동대문운동장

동대문운동장이 오는 11월이면 헐립니다. 동대문운동장이라고 일반적으로 호칭하지만 아마도 제 또래, 40대 중반 이상의 올드팬들은 서울운동장이라고 지금도 부르고 그 명칭에 추억과 정을 느낄 것입니다.

서울운동장은 본래 1925년 10월 일제 시대 때 동대문 앞 성터에 최초의 국내 종합체육 시설로 개장됐습니다. 성동원두(城東原頭-성 동쪽 들판)라는 별칭이 붙었는데 1962년에 보수공사로 야구장, 배구장, 테니스장, 수영장 등이 국제 규모의 경기를 치를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1966년에 대대적인 확장공사가 이어져 2만2700석 규로로 확장됐고 야간 조명 시설이 마련됐으며 1968년에 메인스타디움과 육상경기장의 모습이 갖추어졌습니다.

강남 개발과 함께 1982년에 잠실종합운동장이 건립되자 서울종합운동장이란 명칭이 잠실로 넘어갔고 서울운동장은 동대문운동장으로 바뀌었습니다. 동대문운동장은 청계천 복원과 도심 개발에 따라 메인스타디움은 지난 2003년에 철거돼 주차장과 풍물시장으로 변했고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야구장도 우여곡절 끝에 철거가 확정돼 앞으로 시민공원으로 탈바꿈할 예정입니다.

지난 3월 19일 오세훈 서울시장과 신상우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는 동대문야구장을 철거하고 대체 야구장을 건립하는 양해각서를 체결했습니다. 대체 야구장은 고척동에 2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국제대회 개최 규모의 야구장과 난지동 2곳, 구의동, 신월동, 공릉동, 잠실동 등 7곳에 간이 야구장을 건설키로 했습니다.

이제 서너 달 후면 사라지는 동대문운동장에서 추억이 가장 많았던 대회는 고교야구대회였습니다. 동대문야구장에서 마지막으로 열리는 고교야구대회인 제 37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가 8월3일부터 18일까지 열리니 감회가 각별한 이곳에 많이 찾아 주길 바랍니다.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 부근 성동구(현재 중구) 신당동에서 태어난 저는 누구보다 동대문운동장 추억이 애틋합니다.

야구를 사랑한 많은 분들이 동대문야구장에 대한 추억이 있겠으나 감히 제 나름대로 동대문야구장에 관련한 추억과 명승부전 10꼭지를 정리해봅니다.

1. 야구장 담 넘어 구경가기

6.25 전쟁으로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피난갔다가 1년 후 환도한 저는 장충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해 야구를 시작했습니다. 인근 청구국민학교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야구를 하는 것을 보고 부러진

배트와 헌 공을 얻고 아버지가 동대문시장에서 사다 준 고물 글러브를 끼고 야구를 동네 친구들과 함께 배웠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56년 8월에 처음으로 재일교포학생야구단이 모국을 방문해 인기를 끌었고 저도 새로운 학생야구에 눈을 떴습니다. 이듬 해 제 2회 재일교포학생야구단이 왔을 때는 배수찬이란 뛰어난 투수가 눈부신 역투를 펼친 게 생생합니다.

그리고 제 3회 방문 때는 나니와 상고의 4번타자 장훈이 호쾌한 홈런을 날리는 장면을 직접 보고 두고두고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장훈이 온 뒤 두어 달 지난 1958년 10월에 미국 메이저리그의 명문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광복 후 처음으로 미국 프로야구팀으로 방한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백네트 뒤 본부석에서 구멍 뚫은 그물 사이로 한국대표팀 포수 김영조에게 시구를 했고 2만여 명의 대관중이 환호하던 모습이 어제 일같습니다.

세기의 장타자 스탠 뮤지얼의 2루타 등이 불을 뿜어 감탄했고 그래도 배용섭-김양중이 역투해 예상을 깨고 0-3, 적은 점차로 패한 게 신기했으며 성기영, 김희련, 박현식, 장태영, 김정환, 김진영, 진원주, 허정규 등 당대 명선수들의 플레이가 돋보였습니다.

그런데 부끄러운(?) 일이지만 저는 동대문운동장을 제대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구경한 적이 없습니다. 야구장은 외야석 가운데 뒷담장을 타고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시구문 건너편에 위치한 곳으로 당시에는 대장간과 철물점이 즐비했고 그 뒷편에 중국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중국인 집 지붕을 타고, 눈치를 보며 높이 3m 가량되는 제법 높은 담장을 아슬아슬하게 기어 올라 넘어갔죠.

장훈이 방문했을 때는 야구장 공사 관계로 경기는 육상장에서 임시방편으로 열렸고 홈런 펜스는 장애물 경기 때 사용하는 허들을 늘어놓았습니다. 육상장에 몰래 들어가려면 운동장 동쪽에 위치한 서울경찰기마대 담장을 넘어서 다시 수영장 담을 넘어가야 하는 고난도의 담치기가 필요했습니다.

2. 서울운동장 흙을 밟아보다

담치기의 재미에 빠지고 야구공(홍큐) 한 개라도 잡아볼까 해 열심히 서울운동장을 찾았으나 사실 야구공을 얻기는 쉽지가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파울볼이 관중석으로 날아가면 장내 스피커에서는 예쁜 아나운서 누나의 목소리가 즉각 나옵니다. " 관중 여러분 파울볼에 조심하세요. 잡으신 파울볼은 바로 선수들에게 돌려주세요. "

공을 돌려주지 않으면 대한야구협회가 고용한 동대문시장에서 힘께나 쓰는 젊은이들이 관중석으로 쫓아올라가 수색작전을 벌이고 공이 그라운드에 되돌아 떨어질 때까지 경기가 중단됩니다. 만일 파울볼이 운동장 밖으로 아예 날아가 을지로 차도에 떨어졌다면 야구협회 직원들이 쏜살같이 밖으로 뛰어나가 차도를 누비고 공을 찾아옵니다.

나라 경제가 어려운 시절이어서 이 같은 해프닝이 벌어졌는데 중고등학교 선수들은 으레 야구공을 꿰매서 썼고 살짝 부러진 배트는 못질해 사용했으며 성인야구의 최고봉인 실업야구팀에서도 하루에 새 공을 3~5개 정도만 썼습니다.

그래도 그 시절 서울운동장 흙을 직접 밟아본다는 게 커다란 영광이었습니다. 서울중학을 거쳐 서울고등학교를 다닌 저는 우리 팀이 서울고교팀 중에서도 중간 아래 수준이어서 전국대회는 출전해 보지 못하고 1학년 가을에 처음으로 서울운동장에서 추계리그전에 나갔는데 그 때 감격(?)은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그 직전에는 경동고가 이재환-백인천-오춘삼 트리오의 맹활약으로 32연승무패를 구가하며 전국을 떵떵거렸고 제가 공을 주으러 다닐 때는 성동고의 백수웅, 동산고의 최관수, 부산고의 김소식, 경동고의 김충남-김설권, 휘문고의 김병우, 경기공고의 김태령-이종술, 선린상고의 한동화-김충,

 

중앙고의 김옥수-하갑득,

 

대구상고의 정동진-유영수 등이 맹활약했습니다.

3. 처음으로 일본을 이긴 날

그날 친구들과 함께 시청 뒤 중국집에서 맛난 만두를 두둑하게 사고 운동장 앞에서는 말린 오징어를 봉투에 넣은 다음 일찌감치 외야석 가운데에 자리잡았습니다. 몇 달 있으면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지만 그래도 그날은 우리가 일본을 이길 것 같은 감이 들어서 고교 3년생들이 단체 입장을 한 것입니다.

1963년 9월 25일 제 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1차리그 일본과의 경기가 열리던 날, 서울운동장에는 2만5000여 관중이 꽉 들어찼습니다.

1회초 수비에서 유격수 재일동포 박정일의 에러로 한점을 내주어 장내 분위기가 가라앉았을 때 박현식이 베테랑답게 제가 앉은 근처에 장쾌한 동점홈런을 쳤습니다. 그리고 재일교포 배터리 신용군-서정리가 잘 던지고 잘 때려 5-2로 쾌승, 광복 이후 처음으로 야구에서 일본을 이겼습니다.

그리고 2차리그 일본전에서는 김응룡이 투런홈런 등 혼자서 3타점을 뿜으며 3-0으로 완승, 아시아 정상에 최초로 올라섰습니다.

4. 고교야구대회 전성시대

1960년대 들어 고교야구대회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청룡기대회(조선일보 주최), 황금사자기대회(동아일보 주최), 부산 화랑대기대회(국제신보 주최)에 이어 1967년에 대통령배대회(중앙일보 주최)가 새로 생겨 더욱 붐을 이루었습니다.

선도 주자는 경북고였습니다. 일본에 건너가 히트앤드런 등 기동력야구와 팀배팅을 도입한 서영무 감독은 걸출한 좌완 임신근과 조창수, 강문길 등 인재를 발굴해 '경북고 전성기'를 열었습니다.

제 1회 대통령대회 결승에서 선린상고를 3-0으로 누르고 우승한 경북고는 제2 회 대회서도 준결승에서 경남고와 연장 10회 접전 끝에 조창수가 극적인 끝내기 홈런을 터트려 1-0으로 이기고 결승에선 배문고에 6-1로 낙승해 2연패를 달성했습니다. 경북고는 서울에서 열린 3개 대회 모두를 석권해 고교야구에 서울과 인천, 부산세에 이어 경북야구가 새로운 강자로 등장했음을 알렸습니다.

5. 전국팀 총출동 봉황대기 탄생…경북고 5관왕

고교야구 인기가 날로 치솟자 1971년에 봉황대기대회(한국일보-일간스포츠 주최)가 생겼습니다. 전국 모든 고교야구팀이 방학 때 빠짐없이 참가할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정부에서도 고교야구대회가 너무 많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인가를 해주었습니다.

임신근에 이어 남우식, 황규봉을 배출한 경북고는 그 해 첫 대회였던 대통령배대회 결승에서 김정수가 역투한 부산고에 1-0으로 신승한 다음 청룡기대회서는 경남고와의 결승에서 천보성의 결승타로 1-0으로 힘겹게 우승했습니다.

대구 문교부장관기대회서 동산고를 꺾고 우승한 경북고는 화랑대기대회서는 황규봉이 쾌투하며 부산상고를 6-1로 완파해 패권을 차지하고 새로 생긴 봉황대기대회서는 참가 37개팀 중에 마지막 상대로 서울의 대광고와 만났습니다. 남우식과 이동한이 투수전을 벌인 이날 경북은 6회초에 천보성이 또 결승타를 때려 1-0으로 승리, 초록봉황대기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전국지구별초청대회(황금사자기)에선 계형철과 윤몽룡이 계투한 중앙고를 6-0으로 완파하고 5개 전국대회를 모조리 석권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6. 윤몽룡의 만루홈런 시비

황금사자기대회 결승에서 분패한 중앙고의 윤몽룡은 1972년 청룡기대회 준결승에서 경북고를 만납니다. 기교파 윤몽룡은 2피안타 1실점으로 호투하고 김승수가 적시타를 때리며 4-1로 승리해 황규봉에게 설욕하고 팀에 최초로 청룡기를 안겼습니다.

그 해 전국 41개팀이 총출동한 봉황대기대회서 윤몽룡-김승수 배터리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결승까지 진출해 상대적으로 약팀으로 평가받던 배명고와 대결했습니다.

 

2만5000관중이 만원을 이룬 가운데 윤몽룡은 6회말 만루홈런을 날려 팀이 4-1로 앞서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만루홈런이 왼쪽 라인을 넘어갔느냐 아니냐로 30여분간 실랑이가 벌어지는 해프닝이 벌어졌고 결국은 홈런으로 판정됐습니다만 시간을 끌다가 등판해서인지 윤몽룡이 판정시비 후 얻어맞았습니다. 결국 김정남과 김용윤이 계투한 배명이 8회초 4점을 뽑아 7-5로 역전승을 거두는 대이변이 벌어져 한동안 화제가 됐습니다.

 

 

 

7. 군산상고의 역전 드라마

역전승하면 위의 드라마보다는 두 달 앞서 열린 황금사자기대회 결승에서 군산상고-부산고의 대결입니다.

군산상고는 위기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아 '스마일 투수'란 애칭이 붙은 송상복이 위력적인 피칭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12안타를 내주었습니다.

부산고는 편기철-조규철이 이어 던지고 3회초에 김일환이 2루타를 때리며 3-1로 앞섰습니다. 패색이 짙던 9회말 군산상고는 선두 6번 김우근의 안타에 이어 1번 김일권이 밀어내기 몸에 맞는 공을 얻어내고 2번 양기탁이 동점 2타점 적시타를 때렸습니다. 그리고 3번 김준환이 회심의 끝내기 좌전적시타를 날리고 3루수 주루방해까지 얻어 팀 창단 3년만에 처음으로 정상에 올랐습니다. 군산상고의 우승으로 서울운동장 맞은편과 동대문시장, 장충단 소주집은 호남 사람들로 밤새 불야성을 이루었습니다.

8. 선동렬-박노준-박동희의 추억

광주일고의 선동렬은 3학년 때인 1980년 대통령배대회서 팀의 5번 타자 겸 투수로 출전해 김태업과 이순철이 투타로 나선 광주상고와 결승서 만나 8-2로 승리하며 각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봉황대기대회서는 1회전에서 경기고를 만나 전원 탈삼진, 15개 탈삼진을 기록하며 노히트노런의 대기록을 수립했습니다.

초고교급 투수진이라고 평가를 받은 선린상고의 박노준-김건우 콤비는 1981년만큼은 불운의 연속이었습니다. 청룡기대회 결승서 경북고와 만난 선린상고는 연장 11회 5-6으로 분패했고 화랑기대회서는 신일고에 연장 12회까지 접전 끝에 2-3으로 패해 우승기를 넘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봉황대기대회서는 성준류중일이 뛰던 경북고를 다시 만나 4-6으로 져 세 번째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박노준 개인으로는 더구나 이 결승전 1회말에 슬라이딩하며 홈에 뛰어들다 왼발목이 접히며 발목뼈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어 아픔이 더 컸습니다. 하지만 최고 인기를 누리던 박노준이 중상을 당하자 그가 입원한 한국병원에는 수많은 여학생 팬들이 찾아와 눈물을 흘리고 위문하는 모습이 매스컴에 크게 보도돼 최초의 '여학생들의 스포츠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최동원과 선동렬을 이을 대형 투수로 점찍힌 부산고의 박동희는 1985년 봉황기대회부터 명성을 날렸습니다.

 

중앙고와 휘문고를 연거푸 완봉한 박동희는 결승에서 광주상고 신동수와 맞대결해 3-1로 승리, 우승을 따냈습니다. 1실점했으나 비자책점으로 대회 평균자책점 0을 기록했습니다.

 

9. 이종도의 실업야구 1000호 홈런과 프로 개막전 만루홈런

 

1972년 10월에 한국일보 기자로 저는 사회부를 거쳐 1976년 봄에는 체육부로 옮겼습니다. 당시 성인야구는 고교야구보다 인기가 처졌지만 1976년에는 롯데의 가입으로 실업팀이 10개팀으로 늘어났고 그 덕분에 관중도 하루 5000명을 상회했습니다. 최고 인기는 선수 아닌 김동엽 롯데 감독의 현란한 제스처와 커다란 목소리였습니다.

재미가 붙기 시작한 실업야구를 위해서 무얼 취재할까를 고민하다가 마침 실업야구 기록이 정립된 1964년 이후 통산 1000호 홈런 기록이 나올 즈음이란 사실을 알고 4월 7일에 서울운동장을 아침 일찍부터 갔습니다.

 

공군-제일은행의 첫 경기가 열리고 있었는데 공군 소속이던 이종도가 1000호 홈런을 날렸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단독으로 '이종도 1000호 홈런'이란 표제로 기사를 크게 게재해 야구팬들에게 기록의 값어치를 알리고 눈길을 끌었던 게 생각납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MBC 청룡에 입단한 이종도는 3월 27일 서울운동장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또 한번 일을 저지릅니다.

 

전두환 대통령의 시구로 열린 삼성-MBC전에서 이종도는 연장 10회말 끝내기 만루홈런을 날려 청룡에 11-7, 승리를 선사하고 프로야구의 성공 팡파레를 울렸습니다.

 

 

10. 휘문고와 덕수상고의 우승

프로야구가 잠실구장에서 열려 고교야구 인기가 쇠퇴한 가운데도 동대문야구장에서는 새로운 팀들이 명문 대열에 들어섰습니다.

1907년에 창단해 한국고교야구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휘문고는 김병우 등 명투수를 배출했으나 고교 무대에서는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하다가 1994년 제49회 청룡기대회서 장충고와 결승전에서 대결해 감격의 우승을 따냈습니다. 주역은 2년생 정통파 투수 김선우였습니다. 김선우는 완투하며 5피안타 2실점으로 호투했고 3회에 볼넷으로 걸어나가 첫 득점을 올렸고 6회엔 투런호머도 날려 5-2로 승리, 팀 창단 87년만에 우승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덕수상고는 1986년 청룡기대회 준결승전에서 난적 서울고에 4-3으로 신승하고 결승에서는 대전고에 4-2로 역전승해 처음으로 정상에 올랐습니다. 덕수상고는 1994년 황금사자기대회서 경남고를 7-1로 꺾고 8년만에 패권을 차지한 다음 그 해 봉황대기대회서는 배명고에 4회초까지 0-4로 뒤지다가 9회말에 6-5로 역전승하며 2관왕을 차지해 서울의 새로운 명문고로 자리잡았습니다.

이제 동대문야구장은 8월 3일부터 열리는 봉황대기를 끝으로 고교야구대회는 볼 수가 없게 됐습니다. 8월 30일부터 9월 20일까지 거행되는 전국대학야구 추계리그전과 9월 28일~10월 3일에 벌어지는 제 1회 도시대항 사회인야구대회를 마지막으로 폐장합니다.

추억의 동대문운동장-서울운동장에 예전의 추억이 계속 남아 우리가 보러 갈 기회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천일평 OSEN 편집인

< 사진 위 > 이승만 대통령(사진 원내)이 1958년 10월 21일 메이저리그 명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초청경기 식전 행사로 그라운드에 서 있는 김영조 포수에게 백스톱 구멍으로 시구하고 있는 광경. (사진 출전 KBO 편찬 < 한국야구사 > )

< 사진 가운데 > 전두환 씨가 1982년 3월 27일 프로야구 출범 개막전에 앞서 시구하고 잇는 모습.

< 사진 아래 >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에서 6개구단 선수들이 입장식을 하고 있는 장면(사진 출전 KBO 편찬 < 한국프로야구 20년사 > )

< 2007 삼성 PAVV 프로야구 >

 

 

 

 

 

올해로 100년을 맞은 한국야구사에서 최고 투수는 누구일까요?
이런 제목을 붙여놓으니 대부분 머리 속으로 ‘나는 선동열’ ‘나는 박찬호’ ‘나는 최동원’이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어떤 분은 최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성고 3년생 한기주를 지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올해로 우리나라에 야구가 도입된지 100년이 됐지만, 제가 철이 들고 나서 TV 화면을 통해 직접 투구장면을 본 것은 1970년부터입니다. 당시 대구상고 3학년인 정기혁 투수가 요즘 그렉 매덕스(시카고 커브스)처럼 요리조리 두뇌 피칭을 하면서 청룡기 우승을 하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선합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야구 100년사의 최고투수가 아니라 35년사(1970~2005년)의 최고투수를 논하는 셈입니다. 1949년 당시 청룡기 결승전에서 명승부를 펼쳤다는 장태영(경남고)과 김양중(광주일고) 같은 분들은 제가 직접 투구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뭐라고 얘기하긴 어렵습니다.

 

kp1_2050414p1533.jpg <동성고 3학년 한기주 투수>

 

요즘 토요일 밤이 되면 꼭 30분씩 EA스포츠에서 나온 PC게임인 ‘2005 MVP 베이스볼’을 집에서 즐깁니다. IT 전문기자인 어떤 후배가 야구광인 저를 위해 준 선물입니다. EA의 야구게임은 매년 업그레이드를 계속 해나가, 이제는 실제와 유사한 단계까지 온 느낌입니다.

랜디 존슨, 커트 실링, 페드로 마르티네스, 빌리 와그너, 바톨로 콜론 등 환상적인 명투수들의 공을 생생하게 치는 기분을 느낍니다. 이 게임을 즐기면서 느끼는 것은 역시 단순히 스피드만 좋다고 하여 일류투수가 되는건 아니라는 점이지요. 시속 95마일(153 ㎞)이 넘는 스피드의 공을 던지더라도 초속과 종속의 작은 격차, 공의 미세한 변화가 따르지 않으면 ‘저에게’ 통타를 당하고 맙니다.

가령 빌리 와그너(필라델피아 필리스)는 100마일(161 ㎞)이 수시로 넘는 광속구를 던져 대면서도 성적은 별로인 점이 늘 궁금했는데 EA게임을 통해서 그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외계인’이란 별명의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스피드는 평균 93마일(150 ㎞)에 그치지만 공의 변화는 까탈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그밖에 마리아노 리베라(뉴욕 양키스)의 컷 패스트볼도 소문대로 좋습니다. 공을 낚아챌때 가운데 손가락에 힘을 줘 오른손 타자의 바깥쪽에 떨어지게 만드는 이 구종은 속도까지 빨라 알고서도 치기 어렵습니다. 쾌속 투수 케리 우드의 속도감 있는 파워커브, 존 스몰츠의 슬라이더, 에릭 가니에의 체인지업, 로저 클레멘스의 SF볼(스플릿 핑거드 패스트볼), 배리 지토의 낙차 큰 커브, 케빈 브라운의 싱커, 짐 메시어의 스크루볼 등도 한국 투수들이 영원히 벤치마킹할 대목입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와 직접 비교할 수준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도 100년 동안 스피드, 변화구, 제구력, 견제능력, 수비 등에서 뛰어난 투수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각 분야에 뛰어났던 투수들을 골라 봅니다. 물론 저의 주관적인 견해입니다. 혹시 다른 견해가 있다면 의견을 적어 주십시오.

 

 

▶종합 >>>
가장 많은 분들이 동의하듯 저도 선동열입니다. 선동열의 투구 스타일에 대해서는 얼마전 제 블로그(2004년11월12일)에 자세히 정리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선동열은 명투수의 3대 요소인 속도(Velocity), 제구력(Location), 볼끝의 변화(Movement) 등이 모두 훌륭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다만 미국 무대에서 그의 실력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점이 다소 아쉽습니다. 선동열이 미국에 갔다면 미국선수들의 팔이 길어 그의 아웃코너 강속구와 슬라이더를 충분히 칠 수 있었으리라는 주장도 있지만, 선동열이 미국에서도 홀대받을 수준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선동열에 비해 최동원은 자신의 마인드 컨트롤과 정교함이 부족하고, 박철순은 체력과 스피드와 담력이 모자랍니다. 박찬호는 선동열에 비해 제구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때로 끈질긴 프로페셔널한 정신도 아쉬워 보입니다. 동성고 3학년 한기주는 스피드와 포크볼이 경탄스럽지만 아직 좀더 지켜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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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시절의 선동열>

 

 

▶스피드 >>>
야구의 꽃은 투수요, 그중에서도 꽃은 0.3초 이내에 포수 미트에 공을 꽂아대는 ‘포심 패스트 볼’(Four seam fastball)입니다. 은퇴한 선수로는 선동열과 박동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현역중에는 SK 엄정욱이나 LG 서승화가 스피드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단순 스피드로는 100마일(160 ㎞)에 육박하는 ‘총알 탄 사나이’ 엄정욱을 한국 최고로 치고 싶습니다. 고교시절만 보면 경북고의 남우식과 황규봉, 배재고의 하기룡, 경남고의 최동원, 광주일고의 선동열, 부산고의 박동희, 동산고의 위재영 등이 스피드볼 정통파 투수로 기억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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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후 시구하는 최동원>

 

 

▶제구력 >>>

국내에도 그렉 매덕스와 같은 '칼' 제구력 투수는 없을까. 구원투수들은 기본적으로 컨트롤, 즉 제구력이 좋아야 하겠지요. 물론 포수의 한 가운데 공을 던지는 능력이 제구력이 아니라는건 모두 알고 계시지요. 기자의 기억으로는 과거 이상군과 김용수 같은 투수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무명투수이긴 하지만 대구상고의 이척기 같은 투수도 스트라이크 구석 곳곳으로 공을 던지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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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한 제구력의 이상군. 그는 사실 청주중학교 시절부터 이름을 날렸다. 동기인 선동열이 무명일때 말이다.>

 

 

▶좌완투수 >>>
해답이 분분할 것입니다. 임신근, 이선희, 권영호, 양상문, 성준, 구대성, 이상훈, 송진우, 윤석환 등등. 제가 감독이라면 이선희와 구대성, 2명을 뽑아가겠습니다. 아마추어 세계대회가 열리면 선발인 최동원이 자신도 처리못하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마운드에서 내려오면 노련한 이선희가 올라가 뒷수습을 하곤 했지요. 오른쪽 팔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가 던지는 이선희의 부드러운 투구 폼은 좌완투수의 교과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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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시절, 만루홈런을 잘맞아 비운의 투수로 불렸던 이선희. 하지만 아마추어 국가대표 에이스로서 이선희의 공로는 지대했다.>

 

 

▶슬라이더 >>>
손이 유달리 작은 선동열이 변화구 대신에 집중적으로 개발한 구종이지요. 직구와 구분하기 어렵게 타자 앞에서 확 휘어지는 위력적인 슬라이더는 선동열의 간판입니다. 타자 입장에서는 끔찍한 악몽입니다. 그밖에 이선희와 김시진, 그리고 ‘고무팔’이라는 별명을 갖고있던 한화 이글스의 이상군 등이 슬라이더의 명수였고, 요즘 롯데의 염종석도 슬라이더로 한몫 합니다. 김시진은 프로야구때보다 한양대 재학시절에 가장 위력적인 슬라이더를 많이 던졌습니다. 한미대학야구에서 보여준 김시진의 슬라이더에 당시 미국 사람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밖에 시속 140㎞대의 낙차 큰 변종 슬라이더를 던진다는 ‘조라이더’ 조용준(현대 유니콘스)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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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니콘스 코치를 맡고있는 김시진. 고교시절 최동원, 김용남과 함께 트로이카를 이루었다.>

 

 

▶견제구 >>>
70년대말 국가대표 마운드를 주름잡았던 이선희의 견제구는 일품입니다. 부드러운 몸 동작에 손과 발이 따로 노는 독특한 포즈 때문에 ‘비명에 횡사한’ 주자들이 한두명이 아닙니다. 이선희의 경기를 보면 한 경기에 꼭 한명 이상의 주자를 견제구로 잡았던 기억이 납니다. 세계 아마추어 야구대회에서 이선희의 독특한 투구 스타일을 몰라 견제사 당한 외국선수들이 많습니다. 해태 시절 독특한 투구폼으로 이름을 날렸던 좌완 김정수도 견제구에서는 뛰어났고, 일본에 있다가 미국으로 건너간 구대성도 위력적인 견제구를 던졌습니다.

7777.jpg<뉴욕 메츠에서 활약하는 구대성의 일본 프로야구 시절>

 

 

▶변화구 >>>
단연 ‘짱꼴라’란 별명에 10가지 종류의 공을 던진다는 장호연(전 신일고 감독) 투수를 꼽습니다. 대구상고를 다니다가 동기인 양일환에게 밀려 푸대접받을 것을 걱정해서인지 서울 충암고로 옮긴 그는 봉황대기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자그마한 키에서 예측 불가능하게 날아오는 그의 공은 한마디로 마법사였습니다. 슬로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 슈트, 포크볼, 싱커 등등 그의 손에 농락당한 타자들이 한두명이 아니지요. 1988년 개막전에서는 당시 OB 투수였던 장호연이 롯데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고인이 됐지만 중앙고 시절 슬로커브로 청룡기 우승을 이끈 윤몽룡 투수도 장호연 투수의 라이벌로 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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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교파의 왕인 장호연. 신일고 감독 시절 모습이다.>

 

 

▶잠수함 >>>
밑이나 옆에서 공을 던지는 투수를 흔히 ‘서브마린(잠수함) 투수’라고 하지요. 군웅할거입니다. 노상수, 이길환, 진동한, 임창용, 이강철, 김병현, 박충식, 박정현 등이 떠오릅니다. 개인적으로는 항상 깨끗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철저한 자기관리를 하는 이강철을 좋아합니다만 막상 실전에 투입하라면(가장 잘나가던 시절을 기준으로) 임창용이나 김병현, 박충식을 등판시킬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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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드의 젠틀맨 이강철>

 

 

▶배짱 >>>
얼마전 돌아가신 삼미의 장명부 투수입니다. 1983년에는 한해 30승도 기록했지만 그 이후 그는 난타도 많이 당했습니다. 그의 별명은 ‘너구리’였지요. 장명부는 투수가 던질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구질을 구사, 국내 타자들을 자유자재로 요리하며 30승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고 최다출장(60), 최다선발(44), 최다타자상대(1712), 최다투구이닝(427 1/3), 최다투구수(5886), 최다완투승(26) 등 초인적인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런 기록은 모두 그의 두둑한 배짱에서 나왔습니다. 연타석 홈런을 맞고도 특유의 너구리 표정으로 다시 한가운데다 공을 질러대는 그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 야구팬들에게 아련한 향수로 남았습니다. 최동원도 배짱이라면 빼놓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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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시절의 장명부 투수>

 

 

▶매너 >>> 
삼성 라이온즈의 재일교포 ‘황금박쥐’ 좌완 김일융, 현재 롯데 감독인 좌완 양상문, 기아의 잠수함 투수 이강철 등은 마운드에서 깔끔한 외모와 매너로도 돋보이는 명투수들이었습니다. 워낙 공을 던지는 템포가 느려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삼성의 좌완투수였던 성준도 좋은 그라운드 매너로 칭찬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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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시절에 역투하는 재일교포 김일융 투수. 70년대 중반 전성기 시절의 강속구는 아니었지만 노련한 피칭으로 한국타자들을 농락했다.>

 

 

▶피지못한 꽃 >>>
정말 아쉬운 투수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부산고와 고려대, 롯데를 거친 ‘수퍼 베이비’ 박동희 입니다. 능력에 비해서는 초라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건설업체 ㈜스파크산업개발에서 산업개발 및 관리 부문을 담당하며 샐러리맨으로 살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었습니다. 대구상고 시절에 요즘 동성고의 한기주와 비슷한 찬사를 받으면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던 이정호 투수도 불안한 컨트롤 때문에 프로야구에서 빛을 보지 못해 아쉽습니다. 위재영 류제국 임선동 김선우 봉중근 등도 그런대로 던지기는 합니다만, 고교시절의 화려한 명성 만큼은 국내외에서 별로 이름을 날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모두 여러가지 사연이 있지요. 조만간 그들이 예전의 명성을 되찾을 것으로 기대해 봅니다. 

 

<아래 사진은 회사원으로 변신한 박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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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야구대제전이 큰 흥행의 성공속에서 경남고의 우승으로 마무리되고 1년이 지나 이듬해 또다시 야구대제전은 찾아옵니다.

이제 2회째가 되는 것인데, 전년에 비해 두팀이 줄어들어서 참가팀은 24개교.

장충과 보성, 상문이 선수부족으로 참가하지 못했고 대신 김재박의 대광이 참가합니다.

한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1회때와는 달리 고교재학생들은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1회때와 비슷한 포맷으로 8강전을 중심으로 대회를 요약해 보겠습니다.

 

 

 

<중앙고 - 동대문상>

 

중앙은 대회 개막전인 배재고전에서 고교시절을 풍미했던 에이스출신 윤몽룡이 3점홈런을 두개나 치면서 타격에서 맹활약, 이광은-하기룡이 버틴 배재를 10-1 콜드게임으로 이기고 16강에 진출합니다.

 

중앙의 투수는 계형철과 홍재진.

 

배재는 다른 학교와는 달리 올스타전의 축제분위기를 만끽하려고 했는지 선발투수로 포수인 신언호를 느닷없이 기용하면서 1회부터 윤몽룡의 3점포와 이종도의 2루타 등을 허용 일찌감치 분위기를 넘겨주게 됩니다.

 

중앙은 2회전에서도 박철순이 미국으로 떠나버린 배명을 맞아 15-1 5회콜드승을 거두면서 쾌조의 진군을 하게됩니다.

배명 또한 고교시절 투수였지만 성인무대에서 야수로 뛰는 김용윤(김바위)를 투수로 내놓을 만큼 선수가 부족한 팀이었습니다.

 

동대문상은 박상열이 5이닝 완투하면서 서울고를 15-0 5회콜드로 1회전을 통과합니다.

동대문상의 김인식-박해종-김유동의 타선을 선우대영이 버티던 서울고 마운드가 견뎌내지 못합니다.

이어 2회전에서는 한동화감독이 이끄는 신흥강호 충암과 만나게 됩니다.

충암은 선발 기세봉에 이어 2회부터 장호연이 나왔고 포수로 조범현이 마스크를 쓴 만만치 않은 팀으로 동대문상고의 강타선이 쉽게 공략하지 못했지만 김용수와 박상열이 이어던지면서 실점을 하지않으면서 4-1로 충암을 제칩니다.

 

중앙고와 동대문상고의 8강전.

 

중앙고는 선발 계형철에 이번 대회 처음으로 투수로 나오는 윤몽룡이 4회부터 나왔고, 동대문상도 선발 박상열이 초반 3실점하자 김용수를 3회부터 이어던지게 합니다.

 

야구원로 김영조씨의 아들인 중앙고 포수 김승수가 홈런을 치면서 중앙고가 4-2로 신승을 거두면서 4강에 진출.

 

전년도 첫판탈락의 아쉬움을 씻어냅니다.

 

 

<부산상 - 군산상>

 

김응용감독이 이끌던 부산상은 1회전 광주상고를 맞아 11-2로 쾌승을 거둡니다.

노상수와 이해 대학신입생이었던 윤학길이 이어던졌고 포수로는 전년과 마찬가지로 김용철이 활약.

광주상고는 박노삼이 7회까지 2실점하면서 호투했지만 8회와 9회에 대거 9점을 내주면서 패하게 됩니다.

2회전은 대광고전. 김재박이라는 슈퍼스타가 있었지만 대광의 얕은 선수층으로는 부산상을 넘기 어려웠습니다.

박건이 투수로 나오고 김용달이 포수로 나온 대광을 맞아 6-4로 부산상의 승리. 부산상은 역시 노상수가 완투승을 거둡니다.

 

역전의 신화를 이뤄낸 최관수감독의 군산상은 부전승으로 1회전을 통과합니다.

상대는 광주일고와 대구상고의 승자였는데, 확실히 당시까지 광주의 야구는 강하지 못했습니다.

방수원이 던진 광주일고를 맞아 대구상은 6-2로 승리, 허리가 좋지않다는 소문이 돌던 김시진은 6회부터 나와 깔끔하게 마무리를 합니다.

대구상과 군산상의 경기는 한양대 4학년 동기면서 라이벌이기도 했던 김시진과 김용남의 대결로 관심을 모았지만 김시진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서 김용남이 완투한 군산상이 3-1로 승리합니다.

 

부산상과 군산상의 8강경기는 의외로 군산상이 맹폭을 하면서 8-1 7회콜드승을 거두게 됩니다.

군산상은 조도연과 김용남의 계투였고 김봉연이 2점홈런을 쳤고 김일권, 김준환, 김우근 등 군산상이 자랑하는 호화타선이 빛을 발하게 됩니다.

 

 

<경남고 - 동산고>

 

전년도 우승팀 경남고는 2회대회에서도 승승장구하게 되는데 1회전 배문고와의 경기에선 최동원을 쓰지도 않은채 7-2로 낙승합니다.

경남은 박정후와 배경환의 계투.

2회전에서 만난 선린상고전. 이 두팀은 전년도 결승에서 만난 사이였습니다.

경남은 박정후를 선발로 내세웠다가 1회 일찌감치 최동원을 투입했고 선린상은 이길환과 윤석환의 계투였는데 전년도 결승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김용희가 홈런을 치고 우경하가 2루타를 치면서 5-2로 경남이 승리하게 됩니다.

 

동산고는 1회전 부전승.

인천고와 마산상고의 1회전 경기에서 인천 임호균과 마상 엄태섭의 완투대결 끝에 2-1로 마산상이 신승을 거둡니다.

동산은 마산상을 맞아 뒤에 삼미의 원년맴버들로 활약하는 김재현-금광옥 배터리의 활약으로 7-2로 승리합니다.

 

경남고와 동산고의 16강전.

경남은 천창호라는 또한명의 에이스급 투수가 나오면서 6-3으로 승리하면서 4강진출.

우완인 최동원과 배경환, 좌완인 박정후와 천창호, 한창 전성기를 보내고 있던 많은 투수들을 보유한 경남의 쾌속행진이었습니다.

 

 

<휘문고 - 부산고>

 

휘문고는 1회전 부전승.

김연철-홍순만이라는 재학시절 나름대로 훌륭한 배터리가 나온 대전고는 김정수의 신일을 14-1, 5회콜드로 대파하고 휘문고와 만납니다.

휘문은 몇번 소개한적이 있는 김현재가 완투하면서 역시 김연철이 완투한 대전을 3-2로 꺽고 6강에 진출합니다.

 

부산고도 1회전을 부전승으로 통과하는데 상대가 우승후보 경북고였습니다.

경북고는 투수생활을 거의 접었던 남우식까지 등장하면서 1회전 성남고를 8-0으로 가볍게 일축하고 부산고와 16강전을 벌이는데 전년도에도 8강전에서 부산고에게 일격을 당했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경북은 이선희가 컨디션이 좋지않아 가동되지 않았지만 진동한-황규봉의 계투라면 거의 최강의 마운드였는데 이번에도 부산고에게 4-3으로 패하게 됩니다.

부산고는 복병인 김재열이 완투를 하고 김일환이 8회 결승타를 치면서 2년연속으로 우승후보를 따돌리게 된 것이죠.

 

휘문과 부산고의 8강전은 의외로 휘문이 초반 앞서나갔지만 6회 만루찬스에서 동아대 재학중인 조성옥이 주자일소 2루타로 동점을 만들고 9회말 대타 장상철이 끝내기안타를 치면서 5-4로 힘겹게 4강에 진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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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기 고교야구 60 년… 스타들도 빵빵하네
잠수함 김병현, 면도날 양상문, 초특급 최동원 등 명성
이승엽은 투수로, 박찬호는 타자로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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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장 11회. 비까지 뿌려 배트와 글러브는 미끄럽게 젖어 있었다. 3시간56분의 숨막히는 사투가 진행되는 가운데 선린상고 좌완투수 박노준(朴魯俊)의 강속구가 경북고 3번 타자 홍순호의 옆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순간, 홍순호의 방망이가 번개처럼 돌아갔다. 좌익수 앞 적시타. 3루에 있던 김윤영은 껑충껑충 춤을 추며 홈인했다. 1981년 제36회 청룡기 결승전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당시 우완투수 김건우(金健友)와 함께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니던 초고교급 스타 박노준은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떨구었다. 고교 1년 때부터 주전으로 뛴 그는 청룡기 대회에서 1학년 때 준우승, 2학년 때 우승을 잡아냈던 터. 하지만 3학년 때는 다시 준우승에다 개인적으로는 감투상으로 만족해야 했다. 박노준은 최근 “청룡기는 최고 권위의 학생 야구대회여서 졸업반 때는 꼭 우승하고 싶었다”면서 기자에게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현재 SBS 해설위원인 박노준은 차분하고 논리적인 해설로 인기를 모으고 있으며, 당시 선린상고를 물먹인 경북고 좌완투수 성준(成埈)은 프로야구 통산 97승을 기록한 뒤 현재 SK 투수코치로 활약하고 있다. 성준은 고교시절부터 노트에다 상대방 선수의 장단점을 모두 기록, 분석하는 등 가장 공부를 많이 하는 선수로 인정받았다. 당시 선린상고를 격파한 경북고는 청룡기 역사상 최다(7회) 우승 기록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배움’ ‘근검’ ‘예절’ 중시해

조선일보사가 주최하는 올해 청룡기 전국 고교야구선수권대회가 6월 1일 동대문야구장에서 개막된다. 제60회. 사람으로 치면 환갑의 나이다. 올해로 국내에 야구가 도입된 지 100년. 그 역사는 청룡기가 썼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기까지 고교야구의 열기는 요즘 젊은이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웠다. 결승전이 열리는 날이면 교통량은 절반으로 줄어들고 대부분 상가는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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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기 대회는 가장 오랜 역사만큼이나 드라마틱한 명승부와 진기록을 엮어내며 숱한 야구 스타를 배출해냈다. 1973년 대구상고는 강태정 신임감독의 지휘로 대통령배, 봉황기, 황금사자기 등 전국대회 3개를 휩쓸었다. 하지만 강 감독의 마음은 아쉬웠다. 청룡기 대회 땐 대구지역 예선전에서 대건고에 패배해 아예 본선에 나가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청룡기에 붙는 ‘선수권(選手權·championship) 대회’란 권위가 못내 그리웠다고 한다. 청룡기는 ‘배움’ ‘근검’ ‘예절’을 가르쳐 다른 대회와는 차별화되는 측면이 많았다. 그래서 역대 청룡 스타는 자부심도 크다.

1949년 제4회 대회. 광주서중(광주일고)의 김양중(金洋中)과 경남중(경남고)의 장태영(張泰英), 두 걸출한 좌완투수가 대결을 벌인 결승전은 사소한 실책 하나가 승부를 갈랐다. 당시 장태영 투수는 170㎝가 조금 넘는 키에도 불구, 140㎞대의 강속구를 던졌다. 9회까지 1 대 0으로 앞서던 경남중은 2사후 2루수의 1루 악송구가 빌미가 돼 동점을 허용한 뒤 연장 11회말 김양중에게 끝내기 중전 적시타를 맞아 1 대 2로 역전패, 대회 첫 3연패(連覇) 달성에 실패했다. 경남중 포수 송재창은 홈플레이트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했다.

장태영은 고교졸업 뒤 서울대 상대에 진학했다. 장태영은 “운동선수도 공부를 잘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코피가 흐를 정도로 공부했다”고 말했다. 이후 장태영은 대한야구협회 등에서 일하다가 1999년 8월 타계했다. 라이벌이었던 김양중(75)씨는 서울중앙병원에 달려와 라이벌의 죽음을 누구보다 서러워했다.

청룡기 초기 스타 중엔 동산고 신인식(申仁植) 투수를 빼놓을 수 없다.

 

동산고와 중앙고가 맞붙은 1956년 제11회 대회 결승전. 역시 실책으로 승부가 갈렸다.

 

동산은 5회말 안타와 상대방 실책, 그리고 희생타 2개로 귀중한 결승점을 뽑았다.

 

 당시 171㎝, 65㎏의 작은 체구였던 신인식은 결승전에서 삼진 11개를 엮어가며 노히트 노런의 대기록을 세웠다.

 

1회초 중앙고 1번타자 천진환의 타구를 유격수 박하성이 실책만 하지 않았다면 퍼펙트 게임을 기록할 뻔했다.

 

그는 별다른 변화구도 없이 강속구 하나로 고교시절 3년 연속 청룡기 우승을 이끌어냈다.

 

청룡기 결승전의 노히트 노런 기록은 1992년 제45회 때도 나왔다. 당시 박찬호의 공주고 1년 후배인 노장진(盧長震)이 선린상고를 상대로 기록한 것. 노장진은 삼성을 거쳐 현재 롯데의 마무리 투수로 뛰고 있다. 선린상고는 결승전만 되면 참 운이 없는 학교로 기억되고 있다.

1960년대 말에는 경북고의 좌완투수 임신근(林信根)이 혜성처럼 나타났다. 임신근은 1967년과 1968년 경북고를 연거푸 청룡기 정상에 올려놓고 자신은 모두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졸업 후 불어난 체중과 어깨 통증을 이기지 못해 한일은행에서 타자로 변신, 각종 타격상을 휩쓸었다. 그러다가 1991년 9월 쌍방울 창단 수석코치 시절 구단 버스 안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40대 초반의 나이였다.

20050601000024_03.jpg1960년대 말과 1970년대는 대구 야구의 전성기였다. 1970년 제25회 때는 대구상고 정기혁(鄭基赫)이 오늘날 그렉 매덕스(시카고 커브스)를 연상시키는 정교한 제구력으로 청룡기를 낚아챘다. 정기혁은 2학년 때도 준우승을 하면서 감투상을 받아 청룡기와는 인연이 깊다. 그가 35년 전 만든 사진 스크랩을 보니 ‘매일 300개의 피칭이 오늘을 이루었다’ 등의 제목이 적힌 사진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1971년에는 강속구를 앞세운 경북고 남우식(南宇植)이 결승전에서 경남고를 1 대 0으로 꺾고 우승기를 안았다. 당시 경북고는 천보성 배대웅 정현발 등 초호화판 멤버를 자랑했다. 흔히 역대 고교야구 최고 스타를 들라면 선동열이나 최동원, 박찬호를 언급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아니다. 고교시절만 놓고 보면 단연 남우식이다. 전국 5개 대회를 모조리 우승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게임을 혼자 던졌다. 하지만 남우식은 한양대 진학 이후 고교 시절의 후유증으로 팔꿈치와 어깨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고 결국 실업야구단 롯데 자이언츠를 끝으로 1980년 12월 야구계를 떠났다.

‘막강투수’ 남우식 대기업 임원

스타는 무얼 해도 열심히 하는 모양이다. 그는 현재 ㈜롯데햄·우유의 이사로 근무하고 있다. 자신의 힘으로 대기업 임원이 됐다. 그는 “야구만 하다가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처음엔 너무 어려웠지만 낮에는 영업사원으로 그라운드가 아닌 마케팅에서 경쟁했고 밤에는 경영대학원을 다니며 자신과 싸웠다”면서 “운동을 하다가 직장생활을 하는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타자의 타이밍을 완전히 빼앗아 버리는 슬로커브가 일품이었던 중앙고 윤몽룡(尹夢龍) 투수는 1972년 제27회 결승전에서 2연패를 노리던 경북고를 4 대 1로 침몰시키며 대구 야구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당시 윤몽룡의 두뇌피칭에 정구왕 이선희 구영석으로 이어지는 경북고 타선은 내내 헛스윙만 해댔다.

 

하지만 윤몽룡은 건국대 입학 이후 탁월한 활약을 보이지 못했으며 한일은행에서 은퇴, OB 코치를 맡았으나 1984년 지병인 백혈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현대해상 회장인 정몽윤 전(前) 대한야구협회장은 중앙고 동기생인 윤몽룡에 매료되어 도시락을 싸서 야구장을 쫓아다녔으며 윤몽룡의 죽음을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구 야구의 명성은 멈추지 않았다. 특히 현재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불펜코치로 활약하고 있는 대구상고 포수 이만수(李萬洙)는 1977년 제32회 대회에서 투수인 박영진과 짝을 이루어 청룡기를 거머쥐었다. 이만수는 타격·최다안타·타점상과 함께 최우수선수상도 받아 4관왕에 올랐다.

1973년 제28회는 꺽다리 장타자 김용희(金用熙)가 4번을 치며 활약한 우승팀 경남고보다는 배재고의 ‘고무팔’ 투수 이광은(李光殷)이 더 화제를 모았다. 그는 6월 14일 광주상고와의 첫 경기를 시작으로 5경기에서 무려 59이닝을 던졌다. 연장전과 서스펜디드 게임이 겹쳐서다. 그는 223명의 타자를 맞아 공 697개를 던졌고 32안타를 맞아 7점만 내주었다. 팀이 결승전에 오르진 못했지만 청룡기 역사상 가장 값진 감투상을 받았다. 그의 호투에는 신언호라는 빼어난 포수의 리드가 있었다. 공수(攻守) 만능의 허슬 플레이어로 활약하다가 은퇴 후엔 LG트윈스 감독을 지냈던 이광은은 팀 성적부진을 이유로 도중하차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1976년 제31회는 단연 초고교급 투수인 경남고 최동원(崔東原)의 독무대였다. 최동원은 당시 4번의 완투승을 기록했고, 그 중 2번은 완봉승이었다. 특히 군산상고와의 승자결승전(당시에는 패자부활전이 있었다)에서는 탈삼진 20개를 기록하면서 청룡기 최다 탈삼진 기록을 세웠다. 군산상고는 6월 20일 열린 최종결승전에서도 최동원으로부터 단 2개의 안타밖에 뽑아내지 못하고 12개의 삼진을 헌납했다. 177㎝에 73㎏의 최동원은 금테안경 너머로 반짝이는 눈빛과 발을 높이 치켜들고 던지는 다이내믹한 투구 폼으로 팬을 몰고 다녔다. 시속 150㎞에 이르는 시원시원한 강속구에다 홈플레이트 앞에서 뚝 떨어지는 드롭성 변화구는 아직도 야구 팬의 추억에 남아있다. 프로야구에서도 이름을 날린 그는 현재 한화 투수코치로 최진실의 남편이었던 조성민의 야구 재활을 지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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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선수 중에서 가장 지적인 인물이라고 평가받는 양상문(楊相汶) 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은 부산고 2~3학년 때 포수이자 4번인 김호근과 배터리를 이루며 청룡기를 2년 연속 가져간 주역. 훗날 고려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양 감독은 당시에도 면도날 같은 강속구와 타자의 심리를 읽어내는 능력으로 차원이 다른 야구를 했다. 다만 고교시절 너무 혹사당한 탓인지 고려대에 진학한 이후 그다지 뛰어난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김병현·최희섭도 청룡기가 낳아

‘바람의 아들’이라는 광주일고 유격수 이종범(李鍾範)은 1988년 제43회의 스타였다. 군산상고와의 결승전. 연장 11회말. 2사 1·3루의 마지막 찬스에서 이종범은 군산상고 투수 김성곤의 5구를 그대로 당겨 좌익수 키를 넘기는 2루타로 승부를 결정지었다.

이밖에 군산상고의 ‘싸움닭’ 투수 조계현(趙啓顯·1982년 제37회 우수투수 및 최우수선수상), 경북고의 천재 유격수 유중일(柳仲逸·1982년 제37회 타격상), 서울고의 든든한 안방마님 포수 김동수(金東洙·1985년 제40회 최우수선수), 부산고의 ‘수퍼베이비’ 광속구 투수 박동희(朴東熙·1985년 제40회 감투상) 등도 1980년대 청룡기 스타 대열에서 빼놓을 수 없다.

현재 미국과 일본에서 활약하는 국내 스타는 대부분 청룡기에서도 이름을 드날렸다. 뉴욕 메츠에서 확고한 입지를 굳히고 있는 좌완 구대성(具臺晟)은 1987년 제42회의 최고 스타였다. 당시 대전고 2학년이던 구대성은 1회전에서 경기고를 맞아 구원투수로 등판, 승리를 따낸 것을 시작으로 다섯 경기에서 모두 승리투수가 됐다. 당연히 대회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송곳처럼 곳곳을 찌르는 예리한 강속구와 변화구가 그의 전매 특허였다. 하지만 구대성은 고3 때는 1회전 탈락의 비운을 맛봤다.

현재 일본 롯데 지바 마린스에서 뛰는 ‘국민타자’ 이승엽(李承燁)도 구대성처럼 2학년 때 청룡기 스타가 된 케이스. 당시 그는 타자보다는 왼손 투수로 더 이름을 날렸다. 1993년 제48회 대회 군산상고와의 결승전서 8과 3분의 1이닝 동안 4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면서 7 대 3 승리를 기록했다. 대회를 통틀어 20과 3분의 2이닝 동안 5실점(4자책)으로 방어율은 1.77. 지금은 홈런왕으로 대접받고 있지만 당시는 결승전 홈런이 유일했다. 이승엽도 구대성처럼 3학년 때는 초반 탈락의 비운

댓글목록

no_profile 김재영(高068) 개인프로필 프로필 차단하기게시글 차단하기 작성일
선배님 좋은글 감사합니다.

 가까운 시일내 직접뵙고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시간 한번 내 주십시요.

 참고로 소주는 한 2병 안주는 가리지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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