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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845회 작성일 2007-07-26 10:05
신동아 기사-한국 가톨릭 태두 정진석(41회)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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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 기사입력 2007-07-2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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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명동성당은 풍화된 벽돌을 갈아 끼우는 외벽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공사 현장을 덮은 가림막에는 성당의 전면과 측면이 실물대(實物大)로 그려져 있다. 공사는 내년 말에 끝난다. 명동성당 언덕바지 초입에서 오른쪽 옆으로 길을 잡으면 붉은 벽돌로 지은 서울대교구청 건물이 나온다. 정진석(鄭鎭奭·76) 추기경 집무실은 교구청 3층에 있다.

추기경 집무실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과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초상이 걸려 있다. 저술이 많고 책을 좋아하기 때문인지 책장이 한쪽 벽면을 가득 메웠다. 눈에 띄는 장식이 별로 없고 소박한 인상을 주었다.

정 추기경은 태어나면서부터 명동성당과 인연을 맺었다. 서울 중구 수표동에서 출생한 직후 명동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계성초등학교 4학년 때는 명동성당에서 견진성사를 받았다. 세례·견진·성체·고해·신품·혼인(婚姻)·병자(病者) 7개 성사(聖事) 중 5개를 명동성당에서 했다.

그는 명동성당 보좌신부이던 노기남 신부의 새벽미사 복사(服事·신부의 미사 집전을 보좌하는 소년)를 하루도 빠지지 않아 십자가를 상으로 받았다. 노 신부가 1942년 한국인 최초의 주교로 서품 받을 때 복사를 맡았던 소년은 명동성당이 주교좌인 서울대교구의 추기경 교구장이 됐다.

행사에 참석 중인 추기경을 기다리는 동안 마영주씨가 막간을 이용해 정 추기경에 관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들려주었다. 서울대교구의 홍보를 담당하는 마씨는 인터뷰 일정이 잡힌 뒤 필자의 자료 수집을 도와주었다. 추기경을 대중에게 바로 알리기 위해 정성을 다한다는 느낌이었다. 추기경 인터뷰에는 서울대교구 홍보실장인 허영엽 신부와 마씨가 배석했다.

인권은 생명의 시작이자 끝

▼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추기경이 되셨는데요. 추기경은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직분을 부여받은 사람입니까. 비(非)신자도 알아들을 수 있게 쉬운 말로 설명해주시죠.

“예수님께서 가톨릭교회를 세우시면서 로마의 주교가 당신의 대리자가 되도록 정하셨습니다. 로마의 주교가 바로 교황님이세요. 교황님이 전세계의 가톨릭교회를 이끌어 나가는데 가장 측근에서 협조하는 고문 노릇을 하는 사람이 추기경입니다. 교황님이 세상을 떠나는 경우 추기경들 중에서 후임자를 선출하지요.

대주교가 전세계에 한 600명 됩니다. 추기경은 그보다 수가 훨씬 적지요. 교황 선거권을 가진 사람은 만 80세가 되지 않은 추기경들이에요. 우리 교회 규정으로는 교황 선거권을 갖는 추기경 수는 상한선이 120명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연세가 높아 제가 추기경이 됐죠. 아시아에서 필리핀말고 추기경이 두 명 이상인 나라는 없어요. 교황님이 한국 교회에 대해 알 수 있는 길은 두 갈래가 있습니다. 교황청 대사와 추기경을 통해서, 세속적인 표현으로 한국 천주교의 정보를 들을 수 있는 거죠.”

▼ 본가와 외가 양쪽이 4대(代) 신자라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와 엄혹한 탄압을 받지 않았습니까. 순교자도 많이 나왔죠. 증조할아버지가 천주교에 귀의했을 때는 대원군 치하였습니까.

“조선왕조에서 일어난 마지막 천주교 박해 사건이 1866년 병인박해입니다. 1866년부터 76년까지 10년 동안 진행됐어요. 증조부는 병인박해가 끝난 직후에 입교했지요.”

병인박해는 1866년 대원군 치하에서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학살당한 것을 시작으로 몇 달 사이에 국내 신도 8000여 명이 순교한 사건을 말한다.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가 중국 톈진(天津)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려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 우리나라가 권위주의 독재체제의 지배를 받을 때는 명동성당이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공이 큽니다.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해 천주교 성직자들이 민주화를 위해 직접, 간접으로 나섰지요.

“천주교가 정치의 어떤 측면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것으로 (일반 국민이) 혹시라도 오해할까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인권은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고 사람이 조작할 수 없는 신성한 권리입니다. 인권은 생명의 시작이고 끝이죠. 그중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좁은 의미의 인권도 있고, 넓은 의미의 인권도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모든 권리, 그것은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하느님의 영역을 인간이 함부로 침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천주교가 발언을 하지요. 어떤 때는 정치적 견해와 병행할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습니다. 교회의 일관된 생각은 하느님에서 비롯된 신성한 인권을 존중하자는 것이죠. 과거에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인권이 훼손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발언한 거고, 근래에는 제가 배아(胚芽)의 인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천문학 오류는 인정하지만…

▼ ‘배아의 인권’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천주교는 배아도 인간 생명이라는 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 역사에서 종교와 과학이 갈등을 빚었을 때 종국적으로 과학이 승리한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소위 지동설(地動說)에 대한 종교재판도 그런 사례지요. 과학자들 중에는 줄기세포 연구에 가톨릭이 지나치게 보수적이어서 과학 발전에 장애가 되지 않겠느냐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갈릴레오 사건은 물리과학 분야지요. 우리 교회가 천문학 분야에서 오류를 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생명은 신비예요. 저는 생명은 인간이 조작할 수 없는 분야라고 봅니다. 물질 측면에서는 우리가 실험을 할 수가 있는데, 생명은 실험의 대상이 아니죠. 배아줄기세포는 사람이 인공적으로 조작할 분야가 아니라고 교회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지금 황 위원처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러나 우리 교회가 성체줄기세포 연구를 지원함으로써 줄기세포 연구 분야가 더 넓어졌어요. 배아에서 바로 줄기세포를 만드는 것은 어떻게 보면 쉽지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니까 다른 게 있을까 하고 찾다가 성체줄기세포로 눈길이 간 겁니다. 과학 발전에 장애가 된다는 표현엔 조금 어폐가 있습니다.

생명체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현상은 과학적으로 증명되는데, 생명 자체는 우리 감각으로는 모르는 거예요. 생명 현상은 인간의 인식능력을 초월한 겁니다. 우리가 생명을 엉뚱하게 조작했다가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죠.”

▼ 황우석 박사가 논문 조작으로 추락하기 전에 추기경께서 황 박사를 만난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대화를 나눴습니까.

“난치병 환자의 치료를 위해 우리 모두 노력하자는 데 대해서는 뜻이 같았지요. 줄기세포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까지도 공감했어요. 그런데 줄기세포를 어디서 추출하느냐 하는 문제에서 내가 ‘배아로부터 줄기세포를 얻는 것은 안 되고 성체줄기세포 연구는 가능하다’고 분명하게 얘기했습니다. 상당히 강한 수준의 얘기가 오갔지만 큰소리가 나진 않았어요. 배아줄기세포에 문제점이 없지 않다는 것을 황 박사가 인정했죠. 황 박사도 내 얘기에 동의하면서 성체줄기세포가 확실한 단계에 이르면 자기 연구는 스톱하겠다고 하더군요.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함으로써 성체줄기세포 연구가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정 추기경은 진홍색 수단(가톨릭 성직자의 평상복)과 주케토(가톨릭 성직자가 쓰는 빵모자) 차림이었다. 주케토는 탁발 수도사들이 정수리를 햇볕과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쓰던 것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성직자의 위계(位階)에 따라 수단과 주케토의 색깔이 다르다. 교황은 흰색, 추기경은 진홍색, 주교는 자주색, 사제는 검은색이다. 교황의 흰색은 하느님의 대리자임을 상징한다. 진홍색은 순교자의 피다. 피를 흘려서라도 교회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투신하라는 의미다. 검은색은 하느님과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세속의 자신을 죽였다는 뜻.

정 추기경이 주교 시절 찍은 사진을 보면 머리숱이 많아 앞머리가 자주색 주케토 밖으로 밀려나와 있다. 그러나 추기경도 세월을 붙잡을 수 없었던지 지금은 빨간 캡 밑에서 바로 이마가 드러난다.

하느님이 정한 ‘사람의 길’

▼ 선진국에서 저출산 문제가 아주 심각한데요. 우리나라는 그 첨단을 달리고 있습니다. 피임과 낙태 금지 교리를 실천하는 천주교 신자가 늘어나면 저출산 해소에 도움이 되리라고 보는데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생명은 하느님의 영역이기 때문에 인간이 조작하면 안 됩니다. 인간이 조작하면 악으로 기울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역사적으로 모든 과학적인 발명은 선의에서 출발했지요. 그런데 종국에는 전부 대량살상무기화 했어요. 화약도 그렇죠. 인간이 하늘을 날고 싶다는 원초적 욕망에서 발명된 비행기는 대량살상무기인 폭격기, 전투기가 됐죠. 유전자조작농산물(GMO)도 처음에는 병충해에 강한 농산물을 만들겠다고 시작했는데 현재는 돈벌이에 악용되고 있거든요. 인체 유해성에 개의치 않고 GMO를 개발하고 있어요. 배아줄기세포도 악용될 소지를 예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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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천주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동아일보 가톨릭 신우회의 도움을 받아 인터뷰 질문을 만들었다. 김일동 회장이 회원들한테 메일을 보내 정 추기경한테 묻고 싶은 질문 20개가량을 모아 필자에게 보냈다.

▼ 가톨릭 신자인 동아일보 여성 논설위원(정성희)에게 추기경을 만나면 어떤 질문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이런 질문을 해보라고 하더군요. 세상 사람들의 생활과 윤리관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 않습니까. 천주교가 아직도 여성 사제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시대에 뒤처진 것이라는 의견이었어요. 천주교가 동성애를 죄악으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이 질문에 정 추기경과 배석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추기경은 “여성 사제 문제는 동성애하고는 아주 다른 얘기인데…”라고 말해 필자는 여성 사제 문제부터 대답해달라고 요청했다.

“여성 사제 문제는 대답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고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정하신 일을 더 얘기하는 것은 부질없는 논쟁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선 제가 여기서 답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대답이 신통치 않아서 미안합니다(웃음).”

▼ 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초파리에게서도 동성애가 발견됩니다. 동성애는 후천적 선택이라기보다는 타고난다는 과학적 근거가 발견되고 있어요. 그렇다면 죄악으로 볼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우리는 죄악으로 봅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어긋납니다. 본성에 대해 조금 설명할게요. 우주 만물이 자연적으로 생긴 게 아닙니다. 하느님이 만드신 거죠. 이게 창조설이죠. 아주 쉬운 표현으로 달과 별들이 해와 충돌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것은 우주 만물에 운동법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법칙이죠. 하느님은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을 때 당신의 지성으로 질서 있게 만드셨습니다. 있어야 될 곳에 다 있는 거죠. 이 질서를 사람이 인식했는데 그것이 자연법이죠. 자연법의 한 부분을 우리는 본성이라고 합니다. 동물은 본능이고, 인간은 본성입니다. 같은 말이에요. 인간에게 양심은 습득에 의한 지식이 아니고, 본성적으로 아는 거예요. 인간 본성의 근원은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새겨주신 자연법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분이니까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죠.

자연법은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자연과학에 속하는 물리법칙, 인간에게 속하는 윤리법칙, 미학에 속하는 예술법칙이 있어요. 예술은 선과 악이 아니거든요. ‘보기 싫어’라고 말해도 악은 아니라고요. 그러나 물리법칙은 어기면 파멸이에요. 과학적인 기계를 만들 때 자연법칙을 어길 수가 없지요. 작동이 안 될 테니까요. 물리법칙에는 자유가 없어요. 기차는 궤도를 벗어나면 전복됩니다. 윤리법칙도 사람이 가는 길, 양심을 벗어나면 파멸이에요. 그런데 윤리법칙은 어길 자유가 있어요. 그런데 어길 자유를 엄격한 의미의 자유라고 말할 수 없지요. 어기면 파멸이니까.

그런데 이 윤리법칙에 대해 어길 자유가 있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게 바로 악이에요. 기차가 궤도를 벗어나면 파멸이듯 사람의 길도 벗어나면 파멸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길부터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시니까 중개자지요.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람에게 오신 길이고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으로 가는 길이에요. 이 길을 벗어나면 파멸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이 정한 사람의 본성에 맞느냐 안 맞느냐가 기준입니다. 생명은 바로 가장 민감하고 핵심적인 부분이에요. 내가 ‘타협하고 양보하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생명 문제만 나오면 아주 옹고집이 됩니다. 하느님의 영역이기에 양보할 수 없는 거지요.”

“조금 설명하겠다”고 시작한 답변이 긴 강론으로 이어졌다. 답변 속에서 동성애란 단어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추기경이 언급하기에 부적절한 죄악인 모양이다.

“敎勢, 세속세력과 무관치 않다”

▼ 한국 개신교가 한때 급성장해 세계가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지금도 비행기 타고 밤에 서울 상공을 지나다 보면 십자가 천지예요. 그런데 요즘에는 개신교 신도 숫자가 감소하고 있다고 해요. 이에 비해 통계청 발표로 보면 가톨릭은 지난 10년 동안 신도가 74% 증가했다고 합니다. 개신교는 신도 숫자가 주는 데 가톨릭은 늘어나니 추기경으로서는 기분 좋은 일이겠어요(웃음).

“조선 왕조가 미국과 수교한 것이 1882년이고, 프랑스와 수교한 것이 1886년입니다. 미국과 수교하면서 프로테스탄트 개신교 목사님들이 왔지요. 돈 많이 갖고 와 학교와 병원을 지었어요. 남자대학뿐 아니라 여자대학까지. 천주교는 그때 순교시대가 끝난 거죠. 미국 선교사들은 평안도에 주로 진출했어요. 평양이 개신교의 중심지로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별칭이 생겼습니다. 우리 개신교 사상 처음으로 목사님 7명이 바로 그 지역에서 서임을 받았어요. 해방되었을 때 평양시민의 30%가 개신교 신자였답니다. 김일성 외삼촌(강양욱)이 목사님이잖아요.

일본의 크리스천이 천주교, 개신교를 합해 1%도 안 돼요. 식민지시대에도 일본 사람들은 크리스천에 대해서 배타적인 정책을 썼습니다. 해방될 때까지 남쪽에서는 천주교나 개신교나 세력이 미미했습니다. 해방 때는 아마 개신교와 천주교 신도 수가 비슷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해방이 되자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했어요. 미국은 개신교 세력이 큰 나라니까 자연스럽게 개신교의 영향력이 커졌죠.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개신교 신자이고, 첫 번째 내각에도 개신교 신자가 많이 들어가 자유당 정권 내내 개신교 세력이 압도했어요. 그래서 1950년대, 60년대에 개신교가 확 늘어난 거예요. 교세(敎勢) 발전도 세속적인 세력과 무관하지 않으니까요. 천주교의 기대가 컸던 장면 정권이 단명하면서 천주교는 신장할 기회를 놓쳤죠. 그런데 천주교는 뒤늦게 1980, 90년대에 성장기가 찾아왔지요.

이제 밸런스가 잡혀간다고 할까요. 지금 개신교 신도수가 전 국민의 20~25%라고 하는데 만일 가톨릭이 25%가 되면 합해서 50%가 되잖아요. 불교 신자와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도 상당수 있지요. 신도수의 균형이 잘 잡혀야 나라가 편안합니다. 균형이 깨지면 사회적으로 불안한 나라가 됩니다. 우리나라는 다(多)종교 국가로서 여러 종교가 평화스럽게 공존하는 거의 유일한 나라래요. 큰 차이 없이 균형잡혀 있기 때문이죠. 천주교가 무한정 커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는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정면을 응시하며 책을 읽듯 또박또박 말했다. 인터뷰를 시작한 지 20분가량 지나서야 굳은 자세가 풀리고 간간이 제스처를 썼다.

가돌릭 신자 20% 시대 올 것

▼ 평신도들 중에는 개신교 교회에 가면 돈 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 부담스럽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상가에 세든 개신교 교회는 슈퍼마켓이나 복덕방과 붙어 있어 성스러운 분위기가 덜하다는 말도 나오지요. 상대적으로 천주교는 돈 이야기를 덜해 부담이 적다고 합니다. 천주교 신부들은 교구청에서 월급 주는, 공무원 비슷하니까 생존 압박을 덜 받고, 개신교 목사는 스스로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자영업이라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톨릭교회가 중세 때 역사적으로 떳떳하지 못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정권을 가진 사람과 교권을 가진 사람이 합당하지 않게 밀착하면 부패가 생기지요. 제가 이런 표현을 하면 조금 어폐가 있을 것도 같은데 어떤 교회가 적정 규모 이상으로 세력이 커질 때 세속 세력이 그것을 이용하려 든다거나, 교회에 속한 사람이 세속적인 물이 들 경우 언짢은 방향으로 흐르게 되지요. 적정선을 잘 지켜야 하는데 과욕을 부리면 문제가 생깁니다.

모든 종교는 근본적으로 항상 깨끗해야 합니다. 어떤 교파냐를 떠나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도덕성을 보여주는 모범이 돼야 합니다. 종교가 적정선을 넘어 세속적인 세력을 가질 때에는 자정(自淨) 능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황 위원께서 말한 개신교의 어떤 점은 가톨릭에도 언제든지 해당될 수 있는 말이죠.”

▼ 반 농담으로 여쭤보는 것인데요, 신부님들이 목사님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강론을 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목사님들은 자영업이라서 설교를 못하면 신도가 줄고 생계를 위협받는데 신부님들은 일종의 공무원처럼 교구청에서 봉급이 나오니까(웃음)…. 그러나 강론을 너무 못하면 포교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요.

“일리 있는 말씀이에요. 저도 농담 비슷하게 대답을 한다면, 지금 목사님 숫자가 많아요. 16만명이라고 합니다. 천주교 신부는 4000명 선이거든요. 황 위원 말씀대로 천주교 신부들은 가만히 있어도 생활 보장은 되는 거예요(웃음). 그런데 목사님은 1년에 3000명씩 새로 배출돼 경쟁이 아주 치열하지요. 문화관광부 통계를 봤는데 예배당이 6만3000개예요. 우리나라 인구를 4800만명으로 잡고, 개신교 신도수를 20%라고 하면 교회마다 평균 150명이죠. 대형 교회를 빼면 작은 교회의 평균 신자수가 얼마나 되겠어요. 제가 언뜻 듣기에 절반 이상의 교회가 50명 정도의 신자를 갖고 있대요. 목사님이 생활을 영위하려다 남의 눈에 옳게 안 보이는 모습이 나타날 때도 있다면 그것이 염려스럽죠.”

모든 종교가 말하는 신도수를 합하면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몇 배가 된다. 그만큼 종교별 정확한 신도수를 집계하기란 지난한 작업이다. 정 추기경은 가톨릭 인구가 10%를 약간 넘은 것 같다고 말했다.

▼ 추기경께서 2020년까지 가톨릭 신자를 20%로 만드는 2020운동을 펼친다고 들었는데요.

“개신교 신도가 인구의 20~25%라고 하니 우리 천주교도 그 정도는 돼야 한국 전체의 종교 간에 적정선이 유지된다는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겁니다.”

열악한 자연조건과 테러

▼ 중동지방에서 발원한 세 종교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인데요. 구약성경을 믿고 유일신 교리를 갖고 있어요. 그래서 이 세 종교가 근본적으로 다른 종교와 화합하기 어려운 펀더멘털리즘 요소를 갖고 있다고 보는 관점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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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caption.gif지난해 성탄절을 앞두고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을 찾은 정진석 추기경.

“저도 공감합니다. 세 종교 다 유일신교지요. 뿌리가 같아요. 코란에 따르면 이슬람 사람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아브라함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삭을 낳기 전에 이스마엘을 낳았는데, 이스마엘이 아랍인의 조상이라 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유일신을 믿는 거예요. 그러니까 펀더멘털리즘으로 갈 수밖에 없지요. 다른 종교를 인정할 수 없는 거죠. 창조론을 믿으면 유일신을 믿을 수밖에 없는 거죠. 어떻게 여러 신이 우주를 만들 수 있습니까. 절대신 하나가 우주를 만드는 거지요.”

▼ 새뮤얼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에서 각종 유혈분쟁 통계를 분석해 ‘이슬람의 국경선은 피에 젖어 있다’고 서술했어요. 중동 지방의 이슬람교 국가에서는 테러와 유혈분쟁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교리상의 문제라기보다는 낮은 교육수준, 빈곤과 실업의 영향이 아닐까요.

“인류가 풀어 나가야 할 난제지요. 중동지방의 자연조건이 너무 열악한 것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봐요. 기후조건이나 강우량이 사람 살기에 적합하지 않죠.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이죠. 자살폭탄 테러가 많은 이유는 직업이 없는 사람이 많아서 그렇다는 분석도 있어요. 산유국이라 외관상 GDP는 높은데 일거리가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행복을 느끼려면 적당하게 일하고 적당하게 쉬고 기후도 좋아야 하는데 중동은 여러 가지로 사람이 생존하기에 좋지 않은 조건이라는 설명을 듣고 아,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자연조건 탓만 하기도 어려운 게, 바로 옆에 있는 이스라엘은 경제 수준이 높지 않습니까.

“글쎄, 그건 제가 명쾌하게 설명을 드릴 수 없는 문제네요.”

절은 존경의 표현

▼ 제 집사람은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아 세례명이 ‘카타리나’인데 성당에는 잘 안 나가더라고요. 그런 사람을 보고 냉담신자라고 하지요.

배석한 허영엽 신부가 “요즘은 ‘냉담신자’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쉬고 있는 신자’라고 말한다”고 거들었다.

▼ 하여튼 집사람이 ‘쉬고 있는’ 신자인데요. 함께 등산 갔다가 절에 들르면 시주함에 돈을 넣고 부처님 앞에 절해요. 대개 자식들 좋은 대학 들어가게 해달라는 소원을 비는 것 같아요. 천주교 신자가 부처님 앞에서 절하는 것을 천주교 교리로 용인할 수 있습니까.

“그전에는 우리도 조금 옹졸해서 절대로 안 된다고 했습니다. 용인을 안 했죠. 근래에는 좀 융통성 있게 대처하지요.”

정진석 추기경은 불기(佛紀) 2551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 불교 신자들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자비와 예수님께서 새로운 계명으로 주신 사랑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 서로 사랑과 자비를 베풀기 위해 노력할 때, 서로 안에서 부처님과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보다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길에서 동반자요 동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사는 조상에 대한 공경

▼ 크리스천 중에는 제사를 지내는 사람도 있고, 안 지내는 사람도 있어요. 교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저는 돌아가신 부모님 영정 앞에 절하는 것은 조상에 대한 예절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을 미신이나 우상숭배라고 보는 것은 편협한 펀더멘털리즘이 아닐까요.

“이런 문제가 처음으로 부각된 것이 1600년대 중국에서였어요. 마테오 리치(1552~1610)는 굉장한 분이에요. 예수회 회원이던 그분이 중국어로 ‘천주실의(天主實義)’라는 책을 썼습니다. 잘된 책이에요. 그 책을 통해 중국, 조선, 일본이 천주교 사상을 처음으로 접하게 됐지요. 그 책은 제사를 용인했어요. 마테오 리치는 학자로서 중국의 지성인들과 교류했지요. 그때 중국 지성인들이 다 제사를 지냈습니다. 지성인들이라서 제사와 우상숭배를 구별할 줄 알았죠.

그런데 천주교 수도회에 분파가 있죠. 마테오 리치는 예수회 소속이죠. 예수회는 서강대학교를 세운 수도회죠. 지성인을 상대해요. 그런데 프란체스코회라는 수도회도 있어요. 우리나라에도 서울 정동에 있어요. 프란체스코회는 서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요. 그들이 마테오 리치보다 100년 후에 중국에 왔어요. 프란체스코회 사람들이 보기엔 중국 서민이 제사를 지내는 게 우상숭배와 구별이 안 된 거죠. 그래서 교황청에 예수회가 잘못한다고 보고한 거예요. 교황청에서는 제사가 뭔지 모르는 데다 안전하게 가야 되니까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했어요. 그 결정문을 받아본 프란체스코 회원들이 서민층 신자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한 거죠. 결국 제사 폐지 때문에 박해가 시작됐습니다. 마테오 리치 때는 전도가 잘 됐어요. 중국에서 1800년대에 박해가 시작됐고, 우리나라도 뒤를 따랐어요. 우리 천주교 역사에서 최초의 박해가 조상의 위패를 불태운 사건 때문에 일어났죠.”

신해박해는 1791년 정조 15년에 일어났다. 전라도 진산(珍山)에서 윤지충이라는 천주교 신도가 베이징 교구장 구베아(Gouvea) 주교의 제사 금지령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태워 땅에 묻었다. 친척과 이웃들이 윤지충을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불효자로 고발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됐다.

“저는 근본적으로는 마테오 리치가 제사 문제를 옳게 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교육받은 사람은 제사와 미신을 구별해요. 제사는 조상에 대한 공경이지, 거짓 신에 대한 미혹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천주교에서 용인하는 거예요. 미신은 점 보러 가는 거지요(웃음). 제사는 우상숭배나 미신이 아닙니다.”

▼ 그러면 장례식장에서 망자(亡者)에게 절을 해도 되는 겁니까.

“그렇죠. 망자를 신격화해서 절하는 게 아니고 그냥 존경하는 거죠.”

청년 정진석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우리나라를 두 번 방문했습니다. 1984년 여의도에서 열린 큰 집회가 천주교 교세 신장의 계기가 됐다고 봅니다. 현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 있습니까? 천주교 신자들이 궁금할 거 같아요.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한국에 대해서는 잘 아시는 편입니다. 그런데 연세가 있으시죠. 1984년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64세였어요. 1989년 69세 때 또 오셨죠. 그런데 지금 교황님은 80세예요. 여행하는 데 60대 교황님과 80대 교황님은 상당히 차이가 나잖아요. 한국에 오실 수 있는지에 대해 제가 대답할 수 없지요. 5월9~14일 남미에 다녀오셨는데 조금 무리하신 것같이 느껴져요.”

▼ 베네딕토 16세가 신학교 학생이던 14세 때 히틀러 유겐트(소년단)에 가입했습니다. 1943년에는 징집돼 뮌헨 근교 BMW 항공기 엔진 공장의 방공포대에서 근무했습니다. 나중에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국경지대에서 탱크 저지선 공사를 하다가 1944년 4월 탈영해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됐지요.

“1927년생이니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에 18세잖아요. 히틀러 시대에 독일 청소년의 유겐트 가입은 의무사항이었죠. 저도 일제시대 때 학교(중앙중학교) 교복이 군복 비슷했어요. 바지에 각반 매고 학교 다녔어요.”

정 추기경은 종아리를 내밀고 손으로 각반 차는 동작을 보여주었다.

“각반을 잘못 매면 풀어지거든요. 안 풀어지게 매는 요령이 있어요. 이거 매려면 몇 분 까먹죠. 아침에 바빠요. 군복 입고 군사훈련을 받고 독일이나 우리나 똑같았던 거죠. 나는 1931년생인데도 한국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거죠. 강제로 시키니까.”

6·25전쟁으로 학업(서울대 화공과)을 중단한 정 추기경은 1954년 23세 때 가톨릭대학 신학부에 입학했다. 필자가 “1954년 3월 이전에는 보통의 청년이었겠지요?”라고 묻자 그는 “그렇죠”라고 대답했다. “신부가 되기 전에 혹시 이성과 사랑을 해보신 적이 있는지요”라는 질문에 “아, 그게 6·25 때 죽을 고비를 몇 번씩 넘겼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여유 있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할 겨를이 없이 살았어요”라고 대답했다.

▼ 사랑이 사치스럽다는 말입니까.

“아니, 내가 19세 때 전쟁이 터졌지요. 22세 때 전쟁이 끝났어요. 3년 동안 내내 전쟁터로만 끌려다니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잖아요. 전쟁 끝나자마자 바로 신학교 간 거예요. 나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데 관심이 집중돼 있었지, 나머지 일에 대해서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거예요(웃음).”

越北한 공산주의자 아버지

▼ 결례되는 질문 같습니다만 간혹 장가가서 아들딸 낳고 평범한 신도 생활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냥 ‘아니다’라고 대답하긴 어렵겠죠. 전쟁 중에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어요. 그때부터 나는 덤으로 산다고 생각했어요. 벌써 이 세상에서 죽은 몸이고 나머지 인생은 많은 사람에게 뭔가 좋은 일을 하라고 하느님이 덤으로 주신 삶이죠. 국민방위군에 편입돼 남한강 위를 걸어가다 바로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강물에 빠져 죽는 것을 봤어요. 행군 중에 지뢰를 밟아 죽기도 했고…. 매일 오늘이 마지막 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지금까지 잊어본 적이 없어요.”

▼ 추기경이 되신 후에 아버지가 북한에서 공업성 차관을 지낸 정원모(鄭元謨)씨라는 이야기가 알려졌잖아요. 가톨릭 집안인데 아버님이 무신론에 빠져든 사연이 궁금합니다.

“어머님은 아버님에 대해 일절 말을 안 했어요. 해방됐을 때 제가 만 16세였거든요. 저는 그때 똑같이 벌어서 똑같이 나눠 먹자는 사상에 매력을 느꼈어요. 그 사상이 한 1년 갔지요. 그때 가르치던 사람이 고려대 학생이었어요. 이름도 얼굴도 기억 안 나요. 하여튼 고려대에 중앙고 선배가 많았으니까요. 선배 한 사람이 ‘같이 벌어서 같이 나눠 먹는 이상사회’에 대해 설파했죠. 그거 옳잖아요. 분배가 공정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단점은 안 가르쳐줬어요. 장점만 보면 그럴 듯하지요. 거기서 아버지를 이해한 거예요. 아버지도 그렇게 빠져들었겠죠. 해방 직후 혼란한 사회에서 귀국한 일본 유학생들이 거의 전부 좌익사상을 가졌어요. 아버지는 대학생이었죠. 그 시대의 지성인으로 그 사상에 물들었겠지요. 아버지가 북한의 공업성 차관인 것은 신문에 보도된 뒤에 알았죠. 그전에는 아무도 이야기 안 해주고 대학생이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죠.”

▼ 아버지가 일제하에서 장기 복역을 했나요.

“나는 몰랐는데 그랬던가봐요. 어머니가 나를 수태했을 때 잡혀갔나봐요. 기록을 보면 그래요. 사상범은 재판 안 하고 감옥에 가두어놓고 몇 년 질질 끌다가 재판해 몇 년 딱 때렸답니다. 내가 몇 살 된 다음에 풀려난 것 같은데 그 무렵에는 외가와 같이 살기가 어려웠던 것 같아요. 짐작이에요. 하여튼 나는 외가에서 자랐어요. 외가 식구 중에 아버지에 대해 아무도 말을 안 해줬어요.”

추기경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명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부친은 살림이 넉넉했던 장인 집에서 처가살이를 했다. 추기경의 외가는 서울 수표동에서 경대를 만드는 가구공장을 운영했다. 추기경은 평생 아버지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부친은 1931년 ‘조선공산당 재건 국내공작위원회 사건’의 핵심인물로 구속돼 3년 여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44년에는 ‘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으로 다시 구속돼 경기도경에서 수사를 받다가 광복을 맞아 석방됐다. 정 추기경은 신문에 난 아버지의 사진을 보고서야 자신의 얼굴이 아버지를 닮았음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내가 아주 미련해서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아버지 없이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했다. 필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태어난 것처럼요?”라고 묻자 추기경은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게 아니고…”라고 말해 모두 웃었다. 그는 “사람이 태어나려면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도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어요”라고 말했다.

“친구들이 ‘너도 아버지가 있을 거야’라고 했을 때 나는 ‘결혼한 부부 중에 아기를 원하는데 아기가 없는 부부도 있지 않으냐. 그러니까 여자가 혼자 낳는 거지’라고 우겼어요. 그 정도로 내가 순박했다고…. 그런데 중학교에서 생물을 배우지요. 생물책에 수정(受精)이라는 게 나오더라고요. 생물 공부를 하면서 나도 아버지가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죠.”

▼ 저서와 역서가 45권이나 되던데요. ‘모세’를 상중하(上中下) 3부작으로 쓰셨더군요. 상은 ‘민족해방의 영도자’, 중은 ‘율법의 제정자’, 하는 ‘민족공동체의 창설자’이더군요. 모세는 어떤 점에서 위대하고 어떤 점에서 실패했다고 보는지요.

“우리 교회 안에서 모세가 가장 위대한 리더입니다. 이분이 어떤 분일까, 나한테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궁금증에서 책을 쓰기 시작했죠. 책을 쓰면 유익한 점이 많아요. 그냥 막연하게 알고 있거나 부정확하게 대충 알고 있던 것을 책을 쓰려면 정확하게 알아야 되잖아요. 공부를 많이 하게 됐지요. 모세도 약점이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되고.”

평양 교구장 된 사연

▼ 모세에겐 어떤 약점이 있었습니까.

“모세가 샘물을 두 번 친 것은 화를 표출한 거지요. 그것 때문에 가나안땅에 못 들어갔죠. 지도자는 화를 내면 안 되는구나 하는 큰 교훈을 제게 주지요.”

▼ 가톨릭 신자가 됐든 비신자가 됐든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소개해주시죠.

“성경 이상의 책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어요, 그게 답이에요. 하여튼 성경은 읽으면 읽을수록 굉장한 교훈을 받아요.”

필자가 “이 질문을 할 때 틀림없이 성경이라는 대답이 나오리라고 예상했다”고 말하자 추기경은 웃으며 “그렇게 뻔한 대답이지만 나한테는 뻔한 대답이 아니다”라고 했다.

▼ 성경 빼놓고 평생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 책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해방 직후 나도 ‘종교는 아편’이라는 사상에 빠졌다가 1년 후에 탈출했는데, 신앙에 복귀하는 계기가 있었죠. 하나님을 부정하는 좌익사상이 무비판적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1947년 윤형중 신부님이 명동성당에서 2월23일부터 3월30일까지 7주 동안 7번 강의를 했어요. 그 강연이 나를 신앙인으로 회복시켜준 거예요. 그 강연 원고가 6·25전쟁에서 살아남아 전쟁 직후 ‘종교의 근본문제’라는 책으로 출간됐는데 1987년까지 14판이 나왔어요. 그 책이 나한테는 깊은 영향을 줬습니다. 탁월한 책이죠. 그것을 번안해 내가 신판으로 낸 게 ‘우주를 알면 하느님이 보인다’입니다.”

그는 가톨릭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에 ‘황호택 님께/정진석 추기경’이라는 글씨를 적어주었다.

▼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직하고 계신데, 가톨릭에서 지금 평양에 파견한 사제가 있습니까.

“파견한 사제는 없습니다. 해방됐을 때 북에 신자가 5만명 있었습니다. 남쪽 신자 10만명을 합해 가톨릭 식구가 15만명이었죠. 북에 성당이 58개 있었습니다. 신부님이 안 계신 곳을 공소라고 하는데, 공소가 한 200개 있었죠. 북에 소련군이 진주하고 1948년 공산정권이 수립된 후 1년 만에 성직자들이 모두 행방불명됐어요. 1949년 5월이에요. 천주교, 개신교 종교지도자들이 일시에 없어졌어요. 내 추측으로는, 전쟁 준비를 하면서 방해꾼들을 다 정리한 거죠. 그때 북에서 천주교 성직자 100여 명이 행방불명되면서 한 명도 안 남게 된 거죠. 지금까지 생사를 몰라요. 여러 번 그분들의 생사를 알려달라고 했는데 대답이 없어요.

평안남북도는 평양교구였고, 황해도는 서울교구예요. 함경남북도는 함흥교구였죠. 그리고 원산에는 수도회가 있었어요. 수도회는 교구에 속하지 않은 준교구예요. 이렇게 북에 교구가 3개 있었어요. 오늘날에도 천주교 신자가 1000명에서 3000명은 남아 있을 거라고 봅니다. 천주교는 교구라는 이름이 있으면 누군가가 교구장 직함을 가져야 돼요. 그래서 교황님께서 나보고 평양교구장을 겸해라 한 것이지만 이름뿐이지요.”

정 추기경은 평양은 물론 금강산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북한에는 장충성당과 봉수교회, 칠골교회가 있다.

▼ 저는 봉수교회에 가봤는데 북한에 자주 다니는 사람 얘기를 들으니까 장충성당에서 본 신자를 봉수교회와 칠골교회에서 보게 된다는 군요. 전시용 행사에 동원된 신자만 있다는 거죠.

“6·25전쟁 중에 성당, 예배당이 다 없어졌어요. 예배당은 한 3000개 됐대요. 천주교는 아까 말한 대로 250개쯤 없어졌어요. 그 사람들은 미 제국주의 군대가 없앤 거라고 둘러대요. 하여튼 전쟁 중에 다 없어졌어요. 장충성당은 1988년에 생겼어요. 그해에 우리가 올림픽을 하면서 세계의 기자들이 다 왔잖아요. 그러니까 북에서 자기들도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표시로 갑작스럽게 두 개의 교회당을 만들었는데 하나는 봉수교회고 하나는 장충성당입니다. 닮은꼴이에요. 한 사람이 설계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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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교도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사업을 하고 있습니까.

“5만명의 신자가 있었으니까 지하에서 혹시 그 자손들이 부모님한테서 세례를 받았을 수도 있지요. 조금이라도 있기는 있을 겁니다. 노출되면 위험하겠지요. 우리가 북에 인도적인 차원에서 지원해 숨어 있는 신자들이 혜택을 입으면 좋겠어요.”

오웅진 신부를 돕다

▼ 제가 평양에 갔을 때 중국에서도 공산당원은 교회를 못 다니던데 북한에서는 어떠냐고 공산당원 신분의 공직자에게 물었죠. 그 사람이 반말투로 ‘공산당원은 두 개의 종교를 가질 수 없어’라고 하더군요.

“솔직한 얘기군요.”

▼ 미국의 종교 통계 사이트인 애드히런츠닷컴(adherents.com)이 ‘북한의 주체사상이 신봉자 수에서 세계 10대 종교 안에 들어간다’고 최근 발표했습니다. 주체사상을 종교라고 본 것이 흥미로워요. 일종의 사이비 종교로 본 거겠죠.

“김일성 주석의 시신을 금수산기념궁전에 모셔놓고, 그 사람 생일을 태양절이라고 부르죠. 말할 때마다 종교냄새가 나는 용어를 많이 쓰잖아요. 그러니까 종교집단이라고 한 거겠죠.”

▼ 건강관리는 어떻게 합니까.

“청주교구장으로 있을 때는 일주일에 몇 번씩 우암산에 올라갔어요. 서울에 와서는 여기 테니스장에서 맨발로 한 시간씩 걸어요. 그게 유일한 운동입니다.”

그의 모친은 나눔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던 독실한 신자였다. 이웃의 가난한 아기들이 젖동냥을 오면 주저 없이 젖을 물렸다. 그러나 돌림병을 옮길까봐 외아들에게 줄 다른 쪽 젖은 물리지 않았다. 정 추기경은 어머니가 생전에 장기 기증을 약속해 돌아가셨을 때 안구 적출 수술을 하는 것을 직접 지켜보았다. 아들은 어머니를 음성 꽃동네 묘역에 모셨다.

▼ 청주교구장 시절에 오웅진 신부의 음성 꽃동네를 많이 도와주셨다고 하던데요. 나중에 오 신부가 수사에 휘말리고 재판을 받기도 했지요.

“오 신부님이 1976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처음 주임신부를 맡은 성당이 음성 무극 본당이죠. 주임신부가 되자마자 읍내 다리 밑에 있던 거지들을 돌보기 시작했어요. 그 사람들을 위해 조그만 집을 지어 18명을 수용했어요. 그러다가 땅을 마련해 갖고 옮겨간 것이 오늘날의 꽃동네예요. 처음 시작할 때는 음성군수가 왜 전국의 거지를 음성에 모으냐고 싫어했지요. 그럴 때에 나는 뒤에서 보호해준 거죠. 나와 관계가 좋았던 김종호 도지사가 적극적으로 오 신부를 도와주니까 음성군수도 싫은 내색을 안 하게 됐죠. 음성 꽃동네가 커지면서 정부의 돈을 많이 받게 됐죠. 그게 불씨가 돼 문제가 생긴 거예요. 관(官)의 돈을 받았는데 제대로 썼느냐는 검증이 시작된 거죠. 몇 년 동안 수사와 재판을 하고서 무죄로 결론났어요.”

▼ 오 신부가 좋은 일을 많이 한 건데요.

“그렇죠. 꽃동네 시설이 놀라울 정도로 어마어마합니다. 오웅진 신부가 한 푼이라도 떼어먹었으면 그런 시설이 만들어질 수가 없지요. 한 신부가 30년 동안 큰 건물을 10개 이상 지은 거예요. 가평과 음성을 합해 3000명의 노숙자를 수용해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어떤 사람이 너무 커지니까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생긴 거죠. 내가 보기에 오웅진 신부는 사심이 없는 사람이고 받은 돈 다 쏟아 넣었습니다.”

▼ 천주교에서도 대학과 중·고등학교를 다수 운영하고 있는데요. 사학 쪽에서는 자율이 중요하다고 하고, 전교조와 집권 세력 쪽에서는 개방형 이사를 통해 사학 경영을 투명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근본적으로 공립학교 외에 사학이 존재하는 이유를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립학교는 공립학교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있습니다. 공립학교는 교육 당국의 통제하에 당연히 들어가지요. 그런데 왜 사립학교까지 공립화하려는 겁니까. 그게 내 근본적인 문제의식이에요.”

고해성사…기억의 의지 없어야

▼ 가톨릭의 역사상 오류, 예를 들면 십자군전쟁, 마녀재판, 지동설 부정, 면죄부 판매에 대해 로마 교황청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 적이 있는데요. 그렇다면 현재 가톨릭의 어떤 교리도 좀더 과학이 진보한 미래에 비과학적이었다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는지요.

“십자군전쟁은 교회의 이름을 차용한 정치활동이죠. 갈릴레오 재판은 성경을 잘못 해석한 사람들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면죄부 문제는 어떤 사람의 남용에 의해 그렇게 된 거예요. 우리가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잖아요. 고해성사는 자기 지역에서만 봐야 돼요. 그런데 헌금을 한 사람에게는 ‘너는 어디 가서든지 고해성사를 볼 수 있다’는 증명서를 줬어요. 그 자체가 죄를 용서해주는 증명이 아니고 어디 가서든지 고해성사를 볼 수 있다는 증명서였지요. 이게 잘못 해석돼 돈과 죄의 용서가 결부된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거죠. 1870년에 교황국이 없어진 이후 우리 천주교회는 더 이상 정치세력이 아닙니다. 정치세력과 결별해 정치 때문에 잘못되는 일은 없어졌지요. 중세 때는 교황국 때문에 비난을 받았거든요.”

▼ 신부로 일할 때는 고해성사를 많이 받으셨겠죠. 가리개가 있어 서로 얼굴을 못 보지만 목소리를 들으면 누군지는 대개 알 수 있을 텐데요. 신도들이 지은 죄를 일일이 듣고 있으면 나중에 생각이 복잡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참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데, 거기서 나오면 다 잊어버려요. 기억하면 미칠 거예요. 온갖 지저분한 얘기를 다 하는데 잊어버리지 않으면 미치지요. 이게 하나님의 은총이에요. 나오면 잊어버려요.”

필자가 “기억을 녹음기처럼 자유자재로 지우실 수 있군요”라고 말하자 그는 “아니, 기억하려는 의지가 없으니까 들으면 그냥 끝나는 거지요”라고 말했다.

“기억하려는 의지가 있을 때 기억이 되지, 기억하려는 의지가 없을 때는 기억이 안 되는 거죠. 사람이 무슨 얘기를 많이 듣지만 저 말은 내가 언제 써먹어야지 할 때는 딱 기억 속으로 들어가요. 그런 마음이 없으면 무슨 얘기했지 하고 생각이 안 나는 거죠. 고해성사 내용을 다 기억하면 삶이 괴롭겠지요.”

인터뷰가 2시간을 넘기자 다소 피곤해 하는 기색이 보였다. 옆에서 허 신부가 약속한 시간을 넘겼다고 신호를 보낸 지 오래됐다.

정 추기경은 호박이 박힌 금반지를 끼고 있었다. 필자가 사연이 있는 반지냐고 묻자 “아니 내가 그냥 편해서…”라고만 대답했다. 필자가 “장시간 인터뷰를 해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자 추기경은 “이렇게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도 답변하기 힘들었지만 질문하시기가 더 힘드셨지”라고 말했다.



황호택 동아일보 수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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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caption.gif정진석 추기경이 필자에게 줄 책에 사인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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