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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761회 작성일 2007-01-11 00:00
▼‘물고문’ 세상에 알린 당시 검안의 <font color=blue>오연상(66회) </font>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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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씨 20주기-우리는 잊지 못한다]“민주화는 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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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문’ 세상에 알린 당시 검안의 오연상 교수▼

대공분실 바닥에 물 흥건해 정황 파악
“복부서 물소리” 기자들에게 고문 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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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씨가 숨진 이후 민주화가 물밀 듯 밀려오는 것을 보고 역사는 세상 주관자의 시나리오라 생각했습니다.”

서울 동작구 흑석동 중앙대병원 내분비과 오연상(50) 교수는 9일 기자와 만나 “박종철 사건으로 ‘신’을 생각하게 됐다”며 20년 전인 1987년 1월 14일 앰뷸런스를 타고 남영동 대공분실로 들어가던 때를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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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월 24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교문 앞에서 대학생들이 박종철 군 고문치사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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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교수는 대공분실로부터 “응급환자가 있다”는 전화를 받고 달려가 509호실에 쓰러져 있는 박 씨를 최초로 검안했던 의사.

사건 발생 사흘 만에 그는 기자들에게 “내가 대공분실에 도착했을 때 박 씨는 이미 숨진 상태였으며 쇼크사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해 “신문 중 책상을 ‘탁’ 하고 치니 박 씨가 ‘억’ 하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졌다”는 경찰 발표를 뒤집었다.

오 교수는 20년 전 박종철 사건을 “우연이 연속해서 일어난 필연”으로 기억한다.

첫 번째 우연은 박 씨의 사망 시점. 경찰은 고문 후 쓰러진 박 씨를 살리기 위해 중앙대 용산병원에 전화를 걸었지만 오 교수가 도착했을 때 박 씨는 이미 숨져 있었다. 오 교수는 숨진 박 씨를 붙들고 1시간이나 심폐소생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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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씨가 물고문으로 숨졌다는 사실을 언론에 최초로 증언한 중앙대병원 오연상 교수는 10일 “민주화에 작은 도움이 됐다는 게 지금도 가슴에 남은 보람”이라고 말했다. 김재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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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만약 경찰이 박 씨가 고문 도중 이미 숨진 것을 확인했다면 외부 의사를 부를 필요도 없이 알아서 시체를 처리했을 것”이라며 “내가 시체가 있던 현장을 봤기 때문에 그 후 진실을 얘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화장실에서 기자를 만난 것도 기막힌 우연이다. 박 씨를 검안한 다음 날인 15일 아침부터 형사 3명이 조를 이뤄 오 교수의 진료실 앞을 지키며 기자는 물론 외부인과의 접촉을 막았다.

그러나 그는 소변을 보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기자를 만나 박 씨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내가 그때 그 화장실에 간다는 것을 누가 알려 주기라도 한 듯 기자가 화장실에 있었습니다. 경찰 감시 때문에 1, 2분밖에 얘기하지 못했지만 그것으로 작게나마 박 씨가 숨진 사실이 15일에 처음 보도될 수 있었습니다.”

가장 필연 같은 우연은 사회운동에 이렇다 할 관심이 없던 31세의 의사였던 그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 진땀을 흘리며 ‘진실’을 얘기한 것이다.

대공분실 509호실로 뛰어 들어간 오 교수는 조사실 바닥의 물 때문에 입고 간 가운이 다 젖어 버린 것을 깨달은 순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직감했다. 부검을 하지 않은 검안의로서 확실한 증거를 확보할 수는 없었지만 정황이 ‘물고문’ 사실을 보여준 것.

오 교수는 첫 보도 후 병원을 찾아온 여러 기자에게 “청진기를 대 보니 복부에서 꼬르륵 물소리가 났고 폐에서는 출렁거리는 수포음이 났다”며 의도적으로 ‘물고문’을 연상시킬 수 있는 단어들을 강조했다.

“사실 수포음이란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경우 폐에 피나 체액이 스며들어 ‘폐부종’이 발생해 나는 것이며 ‘물고문’과는 직접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경찰 감시로 내놓고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라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 후 기자들은 ‘물고문’ 사실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고 경찰은 박 씨가 물고문으로 사망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오 교수는 “그때 비겁하게 얼버무렸다면 평생 괴로웠을 것”이라며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 것이 민주화에 작은 도움이 됐다는 게 20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에 남은 보람”이라고 말했다.

최우열 기자 dnsp@donga.com

▼박종철 씨가 목숨 던져 지킨 대학선배 박종운 씨▼

“시장경제-北 민주화 이루는 게 종철이의 정신 올바로 잇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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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종철 씨가 경찰의 고문에도 끝내 행방을 밝히지 않았던 동아리 선배 박종운 씨는 “시장경제를 지키고 북한의 민주화를 이루는 것이 종철이의 정신을 올바르게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진 제공 박종운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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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철이가 목숨을 던져 살린 네가 어떻게 보수 세력인 한나라당에 입당할 수 있느냐’는 주위의 거센 비판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시장경제를 지키고 북한의 민주화를 이루는 것이 종철이의 정신을 올바르게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20년 전 경찰이 물고문으로 박종철 씨의 생명을 빼앗으면서까지 행방을 알고자 했던 박종운(47) 씨. 경기 수원시 경기 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 9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박 씨를 만났다.

그는 2000년, 2004년 총선에서 두 차례 떨어진 뒤 현재 한나라당 부천 오정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과 경기도경제단체연합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끄집어내기 싫은 기억을 묻는 괴로운 인터뷰일 수 있는데 뜻밖에 그는 막힘이 없었다. 시종일관 담담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인터뷰에 응했다.

박 씨는 당시에 숨어 있던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의 한 독서실에서 1987년 1월 16일자 본보 보도를 보고 후배의 죽음을 알게 됐다.

숨진 박종철 씨와 같은 대학 동아리인 대학문화연구회 3년 선배(사회학과 81학번)인 그는 1985년 10월 일어난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사건으로 수배된 상태였다.

박 씨는 “당시 수배 상태에서 독서실을 전전하고 있었는데 잡힌 선후배들이 다들 배후로 나를 지목하면서 신출귀몰하다는 인상을 경찰에게 줬다”며 “경찰이 나만 잡으면 학생운동을 잠재울 수 있겠다고 생각해 무리수를 두다 종철이가 희생됐다”고 말했다.

1987년 1월 8일 박 씨는 제헌의회그룹(CA) 사건으로 와해된 조직을 복구하고자 박종철 씨 집을 찾아 그에게 연락책 역할을 부탁했고 6일 후 경찰들이 박종철 씨 집에 들이닥쳤다.

두 대학생의 운명은 이처럼 ‘작은 선택’에 의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엇갈렸다. 그는 “집 밖에 나와 바로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는데 만약 걸어 나왔다면 주위에서 망을 보던 경찰에게 내가 잡히고 종철이는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에 끌려간 박종철 씨는 정말로 박 씨의 거처를 알지 못했다. 박 씨는 “당시 내가 찾아 달라고 한 사람의 이름이라도 댔다면 그 순간을 모면할 수 있었는데 종철이는 그러지 않았다”며 안타까워했다.

박 씨는 이후 박종철 씨의 죽음으로 촉발된 6월 민주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수배가 해제된 1988년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기관지 ‘노동운동’ 편집위원을 지내는 등 활발한 사회 참여를 했다.

하지만 이후 베를린장벽 붕괴와 소련 붕괴로 인해 인식의 대전환을 겪었다. 그는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리면서 소비자의 욕구에 부응하는 시장경제가 가장 민주주의적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박 씨는 결혼을 하고 군대에 다녀온 후 학원 강사를 하다 민주당에 참여해 민주개혁정치모임 청년위원회 운영위원, 서울시 강동구청장 비서실장, 자치경영연구원 연구위원, 세종리더십센터 연구위원을 거쳤으며 2000년 고진화 의원 등과 함께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박 씨는 “나를 변절자라며 매도하지만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반시장적 반민주적 처사들을 극복하는 것과 북한의 민주화를 이루는 것이 종철이의 정신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주위 사람들이 변절자라고 욕할 때나 선거에서 낙선하는 등 인간적으로 힘들 때마다 종철이를 생각한다”며 “민주화를 이뤘으니 편하게 살 수도 있지만 치열하게 생각하고 공부하고 글도 열심히 쓰게 만드는 힘은 종철이에 대한 의무감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종철이가 ‘형, 너무 추워 보여요’라면서 누나가 짜준 털목도리를 내 목에 둘러 주고 지갑에 달랑 남아 있던 1만 원을 내 손에 쥐여 주던 그때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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