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은 안중근의사 의거일이자 박정희대통령 서거일 >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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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中)
댓글 0건 조회 618회 작성일 2006-10-25 00:00
10.26은 안중근의사 의거일이자 박정희대통령 서거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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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10월26일 서거당일 박정희대통령의 생애 마지막 공식행사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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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시기주관조사 내용 및 결과
98. 7. 15조선일보, 한국갤럽 공동조사 정부수립 50주년 기념
「대한민국 50년의 50대 인물」조사에서
〈정치분야〉
· 1위 : 박정희 (66.9%)
· 2위 : 김 구 (26.3%)

※ 교수 50인이 뽑은「50대 인물」조사에서는
· 1위 : 김 구
· 2위 : 박정희
· 3위 : 정주영
98. 8. 16미국 시사주간지「타임지」조사「20C 아시아 인물 20걸」조사에서
·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박정희” 선정됨
※ 한국 1명 (박정희)
일본 6명, 중국 3명, 인도 3명 등
99. 10. 21 KBS 길중섭의 쟁점토론(ARS) 「박대통령 재평가」여론조사에서
  · 박정희 지지율 79.9%
99. 10. 25 ~11. 4 MBC 「박 전대통령 기념관 건립」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6,040명중)
· 찬 성 : 3,482명 (57.6%)
· 반 대 : 2,317명 (38.4%)
· 잘 모르겠다 : 241명 (4.0%)
99. 11. 30뉴스피플, 한길리서치 공동조사「20세기 한국을 움직인 사람들」조사에서 (전문가 500인 대상)
※ 20세기 한국사회에 영향을 미친 인물 100명 선정
〈정치·사회분야〉
· 1위 : 박정희 (95.0%)
99. 12. 7월간중앙(12월호)「한국 최고 인물 10선」조사에서
· 1위 : 박정희 (50.3%)
· 2위 : 김 구 (16.8%)
99. 12월간조선(12월호)「금세기 대한민국 최고 인물은 누구일까」조사에서
· 1위 : 박정희 (52.1%)
· 2위 : 김 구 (16.6%)
· 3위 : 김대중 (10.7%)
99. 12. 3한겨레신문 20세기 20대 뉴스「한국의 인물」조사에서
· 1위 : 박정희
· 2위 : 김 구
· 3위 : 이승만
2001. 7월월간 신동아국민제안센터 보트코리아 공동조사

※ 7. 19 동아일보 보도
대통령 역할을 가장 잘한 대통령은? 전국 E.mail 조사 결과
(교수 13,314명 설문조사 )
· 1위 : 박정희 대통령(58.4%)
· 2위 : 김대중 〃(22.9%)
· 3위 : 김영삼 〃(7.2%)
· 4위 : 이승만 〃(3.5%)
· 5위 : 전두환 〃(3.3%)
2001.12.26국정홍보처

※ 2001. 12. 27 SBS 8시 뉴스
    2001. 12. 28 중앙일보, 연합뉴스 보도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 (성인 4,500명 대상 조사)
· 1위 : 박정희 (21,1%)
· 2위 : 세종대왕 (19,8%)
· 3위 : 이순신 (12,7%)
· 4위 : 김 구 (10,5%)
2002. 1. 23 ~ 2. 14월간조선(3월호) 「한국 역사상 최고의 인물」 인터넷 여론조사에서 (총 15,295명 대상)
· 1위 : 박정희 4,285명(28%)  
· 2위 : 광개토대왕 2,257명(14%)  
· 3위 : 세종대왕 1,93명 (11%)  
· 4위 : 이순신 1,303명 (8%)  
· 5위 : 김대중 807명 (5%)
2002. 2. 6월간중앙, “폴앤폴” 공동조사「역대 대통령 국정운영 능력 평가」 조사에서  
· 종합 평점 최고 : 박정희
※ 거의 모든 항목에서 압도적 최고평가

1. 국민을 위한 정치평가
· 1위 : 박정희 (56.0%)
· 2위 : 김대중 (20.0%)

2. 국정 운영능력 평가

· 1위 : 박정희 (55.4%)
· 2위 : 김대중 (15.7%)

3. 국민에게 희망을 준 대통령
· 1위 : 박정희 (60.6%)
· 2위 : 김대중 (18.4%)

4. 경제정책 평가
· 1위 : 박정희 (62.0%)
· 2위 : 김대중 (15.6%)

5. 역사발전에 대한 긍정적 기여  
· 1위 : 박정희 (52.3%)  
· 2위 : 김대중 (20.2%)

6. 가장 책임감 있는 대통령  
· 1위 : 박정희 (54.7%)  
· 2위 : 김대중 (18.9%)

7. 과감한 의사결정
· 1위 : 박정희 (54.5%)  
· 2위 : 김대중 (14.5%)

8. 인재기용 평가
 
· 1위 : 박정희 (30.1%)  
· 2위 : 김대중 (17.4%)

9. 남북관계 개선 평가  
· 1위 : 김대중 (64.4%)
· 2위 : 김영삼 (8.2%)
· 3위 : 박정희 (6.5%)

10. 국민의견을 존중한 대통령  
· 1위 : 김대중 (37.2%)  
· 2위 : 박정희 (11.9%)

11. 민주주의에 기여한 대통령  
· 1위 : 김대중 (36.5%)
· 2위 : 박정희 (13.5%)
2002. 2. 18월간중앙과 폴앤폴 공동조사

※ 2/18 연합뉴스 보도
1. 전현직 대통령이 올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경우 당선자
· 1위 : 박정희 (46.4%)

·
2위 : 김대중 (16.7%)
· 3위 : 전두환(9.6%)

2. 차 한잔 마시며 대화하고 싶은 친근감 있는 대통령

· 1위 : 박정희(37%)
· 2위 : 김대중(26.9%)
·
3위 : 전두환(7.9%)

3. 대통령 정책평가

· 박정희
  : 위민(爲民)정치, 국정운영 능력, 경제정책, 과감한 의사결정 분야에서 각각 1위
· 김대중

  : 남북관계 개선, 국민의견 존중, 민주주의 기여도에서 각각 1위
2002. 6. 27 ~ 7. 9한국갤럽

※ 2003. 8. 14 연합뉴스 보도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인물」여론 조사
(전국 만 20세 이상 성인남녀 1,500명 대상)

· 1위 : 박정희(20.1%)

· 2위 : 세종대왕(16.0%)
· 3위 : 이순신(15.3%)
·
4위 : 김 구(7.9%)
· 5위 : 유관순(2.5%)
2002. 8. 26 ~ 27 한국 대통령 평가위원회
(위원장 : 박동서)

※ 조선일보 보도
역대대통령 평가조사 결과
(해당분야 전문학자 320명)

1. 업무수행능력
· 1위 : 박정희(63.56%)
· 2위 : 김대중(58.64%)
· 3위 : 김영삼(50.96%)
· 4위 : 이승만(49.40%)
· 5위 : 전두환(49.30%)

2. 업적수행분야
· 1위 : 박정희(66.58%)
· 2위 : 김대중(65.08%)
· 3위 : 전두환(56.72%)
· 4위 : 김영삼(55.16%)
· 5위 : 노태우(52.84%)

3. 자질분야
· 1위 : 박정희(62.7%)
· 2위 : 김대중(58.45%)
· 3위 : 이승만(56.95%)
· 4위 : 김영삼(56.04%)
· 5위 : 전두환(51.90%)
2002. 10월서울대 교내신문 “대학신문”

※ 10. 14 연합뉴스 보도
역대 최고의 대통령은 누구인가?
(재학생 1,687명 대상 조사)

· 1위 : 박정희(46.0%)
· 2위 : 김대중
· 3위 : 이승만
2003. 2. 15코리아 리서치

※ 2. 16 연합뉴스 보도
현정부를 포함하여 어느 정부가 잘 했느냐 ? 조사에서
(전국 성인 남녀 1,037명 대상 조사)

· 1위 : 박정희 정부(51.1%)
· 2위 : 김대중 〃 (21.5%)
· 3위 : 전두환; 〃 (9.5%)
· 4위 : 김영삼 〃 (2.0%)
· 5위 : 노태우 〃 (0.5%)
2003. 7월 월간 현대경영 조사
(8월호 게재)

※ 2003. 7. 29 연합 뉴스 보도
국내 100대 기업 비서들이 본 CEO 인물 및 조건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 61개 사 82명 참가)

1. 국가CEO 중 가장 존경하고 모시고 싶은 인물

· 1위 : 박정희 대통령 (68 %)
· 2위 : 김대중 〃 (18 %)
· 3위 : 노무현 〃 (10 %)

2 . CEO 중 가장 존경하고 모시고 싶은 인물
· 1위 : 이건희 (삼성회장)
※ CEO의 최대 조건 : 선견지명과 결단력
2003. 9. 22 ~ 11. 14 월간조선 5천년 한국을 빛낸 위대한 인물 (총 3,937명 참가)

· 박 정 희 : 1,943명 (49.4%)
· 세종대왕 : 393명 (10.0%)
· 광개토대왕 : 290명 (7.4%)
· 이 순 신 : 229명 (5.8%)
· 단 군 : 129명 (3.3%)
2003. 11. 3 ~ 8 동아일보, 아이클릭 공동조사

※ 03. 11. 13 동아일보 보도
가장 마음에 드는 대통령?
(6대도시 30, 40대 남성 500명 대상 조사)

· 1위 : 박정희 (51.4 %)
· 2위 : 없 음 (20.6 %)
· 3위 : 노무현 (15.6 %)
· 4위 : 김대중 ( 6.4 %)
· 5위 : 전두환 ( 4.2 %)
2004. 01. 07 ~ 25 영화채널 ‘캐치온’과 영화전문 사이트 ‘엔키노’ 조사

※ 04. 02. 04 연합뉴스 보도
역대 대통령 중 누가 정치를 잘 했으냐?
(네티즌 5,883명)

· 1위 : 박정희 대통령(56.7%)
· 2위 : 김대중 대통령(29.0%)
· 3위 : 이승만 대통령(3.8%)
· 4위 : 윤보선, 전두환 대통령(3.3%)
· 5위 : 최규하 대통령(1.8%)
· 6위 : 김영삼 대통령(1.3%)
· 7위 : 노태우 대통령(0.8%)
2004. 2. 24 am7과 (주)아이클릭

※ 04. 2. 26 am7 보도
현재 대통령을 포함하여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대통령
(전국 만 20세 이상 성인남녀 1,000명)

· 1위 : 박정희(41.7%)
· 2위 : 없음(28.9%)
· 3위 : 노무현(12.3%)
· 4위 : 김대중(11.1%)
· 5위 : 전두환(2.7%)
· 6위 : 이승만(1.2%)
· 7위 : 김영삼(0.9%)
2004. 3. 22 조선일보 산업부

※ 04. 3. 23 조선일보 보도
역대 정부 중 가장 기업하기 좋았던 시절은?
(조사 대상 : 이구택 포스코 회장,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본준 LG필립스LCD 부회장, 변대규 휴맥스 사장 등 국내 제조업, 금융업, 벤처업계의 대표적인 CEO 55명)

· 1위 : 박정희 대통령 시절(52.7%)
2004. 5. 8MBC-TV 「생방송 대한민국은 통화 중」 가장 효자였을 것 같은 역대 대통령은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설문조사 (참여 인원 35,220명)

· 1위 : 박정희 12,276명(34.8%)
· 2위 : 김대중 9,425명(26.8%)
· 3위 : 김영삼 4,566명(13%)
· 4위 : 이승만 3,561명(10.1%)
· 5위 : 노태우 2,860명(8.1%)
· 6위 : 전두환 2,532명(7.2%)
2004. 5. 16한겨레신문
※ 2004. 5. 16 한겨레신문 홈페이지 보도
가장 좋아하는 국가지도자는?

· 1위 : 박정희 (50.0%)
· 2위 : 김구(12.3%)
· 3위 : 노무현(11.6%)
· 4위 : 김대중(8.6%)
· 5위 : 권영길(1.3%)
2004. 5. 21 ~5. 24MBC-TV
※ 2004. 5. 25 MBC-TV 홈페이지, 문화일보(5. 29) 등
이 시대 각 분야별 영웅은?
(응답자 : 네티즌 1,825명)

정치 분야

· 1위 : 박정희 888명(49%)
· 2위 : 노무현 443명(24%)
· 3위 : 김대중 388명(21%)
2004. 5. 13 ~5. 29 한국갤럽
※ 2004. 6. 17 조선일보 보도
우리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역대 대통령은?
(15세 이상 1,728명 참여)

· 1위 : 박정희 前 대통령(47.9%)
· 2위 : 김대중 前 대통령(14.3%)
· 3위 : 노무현 대통령(6.7%)
· 4위 : 전두환 前 대통령(1.7%)
· 5위 : 이승만 前 대통령(1.0%)
· 6위 : 김영산 前 대통령(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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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음악 : John Barry의 The John Dunbar Theme]



    ▼ 육사 교장의 편지 전문

0205_kim.gif우리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질 개혁과 신진의 주체, 젊은이 들이여!
여러분들은 5,60대가 겪은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대들은 조국을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땀과 눈물을 흘렸는가?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는 풍요로움뒤에는
지난날 5,60대들의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5.16혁명 직후 미국은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을 인정한다면
아시아,또는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은 상황이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 때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태평양을
건너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에 돌아와 빈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서러워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었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와 같이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치한 서독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방해를 무릅쓰고1억 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 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서독 항공기가 그들을 태우기 위해 온김포공항에는
간호사와 광부들의 가족, 친척들이 흘리는 눈물로바다가 되어 있었다.
낯선 땅 서독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시골병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여자 간호사들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병들어 죽은사람의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닦았다. 하루종일 닦고 또 닦았다.
남자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그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 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 캐는 광부 일을 했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여자 간호사와 남자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해서 부쳐진 별명이 '코리안 엔젤'이라고 불리었다.
몇 년 뒤 서독 뤼브케 대통령의 초대로 박 대통령이 방문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에게 대통령 전용기는 상상할 수도 없어
미국의 노스웨스트항공사와 전세기 계약을 체결했지만
쿠데타군에게 비행기를 빌려 줄 수없다는 미국 정부의 압력 때문에
그 계약은 일방적으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서독정부는 친절하게도 국빈용 항공기를 우리나라에 보내주었다.
어렵게 서독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을
거리에 시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코리안 간호사 만세!코리안 광부 만세!코리안 엔젤 만세!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박 대통령은 창 밖을 보며 감격에 겨워
땡큐! 땡큐! 만을 반복해서 외쳤다.
서독에 도착한 박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광부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탄광에 갔다.
고국의 대통령이 온다는 사실에
그들은 500 여명이 들어 갈 수 있는강당에 모여들었다.
박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함께 강당에 들어갔을 때
작업복 입은 광부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에 앞서 우리나라 애국가가 흘러 나왔을 때
이들은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를 수조차 없었다.
대통령이 연설을 했다.
단지 나라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 역만리 타국에 와서
땅속 1000 미터도 더 되는 곳에서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려 가며
힘든 일을 하고 있는 제 나라 광부들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열심히 합시다"
눈물에 잠긴 목소리로 박 대통령은 계속 일하자는 이 말을 반복했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 역만리 타국 땅 수 천 미터 지하에 내려가
힘들게 고생하는 남자 광부들과 굳어버린 이방인의 시체를 닦으며
힘든 병원일 하고 있는 어린 여자 간호사들.
그리고, 고국에서 배곯고 있는 가난한 내 나라 국민들이 생각나서
더 이상 참지 못해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이란 귀한 신분도 잊은 채...
소리내어 눈물 흘리자
함께 자리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 모두 울면서 영부인 육 영수 여사 앞으로
몰려나갔다. 어머니! 어머니! 하며.. 육 여사의 옷을 잡고 울었고,
그분의 옷이 찢어 질 정도로 잡고 늘어졌다.
육 여사도 함께 울면서내 자식같이 한 명 한 명 껴안아 주며
"조금만 참으세요"라고 위로하고 있었다.
광부들은 뤼브케 대통령 앞에큰절을 하며 울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 주세요.우리 대통령님을 도와 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를 수없이 반복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고 강당에서 나오자 미처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여러 광부들이
떠나는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붙잡고
"우릴 두고 어디가세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부모님이 보고싶어요"
하며 떠나는 박대통령과 육 여사를 놓아 줄 줄을 몰랐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 탄 박 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대통령은 손수건을 직접 주며
"우리가 도와 주겠습니다.서독 국민들이 도와 주겠습니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독 국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돈 좀 빌려주세요.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
를 반복해서 말했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등
이때, 한국은 76불이었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세계 120개 나라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국이었다.
1964년 국민소득 100달러! 이 100달러를 위해
단군 할아버지부터 무려 4,6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후 그대들이 말하는 이른바 우리 보수 수구세력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외국에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를 동원하여
"머리카락 파세요! 파세요!"
하며 길게 땋아 늘인 아낙네들의 머리카락을 모았다.
시골에 나이 드신 분들은 서울간 아들놈 학비 보태주려머리카락을 잘랐고,
먹고 살 쌀을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래서 한국의 가발산업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곰 인형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전국에 쥐잡기 운동을 벌렸다. 쥐털로 일명 코리안 밍크를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다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1965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세계가 놀랐다.
"저 거지들이 1억 달러를 수출 해?"
하며 '한강의 기적'이라고 전 세계가 경이적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조국근대화'의 점화는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들이었다.
여기에 월남전 파병은 우리 경제 회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참전용사들의 전후 수당 일부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반도에 동맥이 힘차게 흐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올림픽을 개최하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세계가 우리 한국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국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대들이 수구 보수세력으로 폄훼 하는
그 때 그 광부와 간호사들, 월남전 세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명심할 것은 그 때 이방인의 시신을 닦든 간호사와
수 천 미터 지하 탄광에서 땀흘리며 일한 우리의 광부,
목숨을 담보로 이국전선에서 피를 흘리는 우리 국군장병,
작열하는 사막의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한 5,60대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그대들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반전과 평화데모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와 교통질서를 마비시키는 그대들이
과연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를 수구세력으로 폄훼 할 자격이 있는가...
그대들이 그때 땀흘리며 일한 오늘의 5,60대들을
보수 수구세력으로 폄훼하기에 앞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라.
국가경영을 세계와 미래라는 큰 틀 전체로 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녀야 하지 않겠는가? 보다 낳은 내일의 삶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즐겨 참고 견뎌
국민소득 4만불대의 고지 달성 때까지 우리들 신,구세대는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갈라져반목하고 갈등하기에는갈 길이 너무 멀다.
이제 우리 모두한번쯤 자신을 돌아보며 같은 뿌리에 난 상생의 관계임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뭉쳐보자.
우리 모두 선배를, 원로를,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며,
우리 모두 후배들을 격려하고, 베풀고, 이해해주면서 함께 가보자.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에 더욱 밝은 빛이 비추어 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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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1세)
안중근의사 1879년 9월 2일(음력 7월 16일) 출생하다.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 황석동에서 부 안태훈과 모 백천조씨 사이에서 3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나다. 태어날때 배와 가슴에 북두칠성 모양의 7개의 흑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고 해서 아명을 응칠이라 하다. 1907년 망명 후 이 이름으로 행세하다. 본관이 순흥으로 고려조 명헌 안향의 26대 자손이며, 해주부에 10여대 세거한 향반으로 조부 안인수는 진해 현감을 지냈으며, 부 안태훈은 성균진사이다. 고주부 때부터 해주, 봉산, 연안 일대에 많은 전답을 장만하여 황해도에서 이름난 부호가문으로 알려져 부친때까지 이어졌다.
 

1884년(6세)
부친 안태훈 진사 박영효가 주도하던 개화파에서 일본에 파견할 70명의 유학생의 일원으로 선발되다. 그러나 갑신정변(1884)의 실패로 수구파 정권의 탄압 대상이 되자 안태훈은 고향으로 은거하다.
 

1885년(7세)
안의사 일가 청계동으로 이사하다.
안태훈 진사는 일가 70~80명을 거느리고 세거하던 해주를 떠나 신천군 두나면 천봉산 밑 청계동으로 이사하다.
안의사 유학을 수악하며 한편 무예를 익혀 무인의 기상을 높이다.
안중근은 소년시절에 조부의 사랑을 받으며 집안에 마련된 서당에서 학문을 수학하고 사서삼경과 자치통감 9권, 조선사, 만국역사 등을 읽다. 한편 포수군들을 따라 사격술을 익히고 사냥을 즐기다.
 

1886년(8세)
동생 정근이 출생하다.
 

1889년(11세)
동생 공근이 출생하다.
 

1892년(14세)
조부 인수가 사망하자 안의사는 애통하여 병이 나서 반년간 치병하다.
 

1894년(16세)
안의사 김아려 규수와 결혼하다.
재녕군 신환면 김홍변의 딸 김아려(17세)와 결혼하여 후에 2남 1녀(딸 현생, 아들 분도, 후생)를 두게 되다.
안의사 소요로 번진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는 신천 의봉군의 선봉장으로 선전하여 용맹을 떨치다.
황해도에서 동학 농민군이 소요를 벌일때 안태훈은 의병을 일으켜 그들과 전투를 별였고, 안의사는 의려장인 부친을 도와 자진 선봉장이 되어 적장소를 급습하고 큰 공을 세우다. 이때 안중근이 붉은 옷을 입고 있었으므로 적당이 달아나면서 '천강홍의장군(하늘에서 내려온 홍의장군)‘이라 칭하다. 안태훈은 동학당에게서 노획한 1,000여 푸대의 쌀을 군량미로 사용하여 훗날 그 상환을 독촉받아 곤경에 직면하게 된다.
안의사와 김구가 상봉하는 인연을 갖다.
동학군의 해주성 공격의 선봉장 김구가 패전, 피신 중 안태훈 의려장의 초청으로 청계동에서 40~50일간 은거생활을 하다.
 

1895년(17세)
안태훈이 동학군으로부터 노획한 천여 푸대의 양곡을 군량으로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되어 탁지부 대신 어윤중과 전 선혜청 당상 민영준으로부터 양곡을 상환하라는 압박을 받았으나 개화파 김종한의 중재로 일시 무마되다.
안의사 무예를 익히며 무인의 기상을 높이다.
청소년 시절부터 안중근은 “벗을 얻어 의를 맺는 일”, “술마시고 노래부르고 춤추기”, “총으로 사냥하기”, “준마를 타고 달리기” 등을 즐기다.
 

1896년(18세)
부친 안태훈 진사 천주교당으로 피신, 천주교 교리를 습득하다.
민영준이 다시 양곡의 상환문제를 들고 나오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안태훈이 천주교당으로 수 개월간 피신하고, 교당안에서 성서도 읽으면서 천주교 강론을 듣고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도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 사이 민영준의 일이 마무리되자 안태훈은 120권의 천주교 교리문답을 가지고 청계동으로 돌아와서 주민들과 인근의 유지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전교활동을 시작하다.
안태훈은 청계동으로 귀향한 후 일가 친척과 마을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 사람을 보내 매화동 본당의 벨렘신부를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초빙하다.
 

1897년(19세)
안중근은 1월 중순 빌렘 신부로부터 토마스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다.
이때 그의 부친을 비롯하여 숙부, 사촌 등 일가 친척과 청계동 및 인근 마을사람등 모두 33명이 함께 세례를 받다.
안중근은 빌렘 신부로부터 교리를 공부하며 평신도의 신분으로 빌렘신부와 함께 전도를 하게 되었고, 한편 불어를 배우며 신사조를 수용하게 되었다. 이 해 말 안의사는 청계동을 사목 방문한 뮈텔 주교를 해주까지 수행하다.
 

1898년(20세)
안의사 교회활동에 헌신하다.
4월 하순, 빌렘 신부가 청계동 본당신부로 옮겨 청계동 본당이 설립되다. 청계동 본당에서 안중근은 숙부 안태건회장과 함께 교회일에 헌신하다. 안중근은 돈독한 신앙심을 갖고 청계당 성당의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한 빌렘 신부를 따라 미사 복사도 하면서 그를 수행하여 황해도의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전교활동에 열중하다.
안의사, 무법 일본인을 꾸짖어 승복시키다.
안중근이 서울에 가서 친구들과 더불어 거리를 걸어가다가 한 일본인이 말을 타고 지나가던 한국 사람을 강제로 끌어내리고 말을 탈취하려고 하는 장면을 목격하다. 이때 안중근이 그 약탈자의 얼굴을 치면서 권총을 뽑아 그의 배에 갖다대고 그를 크게 꾸짖어 승복시키다. 말 주인이 말을 도로 찾아서 간 후 그 일본사람을 놓아주니 많은 사람들이 안중근의 이름을 알고자 하다.
 

1899~1904년(21~26세)
안의사 교회의 총대로 추대되어 교우들의 난제해결에 앞장서다.
천주교를 비방하는 금광 감리 주가가 천주교에 대한 비방을 심하게 하여 교회의 피해가 커지자 안중근이 초대로 선정되어 주가를 힐문할 때 무기를 든 금광 일꾼 400~500명의 위협을 받고 간신히 벗어나다.
만인계(채표회사) 사장에 피선되어 출표식 때 기계 고장으로 군중 앞에서 수난을 당하였으나 함경도 사람 허봉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다.
서울사는 전 참판 김중환이 옹진군민의 돈 5,000냥을 빼앗아 간 일과 해주부 지방대 병영 위관 한원교가 이경주의 집을 비롯한 재산과 아내를 강제로 빼앗은 두가지 사실을 따지고자 상경하였으나 이루지 못하다.
안의사 대학설립을 건의하다.
한국 교인들이 학문에 어두워서 교리를 전도하는데 어려움이 적지 않다고 생각하고 서양 수사회 가운데서 박학한 선비 몇을 청해다가 대학을 설립하여 국내의 연준 자제들을 가르칠 것을 뮈텔 주교에게 건의하였으나 거절 당하다. 이후 빌렘 신부로부터 배우던 불어공부를 중단하다.
조정에서 해서교안을 사핵하고자 조핵사 이응익을 파견하여 천주교회의 중요 인물을 잡아들이는데,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과 숙부 안태건도 포함되었으나 빌렘 신부가 감싸주었고, 안태운은 몇달 동안 숨어다니다.
안태훈이 청국인 서가에게 봉변을 당하자 안중근이 친구 이창순과 함께 서가를 찾아가 따지고 외부에 청원한 결과, 진남포 재판소에 환부하여 승소판결을 받다. 후에 다른 청국인의 소개로 서가와 만나 화해하다.
교우들을 성직자의 권위로 일방적으로 제압하는 빌렘신부에 대항하여 서울의 뮈텔 주교에게 하소하려 하다가 빌렘 신부에게 구타를 당하다. 이때 굴욕을 참고 신부에게 대들지 않고 곧 화해하다.
 

1905년(27세)
안의사 중국 상해와 산동반도를 유력하다.
신문, 잡지, 각국 역사등을 읽으면서 정치사상과 독립정신을 높이던 안중근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침탈하려는 의도를 드러내자 안태훈과 상의하여 중국 산동이나 상해에 국외 항일터전을 잡을 계획으로 출국하여 중국의 상해와 청도 등지를 두루 다니다. 상해에서 민영익을 2~3차례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하고, 상인 서상근을 찾아가서 구국의 방도에 대하여 논의했으나 동의를 얻지 못하다. 처음에는 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할 방도는 외국의 도움을 구하는 길도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상해의 천주교당에서 우연히 만난 친면이 깊은 르각신부의 권면으로 교육의 발달, 사회의 확장, 민심의 단합, 실력의 양성등 4가지에 힘 써야함을 깨다고 진남포로 돌아오다.
안의사 일가 교통 요충지인 진남포로 이사하는 중 부친이 재녕에서 병사하다. 가족들이 청계동에 돌아가 장례를 치르다. 안의사는 상해에서 돌아와 이 사실을 듣고, 진남포를 떠나 제계를 지키기 위해 청계동으로 다시가 상례를 마치고 가족들과 함께 그 해 겨울을 보내다. 이 때 안중근은 독립하는 날까지 술을 끊기로 맹세하다.
이 해, 장남 분도가 출생하다. 그러나 1914년 망명지 북만주 무린에서 조졸하다.
 

1906년(28세)
안의사 일가 진남포로 이사하고, 육영사업에 헌신하다.
4월 안중근이 가족을 데리고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이사해 양옥 한 채를 짓고 살림을 안정시키고, 교육구국운동에 투신하여 진남포에서 삼흥학교, 프랑스 신부가 경영하던 천주교 계통의 돈의학교의 재정을 맡으면서 2대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이 무렵 서우학회(뒤에 서북학회로 개칭)에 가입하다.
 

1907년(29세)
봄에 안태훈과 친분이 있던 김진사가 안중근을 찾아와서 간도, 노령 등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을 권하다. 안중근은 재정을 마련하고자 한재호와 송병운등과 함께 삼합의라는 석탄회사를 만들었으나 일본인의 방해로 인하여 수천원을 손해만 보다.
안의사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다.
이 무렵 대구에서 발생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안중근은 이 운동에 적극 참여, 국채보상회 관서지부를 설치하고 1천여명의 선비들이 모인 평양 명륜당에서 의연금을 내도록 권유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 아내와 제수들에게도 권고하여 반지 폐물까지 헌납하도록 하는 등 열성적으로 구국을 위한 활동을 벌이다.
안의사 서울에서 군대해산을 목도하고, 간도,연해주 지역으로 망명하다.
8월 1일 정미 7조약을 이어 군대가 해산되어 시위대가 봉기하였을 때에 안중근은 국외활동을 통해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고자 서울을 떠나 부산에 도착한 후에 다시 원산으로 향하다. 원산에서 선편을 이용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려 했으나 청진에서 일제 임검경관에게 발각되어 하선하다. 이에 다시 육로로 함북 회녕을 경유하여 두만강을 건너 8월 16일 북간도 용정에 도착하다. 용정촌을 중심으로 북간도 일대를 3개월 동안 시찰하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일으키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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