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 전설이 된 시인 기형도 부활하다 - 중앙일보 >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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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786회 작성일 2006-06-19 00:00
죽어서 전설이 된 시인 기형도 부활하다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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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전설이 된 시인 기형도 부활하다 [중앙일보]

중앙일보 기자 출신 … 시집 17년째 스테디셀러
광명시 시비 세우고 문학 세미나 열어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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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열린 기형도 시비 제막식 장면. 시인의 대학 후배인 황경신(월간 '페이퍼'편집장)씨가 시비에 새긴 '어느 푸른 저녁'을 낭독하고 있다.
# 1986년 11월 18일. MBC 드라마 '전원일기'의 '배추편' 방송이 갑자기 취소된다. 배추값 폭락을 다룬 내용이 당국의 비위를 거슬렀기 때문이다. 당시 사건을 보도한 19일자 중앙일보 기사의 마지막 구절이다.

'대취한 일용은 … 울면서 춤을 춘다. 다음날 아침 술이 깬 일용의 뺨에 누군가 뽀뽀를 한다. 아빠를 찾으러온 딸 복길이다. 일용은 복길을 안고 집으로 향한다. 그래도 여기는 우리의 땅이다. 자식들은 흙의 희망이다. 우리는 고향을 떠날 수 없다.'

20년 전 기사인데도 요즘 기사처럼 생생하다. 기사는 소위 기사체가 아니다. 6하 원칙은 깨졌고 객관적 보도는 무너졌다. 문장은 짧고 주장은 명료하다. 자식들이 흙의 희망이라니! 한 줄 기사가 아니라 한 수 시였다.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이름은, 기형도. 입사한 지 2년 갓 넘은 신참이었다. 기자가 시인인 줄 몰랐던 독자들은 이 통렬한 기사에 환호했다. 편집국에선 금기를 깬 기사란 평이 잇따랐다.



16일 오후 경기도 광명시에서 시인 기형도(1960~89.사진)의 시비(詩碑) 제막식이 열렸다. 행사는 조촐했다. 고인의 누나 애도(40)씨와 소설가 성석제씨 등 지인과 유족, 광명시 관계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오후 3시부터 '살아있는 기형도의 문학'이란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고 오후 6시부터 시비 제막식이 진행됐다. 이게 전부였다. 광명시가 시비를 세우는 데 들인 돈은 1000만원. 전국 곳곳에 시비가 허다한 지금, 소박한 시비 하나 세운 건 별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경우가 다르다. 다른 시비의 주인공은 생전에도 문학성을 인정받은 대가였다. 그러나 89년 서울의 한 심야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될 때까지, 기형도는 시집 한 권 없었다. 등단 5년차 신예였다.

그러나 그는 오늘도 호명되는 시인이다. 뇌졸중으로 급사한 뒤 17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베스트셀러 시인이다. 90년대 이후 한국 시 대부분은 기형도의 영향 속에서 설명되고 있다. 이 점이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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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형도 신화=시인이 주검으로 발견됐을 때, 생전에 그가 메고 다니던 검은 가방도 발견됐다. 거기엔 타이핑된 시 원고와, 시작 메모로 가득한 푸른 수첩이 들어있었고, 그 원고와 메모 등을 모아 시집이 제작됐다. 당시 최고 평론가였던 김현이 해설을 붙였고, 시집 제목을 골랐다. 그리하여 그해 5월 30일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이 출간됐다.

17년이 지난 오늘. 시집은 무려 61쇄가 인쇄됐다. 40여 만 부가 팔린 것이다. 놀라운 건, 해마다 꾸준히 1만 부 이상 판매된다는 사실이다. 문학과지성사 측은 "20년 가까이 판매 순위 상위권을 지키는 유일한 시집"이라고 밝혔다.

세미나에서 박철화(중앙대) 교수는 "시인이 노래한 현대적 일상은 오늘도 유효하다"며 "21세기 이후 한국 시 대부분은 기형도의 자장(磁場) 속에 있다"고 평가했고, 이광호(서울예대) 교수는 "사소한 체험과 사적인 것을 시의 세계로 끌어온 시인에게서 한국 문학사 100년을 예감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 기형도의 추억=시인은 5세 때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로 가족과 함께 이사 왔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거기서 살았다. 광명에 시비가 세워진 이유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안개'중 부분)라고 읊었던 것도 안양천 둑방의 울적한 풍광이 있어 가능했다.

시비엔 '어느 푸른 저녁'이란 작품이 실렸다. 5연 48행의 장시(長詩)다. 시가 워낙 길어 시비를 두 개나 세웠다. 시비에 새길 작품을 고른 건, 대학 때 시인과 함께 문학공부를 했던 성석제씨다. 그는 "형도가 가장 좋아했던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시인은 84년 10월 중앙일보에 입사했다. 정치부.문화부.편집부에서 기자로 일했다. 숨질 당시엔 편집부 기자였다. '김(金)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무엇인가/생각해야 한다, 나는 침묵이 두렵다/침묵은 그러나 얼마나 믿음직한 수표인가'라고 시작하는 '오후 4시의 희망'은 당시 편집국 풍경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시인은 3월 13일 태어나 3월 7일 숨졌다. 행사가 열린 6월 16일은 시인과 관계가 없다. 광명시 축제가 시작된 날일 뿐이다. 그런가 했는데, 흥미로운 기록을 발견했다. 기형도는 시인 김수영(21~68)을 가장 좋아했다. 김수영의 기일이 6월 16일이다. 두 명 모두 요절한 것처럼 이 또한 우연일 것이다.

광명 글.사진=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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