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배들이 주도한 6.10만세운동사건 >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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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749회 작성일 2006-06-06 00:00
중앙선배들이 주도한 6.10만세운동사건

본문

 
6·10만세기념비(六十萬歲紀念碑)


   중앙고등학교 학생들의 6·10만세운동의 주도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1926년 4월 26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융희황제(隆熙皇帝)가 승하하자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통동계(通洞系)의 학생들은 5월 31일까지 다음과 같은 격문 3만매를 인쇄하고, 6월 8일과 9일에 걸쳐 각급 학교에 배부하였다.
   6월 10일 융희황제의 인산(因山)일 8시 30분경 대여(大輿)가 단성사 앞 연도를 통과하자 중앙보생 이선호(李先鎬)의 선창으로 수십명의 학생이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면서 가지고 있던 격문 1,000여매를 군중에게 뿌리고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날 거사를 주도하였던 중앙고등학교생 이선호·유면희 ·이동환·황정환 등 7명이 징역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격문-
   조선 민중아!
   우리의 철천지 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주검을 결단코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 만세
   단기 4259년 6월 10일
      조선민족대표 김성수 외 2명

 
병인만세사건()이라고도 한다. 주동자는 연희전문의 이병립()·박하균(), YMCA 영어과의 박두종(), 중앙고보의 이선호()·이황희(), 경성대학이천진() 등이다. 이들은 순종의 국장일인 6월 10일에 많은 민중이 참배할 것을 예상하고 이를 계기로 3·1운동과 같은 대일항쟁운동을 유발하고자 격문()을 인쇄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사전준비를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날 전경찰과 조선군사령부 휘하 일본군 5,000명을 동원해서 경비에 들어갔다. 오전 8시 30분경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나면서 중앙고보생이 주창하여 독립만세을 부르며 격문을 뿌렸고, 이어 관수교()·경성사범학교앞·훈련원·동대문·청량리에 이르는 연도에서도 만세와 격문을 뿌려 많은 민중이 이에 호응하였다.

이 사건으로 이날 200여 명이 붙들렸고, 그 영향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순창·정주()·군산·울산·평양·홍성·공주 등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나 전국에서 1,000여 명이 체포·투옥되었다. 이 밖에 사회주의계열의 권오설(박내원(민창식() 등도 6월 10일을 기하여 전국적 규모의 민족운동을 전개하고자 사전에 상하이[]의 여운형() 등과 연락하여 격문 10만 장을 인쇄하는 등 준비를 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6·10만세에 합세하지 못하였다.
 
[다시쓰는 독립운동列傳] Ⅱ-3. 권오설과 6·10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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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민족적 기개를 보여준 주요 사건 중 하나인 6·10만세운동. 하지만 이 역사적 사건의 숨은 주역이 좌익인사 권오설(1897~1930)임을 아는 이는 드물다. 2차 조선공산당이 사전 계획한 만세시위가 굴곡의 역사를 거치며 학생단체와 천도교의 합작품으로 축소됐기 때문이다. 최근에 와서야 역사교과서에 ‘좌우합작 운동’으로 표기됨으로써 좌파계열의 공헌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2차 조공 하부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은 민족해방을 위해 공산주의 노선을 택한 ‘실용주의’ 운동가였다. 사회주의는 수단이었지 목적이 아니었다. 전문가들은 “이제는 그를 올바로 평가해야 할 때”라고 입을 모은다. 해묵은 반공주의 잣대로 20년대 역사를 재단하는 것은 역사를 우롱하는 처사라는 것이다.

◇안동의 대중운동가=안동권씨 복야공파 35세손인 권오설은 풍서면 가곡리(현 가일마을)에서 부친 권술조와 모친 풍산류씨 사이에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대로 사족의 반열을 지켜온 안동 명문집안이었지만 그의 부친대에 와선 서당을 운영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 전통적 반촌에서 성장한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학문에 대한 열의는 남달랐다.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은 3·1운동. 조국해방이 삶의 목표가 돼버렸다. 그는 우선 가일마을에서 학술강습소를 열어 몽매한 농촌을 계몽시키는 데 주력했다. 당시 지방에선 소작료를 7할까지 요구하는 일본인들의 횡포가 심했다. 이는 권오설이 동향선배 이준태, 김남수 등과 함께 23년 풍산소작인회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됐다. 풍산소작인회는 소작농뿐 아니라 중·소지주와 지식층이 대거 참여한 5,000여명 규모의 전국 농민조직으로 성장하게 되고 권오설은 이 조직의 집행위원 취임을 계기로 활동무대를 서울로 옮기게 된다.

◇6·10만세 운동의 주역=권오설은 상경한 지 불과 1년도 안돼 사회주의 단체에서 지도자급에 올랐다. 24년 4월 260여개의 가입단체와 5만3천여명의 회원을 가진 조선노농총동맹의 상무집행위원에 이어 25년 조선공산당 창당작업에 가담한 후 그해 4월 조공 산하 실무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 조직부를 맡았다. 특히 2차 조공시기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에 올랐다.

2차 조공이 벌인 대표적인 업적은 6·10만세운동이었다.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의 인산일에 일어난 이 운동은 3·1운동을 계승, 발전시켜 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완결된 국내 3대 독립운동 중 하나다. 추진과정에는 다양한 세력들이 참가했다. 국외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와 임시정부 일부 세력 및 임시정부의 외곽조직인 병인의용대, 국내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천도교, 조선노농총동맹에서부터 일본 유학생, 국내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지방의 보통학교에 이르기까지 이념도 초월했다. 이 거사의 중심에 권오설이 있었다. 그는 만세시위에 나선 학생들을 규합시킨 주인공이었다. 권오설은 당시 상해에 망명 중이던 김찬, 김단야, 조봉암 등과 연락해 상해에서 격문전단을 인쇄해 조선에 보내도록 하는 한편, 국내에서도 격문전단과 투쟁슬로건이 담긴 인쇄물을 준비했다. 그러나 거사를 3일 앞두고 일제경찰에 발각돼 5년형을 선고받았다. 권오설은 형무소 안에서도 심문과정에서 폭행과 고문을 자행한 일제 경찰을 고소하는 고문사건항의운동까지 전개하며 일제에 대항했다. 일제에 ‘입 안의 가시’였던 권오설은 결국 복역 도중 1930년 4월17일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권오설, 드디어 부활하다=권오설은 공산주의 계급해방의 논리를 일본이라는 자본가 계급 대 식민지 조선이라는 무산자 계급의 논리로 해석한 조공의 최고위급 인사다. 오랫동안 독립운동 유공자 포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이유다. 그러나 국민대 장석흥 교수(사학과)는 권오설을 단순한 공산주의자라고 규정지어 역사적 사실마저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권오설을 “3·1운동에 뛰어든 민족운동가이며 농촌에 신식교육을 보급한 계몽가. 전통적인 성리학이 팽배했던 안동 양반가문 출신답지 않게 소작인 권리찾기에 발벗고 나섰던 혁명가요 전민족적 봉기를 기획하고 이끈 지도자”라고 정의 내렸다.

독립기념관 김희곤 소장은 “그는 일경찰의 삼엄한 경비로 봉분도 쓰지 못하고 평장을 지냈다. 해방 이후엔 좌우대립으로 방치됐다가 70년이 흐르고 나서야 봉분을 했다”며 “30년대 죽은 사람이 북한 정권과 무슨 관련이 있겠냐”고 말했다.


58. 순종 장례 행렬(1926)
(한길사,한국사-15, 1994,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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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6.10만세운동
(한길사,한국사-15, 1994,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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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만세운동의 공판속보를 상세히 보도한 조선일보 1926년 11월 3일자 {조선일보}
6.10만세운동은 1920년대 일본제국주의의 가혹한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에 맞서 조선 민중이 전개한 대표적인 대중적 반일투쟁의 하나였다. 이 운동은 3.1운동 이후 새로운 사회계급적 제관계의 변화 속에서 투쟁지도부의 목적의식적 활동에 의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다.
1926년 4월 25일 조선왕조의 마지막 국왕인 순종(李拓)이 사망하자 전국 각지에서 조선 민중들의 반일감정이 급격히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조공은 순종 장례일을 기해 통일적인 전국적 시위투쟁으로 전화시키고자 산하에 '6.10운동투쟁지도특별위원회'(총책임자 권오설)를 설치하였다. 투쟁지도부를 중심으로 당원 및 인쇄직공조합원들은 격문 5만여 매의 인쇄와 전국 58개소의 지역을 잇는 조직연락망을 완성하였다. 지방과의 연계사업은 주로 노동단체, 소작인조합, 천도교 교구, 청년단체, 신문사지국, 개벽 지사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학생들과의 연계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책임자 이병립/연희전문 문과 2년생)를 통해 주로 이루어졌다.
투쟁은 종로3가, 관수교, 황금정, 훈련원, 창신동 등 장례행렬이 지나는 길로 이어지면 가열차게 전개되었다. 특히 동대문 부근에서의 투쟁은 시위대들이 혈서을 쓰기도 하였으며, 시위대가 일제경찰의 군화발에 밟히는 등 처절하고 피어린 투쟁이 전개되었다. 지방에서는 인천의 만국공원, 순창, 병영, 통영, 원산, 개성, 홍성, 전주, 신천, 평양, 마산, 공주, 하동, 당진, 이원, 강경, 구례 등에서 전개되었다.
6.10만세운동으로 전국에서 5천여 명이 연행되었고 일제의 야만적 폭행으로 160여 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하였다. 또 감옥에서 고문으로 불구가 된 사람이 10명이 넘었으며, 6.10만세투쟁 총책임자였던 권오설은 적들의 간악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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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


 

장 석 흥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


   해는 6·10만세운동 7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더욱이 민족통일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일고 있는 시점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각기의 정치·사회 사상의 이념을 초월하여 민족협동전선의 새 장을 열었던 6·10만세운동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작업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이 글에서는 6·10만세운동에 대한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6/·10만세운동은 국내 독립운동의 역량과 성숙과 함께 국제정세를 비롯한 독립운동계의 주객관적 조건 등이 조응하여 일어난 운동이었다. 따라서 발생 배경을 융희황제(隆熙皇帝:순종) 승하(昇遐)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운동에 내포된 의미들을 놓칠 우려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로써, 이 운동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고 또 지방으로 크게 확대되지 못하여 소규모의 시위 형태로 전개 되었던 것과 관련해서, 6·10만세운동의 역사적 비중과 역할을 낮추어 보는 경향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6·10만세운동이라 하면 주로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만을 놓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이 운동이 갖고 있는 성격과 의의 역시 제한적으로 규정되어 온 감이 있었다. 6·10만세운동의 역사적 성격과 의의는 외연(外延)의 사실에서보다 내포(內包)된 의미에서 찾아지고 규명되어져야 할 것이다.
   융희황제의 승하에서 촉발된 6·10만세운동은 광무황제(光武皇帝:고종)의 국상(國喪)을 계기로 일어났던 3·1운동의 경험을 전승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을 계승한 제2의 만세운동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6·10만세운동은 단순히 망국(亡國)의 군주(君主)에 대한 애도에서 시발된 운동만은 아니었다. 6·10만세운동은 일제 식민지통치의 모순에 대항하며 3·1운동 이후 성숙되어간 민족역량에서 배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먼저 사회주의 수용과 더불어 발전해 간 독립운동의 이념에서 찾아질 수 있다. 사회주의 사상은 초기 수용과정에서 민족주의와 적지 않은 갈등을 보이기도 했지만,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의 모순을 정치적 차원뿐 아니라 경제적 차원에서 제기함으로써 민족독립의 이론을 성숙시키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민족이론은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서로 상치되거나 대립되기 보다는 민족혁명을 위해 결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질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것은 1920년대 초반에 보였던 국제화(國際化)와 개량화(改良化)에 대한 민족내부의 반성에서도 기인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민족 내부에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합하는 민족협동전선의 지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6·10만세운동의 준비 과정에서 성립된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에 의해서 실천적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6·10만세운동은 운동의 주체와 이념적 측면에서 3·1운동과 뚜렷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었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연대함으로써 민족협동전선을 이룩해 갔던 것이다.
이는 민족혁명에 대한 이론적 발전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운동의 계획 과정에서, 비록 일제의 철저한 탄압에 의해 좌절되었지만, 국내외의 민족세력들이 유기적 관계속에서 운동을 추진해 갔던 것이다. 이들 추진 주체들은 깊은 연대아래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운동의 최초 계획은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에서 구상되어졌고, 천도교는 유력한 조직 기반을 바탕으로 격문 인쇄와 지방 연락을 맡아 나갔다.
여기에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만세운동의 점화역할인 서울의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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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독립운동



1장 민족의식의 성장과 독립운동



개                           요


1.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 후 한일의정서, 을사조약 등을 걸쳐 조선총독부를 세우면서 우리민족의 국권을 침탈하였다.

2. 우리민족은 항일결사조직을 결성하고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 등 항일의병운동을 추진하였다.

3. 삼일운동은 민족주체성을 확인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4. 보다 강력한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통합된 단일 정부의 필요성에 의하여 임시정부가 탄생된다.

5. 국내에서는 독립군 등 무장항일투쟁과 애국지사들의 의거, 광주학생운동 등으로 독립전쟁이 전개되었다

6. 국외에서는 간도를 비롯한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무장 독립군들이 활동했으며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하여 국내진입작전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1] 민족의 수난


1. 국권의 피탈


(1) /일의 대립



  • 러시아의 남하 : 러시아는 일본으로 하여금 요동 반도를 청에게 돌려주게 한 뒤, 청과 비밀 협상을 맺어 시베리아 철도가 만주를 통화할 수 있는 권리를 차지하고, 뤼순과 다렌을 조차하였다. 이어 블라디보스토크항과 뤼순항을 연결하는 해군 기지를 얻기 위하여 마산(밤구미)·(고하도) 등지를 조차하려다가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다(1899). 이 때 러시아는 만주를 세력 팽창의 중요 기지로 삼고 있었는데, 마침 청의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대군을 만주에 출동시켜 영구히 점령할 태세를 보였다.

    영·일 동맹(1902) : 러시아와 대항할 자신이 없던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과 맞서고 있던 영국과 영·일 동맹을 체결하는 데 성공하였다. , 일본은 청에서의 영국의 이권을 승인하고, 그 대신 영국은 한국에서의 일본의 특수 이권을 승인한다는 것이다. 일본이 동맹 후 영·미 양국과 함께 러시아 군의 만주 철병을 강력히 요구하자, 러시아는 오히려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를 조차하여 군사 기지를 만들려다가 결국 좌절되었다.(1903).



(2) ·일 전쟁 (1904 - 1905)



  • 러·일의 협상 결렬 : 러·일은 만주와 조선을 가운데 놓고 노골적인 침략 경쟁을 하였고, 일본은 러시아의 만주 철병이 이행되지 않자 러시아에 협상을 제의하였다(1903). 이 타협안에서 일본은 러시아의 만주 철병과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의 지위 승인을 주장하였고, 러시아는 만주 철병을 거부하는 동시에 북위39도선으로 한국을 양분하여 각자의 세력범위로 하자고 주장하였다. 일본은 38도선의 양분을 제의했으나 결국 협상은 결렬되어 양국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전쟁의 발발 : 양국의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19042월 선전 포고도 없이 뤼순을 공격하였다. 이어 육군은 평양, 랴오양,사허,뤼순,선양,회전에서 대승하였고(1905. 1), 해군도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쓰시마 해협에서 전멸시켰다(1905. 5). 더구나 러시아는 제1차 러시아 혁명이 발발함으로써, 드디어 미국(U¸IÐ) 대통령 루스벨트(T.Toosevelt)의 권고로 강화 조약을 맺고 일본이 승리하게 되었다.



(3) 국제적 일본의 지배 승인



  • 러·일의 협상 결렬 : 러·일은 만주와 조선을 가운데 놓고 노골적인 침략 경쟁을 하였고, 일본은 러시아의 만주 철병이 이행되지 않자 러시아에 협상을 제의하였다(1903). 이 타협안에서 일본은 러시아의 만주 철병과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의 지위 승인을 주장하였고, 러시아는 만주 철병을 거부하는 동시에 북위39도선으로 한국을 양분하여 각자의 세력범위로 하자고 주장하였다. 일본은 38도선의 양분을 제의했으나 결국 협상은 결렬되어 양국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1차 영·일 동맹(1902)

    포츠머스 조약(1905.9.5) : 미국의 중재(루스벨트)에 의해 체결된 조약으로, 일본은 대한 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국제적으로 묵인 받았을 뿐 아니라, 요동반도를 영유하게 되어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또 사할린 남반부를 차지하여 대륙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가쓰라 태프트 밀약(1905. 7. 29) : 포츠머스조약 체결에 조금 앞서 일본과 미국은 비밀 협상을 벌여, 일본이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독점 권익을 인정하는 대가로 미국은 대한제국에 있어서의 일본의 독점적 지배권을 묵인하는 밀약을 미 국무 장관 태프트와 일본 외무 대신 가쓰라 간에 체결하였다. 이 때, 알렌(Allen) 공사는 일본 세력의 저지를 주장하였으나 루스벨트는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를 막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영일 동맹의 개정 (1905. 8. 12) : 영·일 동맹을 개정하여 (2차 영·일 동맹) 영국으로부터 한국(韓國) 침략을 승인 받았다. 즉 일본은 인도에서의 영국의 이권을 인정하는 대신 영국은 한국(韓國)에서의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4) 국제적 일본의 지배 승인



  • 한·일 의정서(1904. 2)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대한 제국은 양국의 전쟁 속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전쟁 도발과 동시에 우리 나라에 병력(2개 사단)을 투입하여,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군사적 요지를 점령하고, 일본이 전략상 필요로 하는 장소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게 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의 내정 간섭 충고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한·일 의정서를 강제적으로 체결하였다. 이에 따라 국외 중립은 무너지고, 러시아와 맺었던 조약은 폐기되었다.

이지용과 하야시사이에 체결된 것으로 영토 보전과 황실의 안녕을 도모한다는 미명 아래 내정 간섭이 정식으로 시작되었고, 외교권 침해와 군사 기지의 점유 등으로 본격적인 침략의 제1보를 내딛게 되었다.




  • 1차 영·일 동맹(1902)



  • 체결 과정 : 전세가 일본에게 유리해지자, 일본은 한국 식민지화 계획에 따라 강제로 한일 협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1904. 8. 22).
  • (전문 3조) : 일본인 재정 고문과 일본이 추천한 외국인 외교 고문을 초빙한다는 내용이었다.

    결 과 : 재정 고문에 메가다, 외교 고문에 미국인 스티븐슨이 파견되었고. 협정에도 없는 군사·경찰·학부·궁내부 등에도 고문이 파견되어 고문 정치가 실시되었다. 1차 한·일 협약은 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의 제한을 통해 식민지화의 제2보라 할 수 있다. 특히 메가다는 화폐를 정리하여 일본 제일 은행의 신화폐를 사용케 하고 금 본위제를 확립하였다. 특히 제일 은행 지점을 개설하여 통화 발행권을 가져 실질적으로 한국 경제를 지배하였다.




  • 2차 한일 협약(1905, 10)



  • 무력적 시위 강요 : 일본은 포츠머스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 난 뒤에 보다 노골적으로 식민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군으로 궁성을 포위하고 무력 시위를 전개하는 가운데 보호 정치를 강요하는 을사조약의 체결을 요구하였다. 이토는 적극 반대하는 참정 대신(수상) 한규설을 일본 헌병을 시켜 회의실에서 끌어내고, 이완용(학대),박제순(외대),권중현(농상),이지용(내대),이근택(군부) 등 이른바 을사5적을 위협하여 서명하도록 하였다(1905. 11).
  • 고종의 무효 선언 : 처음부터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마지막까지 인준하지 않았으며, 그 무효를 선언하였다.
  • 외교권의 피탈 : 일본이 이 협약에 의하여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와서 외교뿐만 아니라 내정권까지 관장하였다(각 개항장 및 필요지역에 이사관 설치), 이로써 우리의 해외 주재 공사가 모두 소환되었으며, 간도를 청국에 넘겨주고 독도를 일본령으로 강제 편입시켰다.
  • 을사조약의 성격 : 소위 보호 정치가 실시되어 자주 국가로서의 면모를 상실하고 말았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일본에 예속돼 식민지나 다름없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 1907, 7)



  • 내 용 :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지 4일만에 이토와 이완용 간에 체결되었다
  • 성격 및 결과 : 통감의 내정 전반에 걸친 침략을 합법화시켰고, 각 부의 차관을 통감부 참여관으로 임명함으로써, 이른바 차관 정치가 성립되었다. 결국 이 조약의 결과 모든 통치권이 통감부로 옮겨졌다. 따라서 한국은 시정 개선에 통감의 지도를 받아야 하며, 통감의 사전 승인 없이는 입법 및 행정상 중요한 처분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관리 임명권도 박탈당하고 말았다
  • 군대 해산(1907. 8. 1) : 8,800명(친위대 4,000, 진위대 4,800)밖에 안 되는 군대를 재정 부족을 구실로 해산시켰다
  • 기유각서(1909. 7) : 사법 및 경찰 사무의 개선이란 명목으로 사법 및 감옥 사무를 일본에 위탁하고 한국 경찰은 일본 사법관의 지휘, 명령을 받게 되었다.
  • 경찰권(IioIIi) 박탈(1910. 6) : 소네 후임으로 데라우치(ÞNORiaeo)가 통감이 되어 6월에 합방의 준비로 동경에서 한국의 경찰권 이양의 조약을 맺고 7월에 부임하였다.
  • 국권(IÐIi)의 상실(1910. 8) : 황성 신문, 대한민보, 대한 매일 신보 등을 폐간시킨 뒤 일진회를 앞세워 한국의 국권을 박탈하는 합방 조약을 체결하였다. 총리 대신 이완용과 마지막 통감 데라우치 간에 체결, 조선을 일본에 완전 병합(1910. 8. 27)하였다. 이로써 조선 왕조는 27519년만에 망하였고, 한민족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되었다.(829일 발포).


      2. 간도와 독도 문제


(1) 간도 문제



  • 간도로 이주 : 문호 개방 전후로부터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이르는 동안 우리 민족이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많이 이주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간도 지역에 많이 모여 이곳을 개척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의 기지로 삼았다
  • 간도 개척 : 1860년대로 접어들면서 함경도와 평안도의 농민들이 북간도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곧 10만을 헤아리게 되었으며, 1901년경에는 거의 북간도 전역을 차지하여 그곳 농토의 80%이상을 개척하였다. 그리고 1910년대에는 한국인 수가 수십만에 달하여 인구 면에서나 개척 면에서나 우리 민족의 실질적인 영토가 되었다
  • 청국과의 분쟁 : 청은 1880년대에 간도 개간 사업을 벌인다는 구실로 우리 나라 정부에 대하 한민족의 철수를 요구하여 간도 귀속 문제가 일어났다.
  • 이중하의 파견 : 우리 정부는 1885년 이중하(토문 감계사)를 파견하여, 백두산 정계비의 비문에 경계로 되어 있는 토문강은 쑹화강 상류이므로 간도는 우리 영토임이 틀림없다고 주장하고(청은 토문강을 두만강이라 주장), 어윤중을 서북 경략사로 임명하여 이에 대처하도록 하였다.
  • 이범윤의 활동 : 러시아가 간도를 점령하려 하자(1900) 정부에서는 1902년에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임명하여 현지에서 포병을 양성하고 조세를 받도록 하였으며 동시에 함경도의 행정 구역으로 연장시켜 관리하게 하였다
  • 간도에 관한 청·일 협약



  • 간도 파출소 설치 : 을사조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처음에는 자기들이 관리한다고 나서면서 간도 용정촌에 파출소를 두어 우리 영토로 취급 관리하였다.
  • 간도 협약 : 일본은 만주 대륙 진출을 위해 간도를 희생시켰다. 즉 남만주 철도인 안봉선 철도 부설권과 푸순 탄광 이권을 얻는 대가로 토문강이 두만강임을 묵인하는 간도 협약의 체결(융희 3년, 1909. 9. 4)로 산도를 청의 영토로 넘겨주었다. 간도는 일제 시대에는 독립군의 군사 기지였으며, 현재에도 100만 명 이상의 교포가 살고 있어 영토적인 숙제로 남아 있다.


(2) 독도 문제



  • 울릉도 개척 : 동해상의 독도는 울릉도에 부속되어 있는 섬으로 삼국 시대 이래 우리 영토였다. 숙종 때 동래 어민 안용복이 울릉도에 침범해 온 일본 어부를 축출하고 일본까지 가서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 영토라고 확인시킨 일도 있었다. 계속 어민들이 침범하자, 1991년에 정부는 이 사실을 일본에 항의하고, 울릉도를 개척하기로 하여 이주민을 보내고 관리를 파견하였다. 1901년에는 울릉군으로 승격시키고 독도도 관할하게 하였다. 그후 독도는 울릉도 사람들에 의해 많이 이용되었다.
  • 독도의 수복 : 일본은 1905(을사조약 이후) 불법적으로 독도를 강탈하여 일본 영토라고 [다케시마라고 하여 시마네현에 편입] 하였으나, 1945년의 광복으로 되찾았다.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은 말할 나위가 없으며 문헌비고, 통문관지, 매천야록 등과 고지도에 잘 표시되어 있다.


      3. 조선총독부


(1) 조선 총독부설치 : 일제는 식민지 통치의 중추 기관으로 조선 총독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한민족에 대한 탄압과 경제적 착취를 쳐서 그들의 지배 체제를 굳혔다. 조선 총독은 육·해군 대장 중에서 임명되었고, 입법·행정·사법 및 군대 통수권을 집행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2) 중추원의 설치 : 총독부의 관리는 거의 일본인으로 임명하였고, 그 자문 기관으로 중추원(neoOeA)을 두어 이완용 등 친일적 인물을 회유하면서 한국인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것처럼 선전하였다 그러나 중추원은 3¡¤1 운동 때까지 한 차례의 정식 회합도 없었던 이름만의 기관이었다.


(3) 헌병 경찰 통치



  • 창 설 : 190710월 의병 색출을 위해 헌병이 치안을 장악하고 정보원으로 한국인 헌병 보조원을 두었다.
  • 조 직 : 경무 총감은 헌병 사령관이, 도 경무 부장은 도 헌병 대장이 겸임하고 경무 부장 밑에 경찰서와 헌병 분대를 함께 두어 헌병과 경찰의 이원 조직을 일원적으로 지휘하게 하였다.
  • 언론 탄압 :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고 하찮은 언동지 취초, 검거 직결을 자행하였다.
  • 특 징 : 헌병 경찰의 주요 임무는 경찰의 업무를 대행하는 것 외에 독립 운동가를 색출하여 처단하는 것이었으며 일반 관리, 학교 교원까지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다녔다.
  • 105인 사건 : 총독 암살 미수 사건(안명근)을 조작하여 신민회의 윤치호 등 600명을 검거하고 105인을 기소하였다.


(4) 식민지 통치의 강화



  • 실시 배경 : 우리 민족은 일제의 강력한 식민 통치에 대항하여 거족적인 3¡¤1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제의 잔인 무도한 무력 탄압으로 그것은 일단 좌절되었다. 한민족의 단결력과 약화된 국제 여론에 부딪치게 된 일제는 식민지 정책에 대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내 용



  • 무단 통치의 완화 : 지금까지 현역 육·해군 대장으로 조선 총독을 임명, 파견하던 것을 고쳐 문관도 임명될 수 있게 하였고,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전환하였다(해군대장인 사이토총독부임).
  • 언론 통제 완화 : 조선 일보와 동아 일보. 시대 일보 등 민족계 신문의 발행을 허용하면서 언론의 자유를 주는 듯이 위장하였다.
  • 교육 제한 완화 : 조선 교육령을 발포(1922)하여 고등 보통 학교를 설립하고 조선어와 조선사를 강의하게 하였으나, 고등 교육은 계속 억제하였다.
  • 제한된 정치 참여 : 총독의 자문 기관인 중추원의 확대를 포함하여 도·부·군에 각각 평의회와 협의회 등을 두어 정치 참여를 허용하는 듯이 위장시켰다.
  • 문화 정치의 기만성 : 언론의 허용과 교육의 기회를 확대해 준다고 하였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소수 친일 분자를 키워 이간, 분열시키고 민족의 근대 의식의 성장을 오도하며, 초급의 학문과 기술 교육 등을 통해 일본의 수탈에 도움이 될 도구적인 인간을 키워내기 위한 것이었다. 언론 역시, 한국인의 민심 소재를 파악하려는 수단의 하나로 삭제·압수·정간을 마음대로 하였다. 1945년 일본이 축출될 때까지 단 한 명의 문관 총독도 임명되지 않았고, 보통 경찰이라 하나 헌병 경찰이 제복만 바꾸어 입는 데 지나지 않았다,. 1925년에는 치안 유지법을 공포하여 민족 운동을 더욱 억압하였으며, 사상 관계를 전담하는 고등계 형사를 따로 두었다(1923). 관동 대지진 후의 만행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5) 민족 말살 정책



  • 배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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