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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065회 작성일 2011-03-16 08:36
장달중(55회) 서울대 교수 - [중앙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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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옥색 넥타이 초심에 거는 기대

[중앙일보] 입력 2011.03.02

 

 

htm_2011030223244310001010-001.JPG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학

 

3년 전 다소 쌀쌀한 2월 25일. 우리는 서울 여의도 광장의 연단에 선 이명박 대통령의 부드러운 옥색 넥타이를 보았다.

 

리고 우리는 들었다.

 

‘배려와 품격’ 있는 ‘선진 일류국가’를 향해 ‘장엄한 출발’을 선언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연설을.

 적지 않은 기대를 불러일으킨 연설이었다.

 

옥색 넥타이가 상징하듯 이념적 대립으로 첨예화된 갈등을 극복하자는 외침으로 들렸다.

 

그동안 무너져 내리고 있던 관용과 품위를 우리 사회에 회복시키자는 호소이기도 했다.

 

이념 대신 실용과 타협을 예감케 하는 연설이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이명박 대통령은 기업인 출신이다.

 

민주화 이후 정치색이 가장 적은 대통령이었다.

 

언제나 일하는 대통령, 경제 대통령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도덕과 청렴, 정의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실용과 합리, 그리고 타협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래서 외국 기자나 외교관들이 물어오면 이념보다는 이익을 추구하는 실용적 스타일의 대통령이 아니겠느냐고 답했던 기억이 새롭다.

 민주화 이후 대통령선거 다섯 번, 정권교체 두 번.

 

제대로 된 선거 두 번 치르면 민주정치가 제자리 잡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정치학의 정설이다.

 

하지만 우리 정치판은 아직 선악을 놓고 벌이는 이념적 대결장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배려와 품격을 호소하는 취임사는 단순한 정치적 편의주의를 초월하는 시대적 바람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래서 이제 민주정치가 정상궤도에 진입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정치판을 보라.

 

배려와 품격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것이 현실 아닌가.

 

이 대통령의 옥색 넥타이와 취임연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대통령의 취임사는 재임 5년간의 국정 청사진을 제시하는 중요한 연설이다.

 

그것은 정권 의지의 표현인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약속이기도

 

하다.

 

그래서 재임 5년간의 나라 모습을 보려고 하면 대통령의 취임사를 들춰본다.

 

그런데 지금 대통령의 취임연설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물론 대통령들의 취임연설이 기억 속에 살아있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그러나 눈을 한번 밖으로 돌려보자.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두려움 그 자체 말고는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루스벨트의 연설을.

 

그리고 “국가가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묻지 말고,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를 물어라”는 케네디의 취임사도 기억하고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반세기 이상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다름 아닌 대통령의 메시지가 국민의 공감을 얻는 실천으로 옮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대공황의 극복에, 파시즘과의 전쟁에, 그리고 후진국에서의

 

봉사활동에 자발적인 참여를 마다하지 않았다.

 

여기에 비추어 보면 왜 이 대통령의 취임연설이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는지는 자명해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3주년을 맞아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강조했다.

 

초심을 되돌아보고 자세를 점검하는 기회를 갖기 위해 3년 전 여의도 광장

 

취임식 때 맸던 옥색 넥타이를 다시 맸다.

 

그리고 스캔들 같은 게 터지지 않도록 몸가짐을 조심하라 했다고 한다.

 

“국민을 섬기고…배려와 품격이 넘치는…선진 일류국가를 만들겠다”던

 

취임연설을 다시 상기시키고 있다.

 초심으로 돌아가려는 대통령의 이와 같은 자세는 매우 고무적이다.

 

그러나 앞으로 2년간 더 진지한 고민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가 ‘배려와 품격 있는 나라 만들기’의 초심에 신뢰를 보냈던

 

것은 ‘고·소·영’이나 ‘영포라인’을 알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또 ‘선진 일류국가 만들기’에 동참했던 것도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에서

 

우왕좌왕하는 병역미필 실세들의 모습을 보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하는 대통령의 모습에 지지를 보냈던 것도 전세난, 구제역, 물가고에

 

부닥치기 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3년 전 다소 쌀쌀한 날로부터 우리는 꽤 달려왔다.

 

하지만 옥색 넥타이의 초심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져 버렸다.

 

그것은 대통령의 ‘배려와 품격’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물론 우리는 아직 대통령의 초심에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는 결코 이전 같지는 않을 것 같다.

 

남은 2년간 이렇게 낮아진 기대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 우리 모두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학

 

 

 

[중앙시평] ‘역설적 관용’의 정치는 불가능한가

[중앙일보] 입력 2011.02.10 
 
htm_2011020922594410001010-001.JPG장 달 중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미국이 아무리 다양한 의견의 나라라 하지만 정치적 레토릭은 저질스럽기 짝이 없다. 정치판에 토론은 없고 인신공격만이 난무하고 있다.
 
라디오나 TV를 틀면 미국이 과연 민주주의 국가인가 의문이 들 정도다. 이런 분열상은 지난달 초 애리조나주 투산에서 일어난 민주당 하원의원 저격사건으로 정점에 다다른 느낌이다. 진보파는 저격사건이 보수적인 인사들의 과격한 언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보수파는 정신병자의 범죄를 진보세력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맞받아치고 있는 실정이다.

 좌·우파 간의 품위 없는 정치적 레토릭은 미국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일본이나 우리가 다 같이 앓고 있는 민주주의의 병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바마 대통령은 이런 병을 치유하기 위해 “관용과 품위(civility)”를 호소하고 나섰다. 투산에서의 추도식 연설을 통해서였다. 흉탄에 쓰러진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 스토리를 언급해 가며 이들이 염원했던 사회에 걸맞은 시민적 미덕을 복원하자고 호소했다. 취임 이래 가장 훌륭한 연설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 보수 인사는 이제 비로소 오바마를 미국 대통령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오바마의 초당파적인 협력 호소는 국정의 기본 방침을 나타내는 연두교서 연설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25년 만에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법인세 인하를 민주, 공화 양당에 요구한다”고 호소하자 양당 의원들이 기립박수로 응답했다. 미 언론들은 오바마가 정치적 레토릭의 질을 바꿀 기회를 만들어 냈다고 평하고 있다. 대통령학의 권위자인 그린스타인 프린스턴대학 명예교수는 이런 정치를 ‘역설적 관용’의 정치라고 규정하고 그 원조를 레이건 전 대통령이라고 보았다.

 사실 오바마의 연두교서 연설은 상당 부분 레이건을 연상시키고 있다. 이미 그는 2008년 경선에서 레이건을 ‘변환적인 대통령’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최악의 본능’에 집착하기보다 최선에 호소함으로써 미국을 절망으로부터 구출한 자신의 롤 모델이라 했다.

 

미국에서 취임 때보다 퇴임 후 지지율이 높았던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와 레이건뿐이다. 그들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대통령들의 일화들’은 ‘온화한 미소 속의 역설적 관용’ 정책을 그 비결로 전하고 있다. 레이건은 매우 보수적이었지만 일리가 있다고 생각될 때는 보수적 원칙을 과감히 버렸다. 그래서 “철학은 골통 보수였지만 정책은 ‘페비안적 보수주의자’였다”는 별칭을 얻었다.

 레이건의 역설적 관용이 보다 분명하게 나타난 것은 외교정책에서였다. 그는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명명한 1983년 연설에서 원본을 지우고 “우리의 평화적 의도를 설득하기 위해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려 한다”고 직접 자신의 손으로 써넣었다. 그는 고르바초프와의 인간적인 유대를 통해 소련에 대한 화해정책을 모색했다. 이를 위해 그는 주변에 슐츠 국무장관이나 베이커 비서실장 같이 경륜 있는 참모들을 배치했다. 그가 만일 강경 보수세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소련제국은 붕괴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냉전도 종식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이 역사적인 평가다.

 지금 미국에 레이건 붐이 일고 있다. 강경 보수세력들은 레이건을 자신들의 세 확장에 이용하려 들고 있다. 하지만 레이건은 말할 것이다. 나를 오해하고 있다고. 사실 그는 상대를 악마화하지도 않았으며, 일방적인 군사 외교정책도 펼치지 않았다. 이런 레이건을 모델로 오바마도 역설적 관용의 정치에 가속페달을 밟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 우리가 오바마의 정치 실험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바로 2년 반 가까이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만나지도 못하고 있는 우리 정치의 과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여야 의원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기는커녕 국회 개원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정치현실에서 품위 있는 정치 레토릭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정치를 그대로 방치하기에는 우리 현실이 너무 심각하다. 구제역, 물가, 전세대란, 남북문제 등 시급한 현안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레이건이 그랬듯이 영수회담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명박 대통령과 손학규 대표는 자신들의 원칙을 과감히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다름 아닌 역설적 관용의 정치다. 그 이니셔티브를 이 대통령에게 호소하는 것은 지나친 주문일까.

장달중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중앙시평] 남방정책 대 북방정책

[중앙일보] 입력 2011.01.13 
 
htm_2011011223490910001010-001.JPG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학
 
 
북한이 ‘새로운’ 남방정책에 시동을 거는 모습이다. 남북대화는 물론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에 부쩍 열을 올리고 있다. 대미(對美) 일변도로 치닫던 남방정책의 좌절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보인다.

 일본의 한 언론인은 대미 일변도의 북한외교를 가마우지 외교로 표현한 바 있다. 가마우지란 물고기를 잡을 때 낚시 대신 이용하는 새의 이름이다. 낚시를 이용하면 물고기를 한 마리씩밖에 낚아 올리지 못하지만 가마우지를 이용하면 줄줄이 낚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 구이린에 가면 강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가마우지가 물고기를 줄줄이 낚아 올리듯, 미국만 이용하면 남한과 일본은 줄줄이 딸려 올 것으로 보았다. 1993년 핵 위기 이후 오늘까지 북한의 남방정책은 이러한 대미 일변도의 가마우지 외교에 매달려 있었다.

 핵위기가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북한의 남방정책은 남한과 일본을 미끼로 미국을 낚으려는 낚시외교였다. 우리의 북방정책이 성공을 거두자 북한이 택한 정책이었다.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고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또 핵위기의 막간을 이용해 6·15 공동선언과 북·일 평양선언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된 핵위기는 이런 낚시외교를 작동불능 상태에 빠뜨렸다. 그러자 핵카드로 미국에 올인하는 가마우지 외교를 가동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북한이 이런 가마우지 외교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신년 공동사설에서 대결상태 해소, 대화와 협력사업을 강조한 데 이어, 정부·정당·단체의 성명과 조평통 담화를 통해 남북 당국 사이의 무조건적인 회담을 연일 제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계관 외무성 제1차관이 지난달 평양을 방문한 뉴멕시코 주지사 리처드슨 일행에게 말한 ‘포괄적인 세계전략’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줄이고 대신 남한과 일본을 공략하는 1990년대 초 김일성의 남방정책을 모델로 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김일성의 유훈외교 부활은 김정은 후계체제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김정은의 등장은 그 용모나 수법에서 할아버지 김일성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다. 우선 항일전에서 보여준 할아버지의 카리스마 같은 것을 연출하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연평도 포격으로 극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무릇 정치지도자는 호랑이를 사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북한판 테스트이기도 하다. 아버지 김정일이 KAL기 폭파를 통해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듯이, 김정은도 연평도 포격을 통해 이런 자질을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연평도 포격으로 남한의 정치지도자들이 호랑이를 쏘기는커녕 자신들의 발등을 쏘아대며 허둥대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군부를 장악하는 데 자신이 붙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예상된 그 다음 수순은 대화공세다. 그것도 할아버지를 모델로 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남북대화를 이용해 북·미, 북·일 관계를 풀려 했던 1990년대 초 할아버지의 남방정책이다. 왜 긴장 직후에 이런 절박한 대화공세를 펴는지 의아스럽다. 북한의 진정성을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진정성도 없이 대화에 임하는 행위를 되풀이해 온 북한이 아닌가. 그래서 정부가 시간을 두고 수용 여부를 결정하기로 한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대화테이블에 앉아 김정은 후계체제가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리처드슨 일행에 따르면 강성대국의 의미가 외무성과 군부, 그리고 최고인민회의에서 각각 다르게 통역되고 있는 모양이다. 무력적인 강함을 강조하는 군부에 반해, 외무성은 강하고 번성한다는 뜻으로, 최고인민회의는 번성과 번창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2012년의 의미를 둘러싸고 당·정·군 간에 일고 있는 복잡한 속사정의 방증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정을 봉합해 후계체제의 안정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은 아마도 할아버지의 유훈뿐일지도 모른다.

 이게 사실이라면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닐 것이다. 남북기본합의서의 복원을 우리 정부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이 서울에 올인하듯 우리도 평양에 올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우리의 북방정책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어야 하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북한이 쏟아내고 있는 대화공세가 어떻게 ‘행동’으로 나타날지 예의 주시해야 할 시점이다.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학

 

 

[중앙시평] CEO 정치로 난국 헤쳐갈 수 있나

[중앙일보] 입력 2010.12.23

결과주의에 매몰된 일방통행적
국정운영에 대한 냉소주의로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회복이
불가능해지는 사태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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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교수·정치학
 
 
이런 정치로 난국 타개는 어렵다. 이명박(MB) 대통령의 인사스타일이 세간의 우려를 불러일으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려할 일이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아 보인다. 안보스타일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킨 지가 엊그제인데, 지금 예산안 강행 처리로 정치가 실종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있는 군 인사에 대해 “이번 인사는 가장 공정했다”고 말하는 한편 예산안 강행 처리에 대해서도 “전체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되풀이되는 일방통행적 국정운영을 보면 보통 사람에게도 당연시되는 상식이나 판단조차 대통령에게서는 기대하기 어렵지 않나 하는 안타까움마저 느끼게 된다.

 한 외국 언론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모순투성이의 한국 정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연줄인사를 계속하면서 공정 사회를 외치는 모순, 병역면제자로 안보지휘부를 구성해 놓고 국민들에게 단합된 안보자세를 요구하는 모순, 정치 선진화를 외치면서 정치를 실종시키는 모순, 그리고 국민적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지지율이 올라가는 모순, 정말 한국 정치는 패러독스 그 자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미숙에서 오는 과도기적인 현상인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정말 궁금하다고 했다.

 아마도 이 궁금증에 대한 실마리는 대통령의 CEO 스타일 국정운영을 보면 얻어질 수 있지 않을까. 이 대통령의 국정철학은 결과주의다. 중요한 것은 정책비전이나 정책과정보다 결과를 통해 지지율 끌어올리는 것이다. 일하는 대통령의 모습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런 국정철학에 민심에 대한 두려움이나 배려 같은 것이 끼어들기는 쉽지 않다. 대통령도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나라당 내에서도 예산안 강행 처리가 “MB정권 몰락의 신호탄”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민의를 무시한 일방 통행적 정치가 어떤 업보를 가져올지 두려워하는 목소리다. 이를 알면서도 이런 국정을 계속 밀어붙인다면 MB정치의 한계는 분명해 보인다.

 오바마 대통령이 2007년 미국 대선에서 한 연설이 생각난다. “공약이 아무리 선량한 의지에서 나왔다 해도 결국은 워싱턴 정치에 희생되고 말 것이라고.” 국가적 사업인 양육수당을 팽개치고 실세들의 지역예산을 늘린 것을 보면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구조를 타파해야 할 대통령이 한나라당 돌격대 의원들에게 ‘격려전화’를 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내건 공정(公正)사회와 선진민주 국가라는 구호의 진정성에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돈의 중요성에 대해 17세기 오스트리아의 한 장군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전쟁에서 필요한 것은 세 가지다: 돈, 돈, 그리고 다시 한번 돈.” 장군이 이 정도인데 하물며 CEO대통령은 어떻겠는가. 국정운영에 돈이 중요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4대 강 사업과 같은 대형 프로젝트에 필요한 만큼의 돈을 제때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대통령의 업무수행을 판가름하는 잣대다. 그래서 대통령은 강행 처리를 통한 신속한 돈의 확보에 주사위를 던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국정의 성공은 얼마나 많은 돈을 확보하고 썼느냐에 있지 않다. 돈과 정치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잘 결합시켰느냐에 달려 있다. 돈과 정치의 가장 바람직한 결합은 다름 아닌 의회에서의 예산 심의와 처리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막스 베버는 바로 이러한 과정이 의회의 ‘통법부화’를 막고 민주주의를 활성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말했다.

의회라는 용어는 “말한다(talk)”에서 왔다. 그래서 의회정부는 영원한 대화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예산안 강행 처리는 의회의 이런 기능을 죽여 버렸다.

 루소가 영국 사람들에게 한 말이 생각난다. “영국 사람들은 모두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의원들을 선거할 때뿐이다. 선거가 끝나면 모두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루소의 말처럼 우리도 자유를 누리는 것은 선거할 때뿐인 것 같다. 강행 처리를 보며 우리가 뽑아준 의원들의 졸(卒)로 전락하고 있지 않나 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그러나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MB정권이나 한나라당의 앞날이 아니다. 결과주의에 매몰된 일방통행적 국정운영에 대한 냉소주의로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회복이 불가능해지는 그런 사태인 것이다. 국민과 언론에 의한 엄중한 권력 감시가 요구되고 있다. 국민이 졸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학
 

[중앙시평] 안보는 부업이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2010.12.02
htm_2010120200040510001010-001.JPG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학
“전장에서 육감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군복무 시절 베트남전을 다녀온 선배 장교들로부터 자주 듣던 소리다. 육감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전쟁영화를 통해서도 수없이 보아왔다. 육감에 의존하여 수레 위의 벼 다발을 칼로 찔러 숨어있던 첩자를 잡아내거나, 장례행렬의 관 속을 뒤져 엄청난 무기를 발견하는 것 등은 전쟁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장면들이다.

 왜, 그리고 어떻게 특정 사람들만이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누구도 분석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설명하기 어렵다. 그것은 육감으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미국 신문의 한 연구결과 보도에 따르면 육감의 트릭은 어디까지나 경험에서 얻어진 본능적인 직관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육감 없이는 전장에서의 초동 대처가 쉽지 않다는 점을 군 선배들은 입을 모아 지적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건설 현장에서 뼈가 굵은 사람이다. 육감적인 현장 대응의 달인으로 국민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왜 청와대와 우리 군은 그렇게 허둥대는 모습을 보여주었을까? 단순히 대통령 개인의 우연적인 실수 때문이었을까.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청와대와 군의 모습은 무언가 잘못된 우리 전체의 모습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그마에 시달려 온 우리 안보의 현주소를 반영하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진보정권 10년간 우리는 평화 도그마에 의해 안보가 부업처럼 취급당하는 것을 목격해 왔다. 그런데 현 정권은 어떤가. 경제 도그마에 따라 안보를 부업처럼 취급해 오지 않았는가. 성남 서울 비행장 근처에 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뤄진 롯데의 고층빌딩 신축 허가를 보라. 이런 도그마가 대통령의 안보인식을 손상시키고 육감적인 대응을 어렵게 했던 것은 아닐까.

 대통령이 북한의 도발에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대통령의 눈에 비친 북한은 이제 우리가 무엇을 도와주든 간에 사악한 일만 하는 괴물일 뿐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보복응징의 결의로 이런 북한의 재도발 의지를 꺾는 것이 현시점에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하지만 북한은 이미 숨어버렸다. 그 때문에 이런 결의는 천안함 때처럼 또다시 자기 선전적인 것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다.
왜 이런 자세가 되풀이될 수밖에 없을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부와 군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정치적 병리현상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현 정부의 핵심 안보진용에 병역면제자가 너무 많다. 외교·국방장관이 그만두기가 무섭게 미국으로 가는 나라다. 이들에게 한·미 동맹 외에 연평도의 현장감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청와대 지하 벙커에서 안보전략을 논의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초동 대처의 육감 같은 것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일지 모른다. 정부의 안보대책에 국민들의 심리적 거부감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현실 속에서는 응징 결의가 공허하거나 위험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안보는 흔히 산소에 비유된다. 산소가 없어지면 생명이 죽듯이 안보가 날아가면 나라가 망한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경고처럼 들린다. 지난달 많은 사람들이 주요 20개국(G20) 회의를 염려했었다. 혹시 북한의 방해가 없을까 하고. 그런데 국정원장이 “보다 큰 틀의 남북관계 시도”를 언급하고 나섰다. G20회의를 위해 남북 간에 모종의 안보협력이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G20회의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우리는 성취감에 들떴다. 자연 남북관계 개선의 모멘텀이 형성되는 것 아닌가 하는 기대가 뒤따랐다. 그런데 연평도 사건이 터졌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안보 부재 속에 금융이 제대로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정부가 몰랐을 리 없지 않은가. 정말 도그마에 빠진 정부라고밖에 달리 할 말이 있겠는가.

 물론 대통령이나 군의 입장에서 보면 좀 억울한 감이 없지 않을 것이다. 북한의 기습공격에 어느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청와대와 군은 아마도 “당신들이 우리 자리에 있었으면 어떻게 했겠느냐”고 내심 반문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정당한 반문일 수 있다. 그래서 해답이 필요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해답은 안보를 부업으로 전락시킨 지금까지의 도그마에 대한 성찰에서 찾아야 한다. 현명한 참모들을 기용하여 손상된 안보를 회복하는 일은 그 다음이다. 정권의 성패는 결과에 달려 있다. 결과 없는 안보 외침은 공허할 뿐이다. 이제 안보가 제자리를 찾아야 할 때다.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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