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숨죽인 곳, 성북동서 만난 월북작가 - 김용준(16회) 포함 >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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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954회 작성일 2007-10-31 09:43
세월이 숨죽인 곳, 성북동서 만난 월북작가 - 김용준(16회)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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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숨죽인 곳, 성북동서 만난 월북작가 이태준

 

 

일본강점기 명 문장가로 이름을 떨치던 작가 이태준(1904∼?). 몽양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과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던 그는 1946년 월북하면서 사람들 기억에서 잊힌다.


10만석지기로 불렸던 일본강점기 대부호 간송 전형필(1906∼1962). 전 재산을 털어 일본으로 빠져나가던 문화재를 사들였다.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첩(국보 135호), 고려자기로 모두 국보로 지정된 청자향로(국보 65호), 청자정병(국보 66호), 청자연적(국보 74호) 같은 유물들은 모두 당시 그가 사들인 것이었다. 그런 그를 후세 인들은 '문화 독립군'이라고 불렀다.


이들의 흔적을 서울에서 옛 정취가 가장 잘 살아 있다고 평가받는 성북동에서 볼 수 있다.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로도 유명한 성북동은 '아파트 공화국'인 서울에서 아파트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28일 서울문화재단은 '20세기 가장 멋진 우정을 나눈 최고의 모더니스트를 만난다-김용준 고택과 성북동 이태준 고택을 가다'를 진행했다. 이날 1년에 두 번만 문을 연다는 간송미술관 구경도 함께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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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평론가 최열씨가 서울문화재단이 마련한 '서울 속 미술유적 투어' 참가자들을 앞에 두고 간송미술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미술관 옆 동물원? 세월의 여유가 느껴지는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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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 1938년 문을 연 국내 최초 사립박물관이다.

오후 2시 매직펜으로 대충 휘갈겨 쓴 듯한 '간송미술관 전시장' 표지판 앞에 모인 30여 명의 사람들은 미술평론가 최열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운 채 열중하고 있었다. 서울문화재단이 마련한 '서울 속 미술유적 투어' 2007년 마지막 행사가 열리는 자리에서다.

 

"'인왕재색도'를 그린 겸재 정선은 잘 아시죠? 아마 심사정은 잘 모르실 겁니다. 동시대 인물인데, 심사정은 '중국풍이 심하다' 해서 낮게 평가된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식 그림을 주창한 정선과는 비교가 됐죠. 심사정 그림에 중국풍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압도적인 것은 아닙니다.

 

…미술관에 들어가면 촉으로 가는 길을 그린 '촉잔도권'이라는 기막힌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을 당시 간송 선생이 5천원을 털어 샀습니다. 어마어마한 돈이었죠. 하마터면 우리나라에서 영영 사라질 뻔했습니다. 총칼을 들고 싸우는 독립군도 있었지만, 간송과 같은 이는 문화독립군이라고 불러야겠죠."


오늘 안내를 맡은 미술평론가 최열은 한국근대미술사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한국현대미술운동사>(돌베개), <한국만화의 역사>(열화당), <사군자 감상법>(대원사), <화전>(청년사) 등 책도 여러 권 펴냈다.

 

간단한 설명이 끝나자 간송미술관으로 곧바로 들어갔다. 미술관 입구엔 '전시 기간 매년 5월 중순-말, 10월 중순-말'이라는 푯말이 서 있다. 미술관 입구에 있는 동물원이 눈길을 끈다. 닭, 토끼 같은 흔한 동물들이다. 근엄하고 위압적이지 않아 푸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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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 마당에 있는 돌부처. 아들을 바라는 어머니들이 얼마나 긁어갔는지 코가 없다.

1938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문을 연 사립박물관인 '간송미술관' 건물엔 세월의 때가 켜켜이 묻어 있다.

 

복도는 좁고, 쇠창틀에 유리가 끼워진 창문은 몇십 년 전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국보급 문화재와 세월의 때가 잔뜩 묻은 건물의 만남. 색다르다. 그리고 신선하다.


심사정, 강세황, 이광사는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 시간에 한 번쯤 들어본 이름들이다. 이름은 낯익지만 그림은 낯설다.

 

조선 그림을 평소 거의 보지 않은 무지함이 이런 데서 드러난다. 그림깨나 봤을 것 같은 관객들은 열심히 그림을 들여다보고 생각에 잠기지만, 나는 지루해서 도통 눈길이 머물지 않는다.


안개 자욱한 산과 들, 강에서 한가롭게 노를 젓는 사람, 신선이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은 계곡. '신선 동네가 바로 이곳'이겠거니 하는 느낌이 드는 그림들이다.

 

그림들을 사진에 담아서 나중에라도 보고 싶지만, 실내 촬영 금지다. 남들이 찍으면 따라서 찍었겠지만, 아무도 사진기를 꺼내들지 않는다. 수준 높은(?) 관객들 앞에서 차마 사진기 꺼낼 엄두를 못내고 열심히 그림만 기웃거렸다.


그림에 무지한 나에겐 마당이 훨씬 좋다. 대놓고 '못생겼다'고 평가한 삼층석탑이 재밌고, 아들 낳고자 하는 부인들이 얼마나 긁어댔는지 코가 아예 없는 부처상도 흥미롭다. 뛰어난 정원사가 솜씨를 발휘한 것 같은 마당 내 나무들도 눈길을 끈다. 여기저기서 사진기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관람시간 40분을 2분여 남기고 모이는 장소에 갔더니 나밖에 없다. 그림 감상이 지루했던 사람이 나밖에 없었나 보다.

 

이태준 고택, 그 옛날 선비정신이 느껴져

 

간송미술관에서 이태준 고택은 몇 발자국 되지 않는다. 골목이 잘 발달해 있고, 오래된 집들이 많은 성북동에선 도보 여행이 어울린다. 자동차를 타고 여행하는 것은 왠지 성북동엔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최열씨는 이태준 생가인 수연산방에서 1분짜리 설명을 한다.



"옛날 시골 할머니 집에 가본 분들은 그런 느낌을 받을 겁니다. 젊은 분들은 옛날 분들이 되게 불편하게 살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요. 긴 말 듣는 것보다 직접 들어가서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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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고택. 방에서 본 마당.
 
상허 이태준이 1933년부터 46년까지 14년간 산 수연산방은 지금은 찻집으로 쓰이고 있다. 마루에 올라서자 '삐걱'거리며 손님을 맞는다. 댓돌 위에 올린 방과 부챗살처럼 펴진 서까래가 무척 경쾌한 느낌이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아담한 마당과 마당보다 더 아담한 방이었다. 몸 잠깐 누일 공간만으로 만족했던 당시 사람들의 소탈한 성품이 느껴진다. 이보다 몇 배 더 큰 집에서 살면서도 '좁다'고 아우성인 요즘 세태에 비춰보면 공간 크기와 여유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최 측에서 "오늘이 마지막이니 참가자들에게 차를 돌리겠다"고 약속한다.

 

안방에 옹기종기 자리를 잡으니 여덟 명이 상 주위에 모였다. 얼굴을 맞댈 만큼 작은 방에 모여 앉으니 자연스레 서로에 대해서 묻게 된다.


- 이 자리엔 어떻게 오셨어요?
"주위에 문화재에 관심 있는 후배가 있어요. 후배 소개로 오게 됐죠."


-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
"국어교사예요.(주위에서 그럴 줄 알았다는 평가들로 수군수군)"


- 학생들한테 문화재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시겠네요.
"여학생들은 아주 반응이 좋아요. '우리도 다음에 데려가주세요'라면서 뜨거운 반응을 보이죠. 남학생들은 반대예요. 시큰둥해요. '수업 진도 나가자'고 하기도 하고.(남학생들이 좀 버릇이 없죠?) (웃음) 그렇진 않아요. 얼마나 귀여운데요. 말은 그렇게 해도, 속으론 좋아라 해요. 그런데 왜 저한테만 여쭤보세요. 다른 분들 이야기도 들어보시죠."


다른 한 일행은 직업이 카피라이터. 문화 유적 구경에 관심이 많아 서울문화재단이 25일 여성들만 대상으로 실시한 행사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이런 곳에 다니면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된다고.


무척 다정해 보이는 남녀가 있었다. 참가 동기, 관심 분야 등 몇 가지를 물어봤다. 남자는 신동호씨(28), 여자는 박원희(27)씨다. 처음엔 쑥스러워하더니 "처음 (사랑) 고백한 곳이 수연산방"이라고 묻지도 않은 말까지 털어놓는다.


"수연산방은 종종 와요. 오늘 간 간송미술관도 가본 적 있구요. 이렇게 문화유적지를 둘러보면서 가끔 데이트하는 편입니다.(향기 나는 데이트군요?) 아하, 그런가요? 사실은 뮤지컬처럼 공연 보러 더 자주 다니는 편이예요."(이 대화 뒤에 주위에선 '이번 기사 제목 나왔다'며 시끌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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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즐기고,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데이트를 즐긴다는 신동호, 박원희씨.
 

여행지가 아름다운 것은 그곳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실물만 보면 초라한 '퐁네프의 다리'가 유명한 것도, 조그만 뒷동산에 불과한 '몽마르트르 언덕'이 널리 알려진 것도 그곳에 얽힌 아름답고 슬픈 사연들이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퐁네프의 다리'보다 훨씬 더 예쁜 우리나라 다리가 덜 알려진 것이나, 반포동 서래마을에 있는 '몽마르트 언덕'이 관광지가 아닌 것도 사연이 없기 때문이다.


이태준 고택은 남과 북 모두에서 버림받은 빼어난 작가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고택 안에 있는 이태준 가족사진을 보며 해방 전후 지식인의 고뇌를 느껴보는 것도 좋은 여행이 될 듯싶다.


잊혀진 작가 김용준, 식민지 시절 미술비평 최고 논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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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준가에서 펼쳐진 김용준 슬라이드 강연.

이태준 고택을 나설 무렵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하나둘 우산을 꺼내는 모습을 보면서 '금방 그치겠거니' 생각하며 일행을 따라 걸었다.


오늘 마지막 목적지는 성북동 이재준가. 이재준가는 조선말 마포에서 젓갈장사로 큰 부자가 된 이종상의 별장이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이후 소설가 이재준이 살아서 지금 이름이 붙었다. 지금은 이곳에 있는 덕수교회가 사들여 깔끔하게 새 단장을 했다.


이곳에선 이태준과 동갑내기이자 친구로 식민지 시대 미술비평 분야 최고 논객으로 불린 김용준에 대한 슬라이드 상영이 펼쳐졌다. 최열씨는 각종 사진을 보여주며 1시간 동안 월북 예술가 김용준(16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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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창틀 사이로 본 이재준가.

"김용준(16회)은 1924년 중앙고보 5학년 때, 경복궁이 일제에 의해 파괴되는 모습을 보고 '건설이냐, 파괴냐'라는 작품을 내놓았어요. 대단했죠. 그러한 기개를 평가받아서 동아일보 사주였던 김성수씨가 일본 유학을 보내주었어요. 그 뒤 수묵화 등 우리 그림을 폄하하는 당대 풍토를 비판하며 치열하게 싸웠어요.

 

해방 후엔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과를 만든 장본인인데, 초대 총장으로 미군 장교가 부임한다고 알려지자 반대하며 사퇴를 해버렸어요. 이후 대중미술사의 고전으로 불리는 <조선미술대요>를 발표합니다. 월북한 뒤엔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했는데, 남과 북이란 관점이 아니라 한민족 개념으로 보면 그가 북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긴 것을 보고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최열씨는 김용준이 이태준보다 덜 알려졌다는 점을 감안해서인지, 아주 꼼꼼하게 설명을 했다. 김용준의 약력을 비롯 김용준과 부인이 어떻게 연애를 했는지, 김용준이 북한에서 어떻게 숙청당했는지, 김용준이 남긴 작품이 지금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등 내용이 1시간 동안 화려하게 펼쳐졌다.


1시간이란 시간도 어느새 훌쩍 지나가버리고, 밖에선 장마를 떠올리게 하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오후 5시를 조금 넘긴 시각에 벌써 주위가 어둡다. 참가자들이 우산을 쓰고 모두 돌아간 뒤에도 한참을 길가에 서 있다가,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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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칠 무렵 비가 많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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