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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건 조회 860회 작성일 2007-10-24 18:00
[뉴스메이커] 뺑뺑이 1기는 동문회도 못나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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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뺑뺑이 1기는 동문회도 못 나갔어요”

 

2007 10/30   뉴스메이커 747호

시험을 봤다면 니들이 어떻게 여길 들어오냐?
‘공부 못하는 세대'로 낙인찍힌 뺑뺑이들의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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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교육정책 공약이 교육계는 물론, 학부모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다. 대선을 불과 2개월도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지지율 50%를 넘는 후보의 공약인 만큼 현실화될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이 후보의 정책 공약 중 핵심은 자율형 사립고·마이스터고·기숙형공립고 등 300개의 특성화고를 육성하는 것이다. 이 같은 정책에 대해 일부에서는 고교 입시가 부활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놓았다. 하재근 ‘학벌없는 사회’ 사무처장은 “특목고 신설로 고교 평준화 제도가 상당부분 해체됐는데, 이 후보의 공약은 평준화를 완전히 해체하자는 주장과 다름없다”고 날을 세웠다.

고교 평준화 제도는 1974년 서울·부산에서 먼저 시작돼 우리 사회에서 30여 년간 지속해왔다. 1974년까지는 고등학교 간에도 서열이 엄연히 존재했다. 지금의 세대들이 서울대-연세대·고려대-서강대와 같은 대학 간의 서열을 뚜렷이 알고 있는 것처럼 당시 세대에게는 경기고-서울고·경복고-용산고와 같은 고등학교의 서열이 뚜렷하게 존재했다. 당시 서울고의 한 졸업생은 “중학교에서 입시 상담을 할 때 경기고를 갈 실력이 되지 않으면 다음으로 서울고를 권유했다”고 말했다. 서울의 다른 고등학교에도, 지방의 고등학교에도 서열의 계단이 있었고, 이 순위는 쉽게 바꿀 수 없었다.

“무시당하지 말자” 단합하기도

1974년 시험 없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이 1977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고교평준화 정책의 결과물이 그대로 드러났다. 단적인 예로 서울대 입학생의 출신학교 판도가 확 뒤집어지면서 평준화가 바로 ‘교육혁명’임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평준화 혁명’의 결과는 30년 동안 알게 모르게 한국 사회에 스며들었다.

1974년 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무시험 세대라고 해서 ‘뺑뺑이 세대’라고 불렸다. 뺑뺑이란 ‘숫자가 적힌 둥근 판이 돌아가는 동안 화살 같은 것으로 맞혀 그 등급을 정하는 기구’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다. 시험을 치르지 않고 추첨을 통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는 사실을 비하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뺑뺑이 세대에게는 ‘공부를 못하는 세대’ 또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혜택만 입은 세대’라는 낙인이 찍혔다.

특히 경기고·서울고·경북고·경남고 같은 옛 명문고의 비평준화 세대는 후배들에게 이 말을 자주 썼다. 이들 동문회에서는 ‘뺑뺑이 후배’를 후배로 인정하지 않았다. 평준화 덕분에 명문고에 입학한 후배들은 재학 중 선배와 선생님에게서 ‘실력이 없다’는 핀잔을 들었으며,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동문회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 같은 상황은 명문고일수록 더 심했다. 인터넷에서 경기고 동문회의 홈페이지 목록을 보면 73회 이후 77회까지 홈페이지 주소가 나타나 있지 않다. 경기고 72회가 비평준화 세대이며, 경기고 73회가 평준화 세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차별도 없어졌다. 경기고 79회 박신철 동기회장은 “당시에는 그런 것이 있었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경기고의 경우 강남 8학군에 들어가면서 지금은 선·후배 간에 그런 단절감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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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경기고에서 중학교 배정 추첨을 하는 모습.
서울·부산의 경우 ‘뺑뺑이 1기’는 1958년에 태어나 ‘58년 개띠’로 불렸고, 1974년 무시험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뺑뺑이 세대’라는 2개의 명칭을 얻었다. 대구·인천·광주에서는 다음 해인 1975년 평준화가 실시돼 1959년생이 ‘뺑뺑이 1기’가 됐다. 이들 1957년∼1959생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강’이 존재한다. 이들에게는 상대방이 뺑뺑이 기수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한 명문고의 비평준화 마지막 졸업생은 선배들을 만나 고등학교 기수를 말하면 “그래”라는 무덤덤한 반응을 얻는다. “선배님, 저희가 막내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여야 선배로부터 ‘제대로 된’ 후배 대접을 받았다. 여기서 막내란 비평준화 마지막 기수라는 표현이다. 이처럼 윗세대는 아랫세대가 ‘뺑뺑이 세대’인지를 확인했다. 아랫세대는 윗세대에게 ‘뺑뺑이 세대’인지 아닌지를 밝혀야 했다. ‘뺑뺑이 1기’의 개인적인 경험을 들어보면 평준화 세대와 비평준화 세대 간의 간극은 아직까지도 존재한다.

‘뺑뺑이 1기’인 홍익대 광고홍보대학원 전시교 교수는 지난 10월 14일 졸업 30주년 기념식을 모교인 경복고에서 가졌다. 경복고는 52회가 ‘뺑뺑이 1기’다. 52회 동문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전 교수는 “동기들 사이에 뺑뺑이 1기라고 무시당하지 말자라는 이야기가 나와, 1년 선배들보다 더 많은 돈을 모금해 이번에 모교에 기탁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학교를 다닐 때 동기들끼리 “실력으로는 경기고를 가야 하는데 뺑뺑이가 되면서 경복고에 왔다”라는 농담을 나누며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 전 교수는 “경복고는 다른 명문고와는 달리 선배들에게서 차별은 커녕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졸업하고 난 뒤 니네부터 뺑뺑이 1기라는 소리를 듣기는 했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사회에 나가서 알게 모르게 옛 명문고 시절 선배의 도움을 많이 받은 편이라고 토로했다. 전 교수는 평준화 정책이 발표된 중학교 2학년 이후에도 그대로 학원을 다녔다고 말했다. 고등학교에서는 고3 때 대학입시를 위한 우열반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역시 ‘뺑뺑이 1기’인 월간 미술세계 김상철 주간은 “당시 참고서인 완전정복 표지에 고등학교의 모표가 쭉 나열돼 자신이 가고 싶은 학교를 거기에다 표시했다”고 기억했다. 특별히 입시 준비는 하지 않았지만 머릿속에 명문고를 가야 한다는 의식이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평준화 정책이 발표되면서 책을 손에서 놓아버렸다고 한다. 김 주간이 ‘뺑뺑이’를 통해 입학한 학교는 당시 2차 선발 시험에서 신흥학교를 꿈꾸던 신일고였다. 경기고 시험에서 떨어진 학생들이 2차 선발시험에서 대부분 중앙고를 갔으며 신일고가 4∼5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명문을 꿈꾸던 신일고로서는 ‘뺑뺑이 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뺑뺑이 1기’들은 학교에 입학한 후 선생님에게서 “돌밭이라서 자갈 소리가 난다” “너희가 이런 제도가 아니었으면 감히 여길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 주간은 “어린 시절이었지만 우리들에게는 마음의 상처로 남았다”고 말했다. 성적 차이가 나는 학생들때문에 학교는 우열반을 나눴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동문회에서는 ‘뺑뺑이 세대’라고 인정받지 못했다.

58년 개띠 이미 우리사회 지도층

대구 대륜고 출신인 임규옥 변호사는 서울·부산보다 1년 늦게 평준화를 실시한 대구에서 ‘뺑뺑이 1기’다. 평준화를 실시한 덕분에 학원에도 다니지 않고 과외도 하지 않은 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임 변호사는 “특설반이 한 반 있었는데 거기에 들어간 학생들은 그래도 학교와 선배에게서 대우를 받았다”며 “평반과는 다른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임 변호사는 또 “당시 우리 기수가 서울대에 경북고보다 더 많이 입학했다”며 오랫동안 지켜온 경북고의 아성이 그때 무너졌다고 회고했다. 경북고 친구들이 선배들에게서 뺑뺑이 세대라고 홀대받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한나라당 정병국 의원 역시 ‘뺑뺑이 1기’로 독특한 경험을 했다. 정 의원은 원래 ‘비뺑뺑이 마지막 기수’였지만 , 1차·2차 선발시험에서 세칭 일류고에 입학하는 데 연거푸 실패했다. 그는 재수를 해서 ‘뺑뺑이 1기’가 됐다.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입학한 학교는 당시로서는 하위권이었던 서라벌고였다. 학생들은 스파르타식으로 교육을 받았다. 1학년때 이미 3학년 과정을 배워 선행학습을 했다. 정 의원은 “졸업 때 우리 학교가 전국 최고의 실력을 냈지만, 다닐 때는 학교에 대한 애정이 없었고 단순히 학원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비평준화의 마지막 기수인 양승실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위원은 “당시에는 무엇 때문에 공부하는지 모르고 공부했다”고 회상했다. 양 연구위원은 시험을 쳐서 들어간 이화여고에서 “뺑뺑이와 비뺑뺑이 간에 차별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선생님들은 ‘후배들을 가르치는데 수준이 달라 어렵다’며 토로하곤 했다”고 말했다.

서울·부산의 ‘뺑뺑이 1기’는 이미 50세의 나이에 이르렀다. 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공무원의 경우 2급, 3급에 해당하는 국장이 되었고, 법조계에서는 부장검사와 부장판사의 위치에까지 올랐다. 유시민 의원처럼 ‘뺑뺑이 1기’가 장관(보건복지부)직에 오른 경우도 있다. 이제 ‘뺑뺑이 세대’는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 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선택당한 ‘뺑뺑이’에 대해 이들은 어떤 부분에서는 비슷한 생각을, 어떤 부분에서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전시교 교수와 김상철 주간은 다양한 부류의 친구를 사귈 수 있었던 것을 ‘뺑뺑이의 미덕’으로 평가했다. 전 교수는 “뺑뺑이 이전에는 그 세대의 목표 의식이 뚜렷해 교수, 변호사, 공무원 같은 비슷한 직업이 많았지만, 우리 동기 중에는 여러 직업이 많다”며 “동문회에서 다양한 직업을 가진 동기가 어울리면서 훨씬 더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그 예로 이번 동문회 행사의 전야제를 동기의 바비큐 집에서 했다고 했다. 김 주간은 “동문회에 가면 여러 부류의 동기가 있어 역동성이 느껴지고 더 끈끈한 정을 느낀다”고 말했다.

‘뺑뺑이 세대’와 ‘비뺑뺑이 세대’의 경계에 속한 이들은 대부분 ‘뺑뺑이의 미덕’으로 권위주의의 타파를 들었다. 김상철 주간은 “비뺑뺑이 세대는 권위주의로 무장하면서 서열화를 만들었지만 뺑뺑이 세대는 융통성 있는 사고를 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 주간은 미술 전문가답게 ‘비뺑뺑이 세대’를 직선 세대로, ‘뺑뺑이 세대’를 곡선 세대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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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전기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는 학교 앞에 학부모들이 몰려 들었다.

“다양한 친구 사귈수 있어 좋았다”

‘뺑뺑이 세대’인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서울 숭문고 졸업)은 “참여정부가 2년차로 접어들면서 경제관료가 대부분 경기고 출신이더라”며 “아직도 그런 학벌 인맥이 남아 있긴 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비서관은 “뺑뺑이 세대가 공무원 사회에서 국장급이 되는 만큼, 폐쇄적 학벌 인맥이 사라지는 데 3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1957년생으로 비평준화 세대인 대구대 홍덕률 교수(사회학)는 평준화를 파워 엘리트 서열구조를 깬 긍정적인 제도로 평가했다. 홍 교수는 “과거 시험세대의 명문고 출신들은 사회 지도층이 되면서 특권·선민 의식을 갖고 있다”며 “이들이 후배들을 뺑뺑이 세대로 구별하는 것은 자신의 권위를 지키려고 하는 심리적인 반응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평준화 제도가 30년을 넘어서면서 ‘뺑뺑이 세대’는 자신의 자식들이 고등학교를 입학하는 현실적인 상황에 다시 접하게 됐다. 전시교 교수는 중학교 3학년인 자녀를 특목고에 보낼 계획이다. 전 교수는 “대학교처럼 자기가 능력껏 원하는 학교에 가야 하며 자기가 한 결과에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술 전공 특목고에 다니는 자녀를 둔 김상철 주간은 “평준화는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면서 “어릴 때는 공부보다 좀 놀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라고 말했다. 정태인 전 비서관은 “이제 대학 서열화도 없애야 한다”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정병국 국회의원은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정상적인 교육을 하는 고등학교는 뒤떨어진 학교가 됐고, 학교를 학원화하면 일류고가 되는 지금의 현실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정 의원은 “고등학교가 서열화돼서는 안 되지만, 하향 평준화의 문제점은 꼭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개발원 양승실 연구위원은 하향 평준화라는 것에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 양 연구위원은 “뺑뺑이로 하향평준화가 됐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면서 “영재 교육은 평준화의 문제가 아니라 대입제도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뺑뺑이는 박지만 때문에 생겨났다

뺑뺑이 세대의 이야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씨로부터 시작한다.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은 “박지만씨가 들어가기 전에 중학교, 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없애서 우리는 행복했다”고 말했다. 1958년생인 박씨가 중학교를 입학하기 한 해 전에 중학교 입학 시험이 없어졌다. 또 박 씨가 고등학교를 입학하는 1974년 평준화 제도가 실시됐다. 박 씨의 중·고교 입학에 한 해 앞서 또는 해당 연도에 입학 시험 제도가 없어지면서 당시에는 ‘박지만씨 때문에 중·고교 입시가 없어졌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박씨는 ‘뺑뺑이’로 중앙고에 입학했다. 중앙고는 2차 선발 학교였지만 경기고에서 떨어진 우수한 학생들이 대부분 입학한 명문고였다.

지난해 개띠해를 맞아 출판된 ‘58개띠들의 이야기’(화남 출판사)에서는 이 소문의 진상(?)이 일부 드러나 있다. 1958년생인 임백천이 이 책에서 자신의 경험을 글로 적었다.

“나는 몇 년 전 박정희 대통령의 ‘영식’이라고 불리던 박지만씨를 친지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나 지금은 서로 교분을 트고 지낸다. 그 역시 58년 개띠생이라 나는 그와 동류적 친밀감을 느꼈다. 서로 교분을 트며 친해진 뒤 어느 날 그에게 내가 학창시절에 들은 뺑뺑이 관련 소문(대통령 아들의 고교 진학 때문에 뺑뺑이를 실시하게 되었다는 그 소문)에 대해 시치미를 뚝 떼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자신도 그런 소문을 들었다면서 말했다. ‘그런 소문이야 나도 알고 있었지. 그런데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어, 진짜.’ 물론 소문은 소문일 뿐 사실이 아닐 수 있다.”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 담론의 사회정치적 성격에 관한 연구’(권대훈 저/한국교원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를 보면 당시의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권대훈씨는 ‘뺑뺑이’가 1972년 10월 유신에서 비롯했다고 주장한다. 박 전 대통령이 국민적 반감을 희석시키기 위해 평준화 정책을 강행했다는 것이다. 이해 12월 입시제도 연구협의회가 만들어지고 불과 3개월 만인 1973년 초에, 1974년부터 고교평준화를 실시한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공청회도 없었고, 당시의 시대 분위기 속에 어느 누구의 반발도 없이 평준화 정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피해자였던 사학에서도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뺑뺑이’는 정부가 국민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시혜적 차원에서 그렇게 ‘후다닥’ 만들고 시행했다.

양승실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위원은 평준화 정책을 성급하게 추진하긴 했지만 당시 사회적인 문제 때문에 실시했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양 연구위원은 무즙 파동을 언급했다. 1964년 12월 중학교 입시 문제 하나로 온 사회가 떠들썩했던 사건을 말한다. 양 연구위원은 “‘무즙 파동’에서 드러났다시피 중·고교 입시가 당시 과열됐다”며 “당시 농촌인구의 도시 이동, 사교육비 증가, 어린이들의 발육 부진 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없애기 위해 평준화를 실시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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