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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건 조회 862회 작성일 2007-09-08 09:58
"자신감 없으면 겸손도 없다" , 세계챔피언 홍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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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gif 전 프로복싱 밴텀급, 주니어페더급 세계챔피언 홍수환

"자신감 없으면 겸손도 없다"
이종길 기자 / 2007-09-07




홍수환은 자신의 이름을 건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수강생들에게 늘 자신감을 강조한다.
사진 송기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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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환은 세계챔피언을 두 번이나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를 자신감 때문이라고 말했다. 홍수환은 요즘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신감에 대해 강의한다. 자신의 이름을 건 체육관에서도 수강생들에게 늘 자신감을 강조한다.

8월 16일 서울 대치동 스타복싱체육관에서 만난 홍수환은 "자심감 하나로 세계챔피언이 됐던 내 경험을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홍수환에게 링 안팎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복싱계의 문제점에 대해 들었다.


1950년생이다. 6.25전쟁 때인데.

당시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신광교회 자리(현 서울 강남구)에서 태어났다. 생일이 5월 26일로 돼 있는데 사실 정확한 날짜는 아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포탄이 떨어지고 사방이 총소리여서 생일을 기억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계타이틀을 딴 날 미역국을 챙겨 먹는다.

부유하게 자랐다고 들었다.

아버지가 일본 중앙대학을 수료했을 정도로 엘리트셨다. 어머니 집안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알아주는 부자였다. 당시 귀했던 아이스크림을 한 번에 몇 개씩 드셨다고 한다(웃음).

아버지는 남쪽으로 내려와 황지(현 태백시)에서 탄광사업을 하셨다. 부족한 걸 모르고 자랐지만 아버지와 떨어져 지내야 했다. 1956년 강원도에 큰 눈사태가 났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줄 알고 놀라기도 했다.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듯 하다.

학구파였던 아버지를 보면 늘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기관지가 좋지 않으셔서 가래를 자주 뱉으셨다. 피부에 두드러기가 자주 나 버드나무 가지 끓인 물에 목욕을 하셨다.

함께 복싱 구경을 가기도 했나.

복싱을 좋아하셔서 경기가 있는 날이며 내 손을 잡고 육군체육관 야외 특설링(현 장충체육관)으로 향했다. 정복수, 이명근, 김준호 선수 등의 경기를 보았는데 돈을 내고 본 적은 없다. 김준호 선수가 우리 앞집에 살아 초대권을 줬다.

그때 복싱을 본 게 글러브를 낀 계기인가.

(잠시 생각에 잠기다)잘 모르겠다. 복싱을 하고 싶었던 건 초등학교 4학년 때 아우슈비츠 유태인 학살 영화를 보러 갔을 때다. 영화 시작 전에 잉게마르 요한슨과 플로이드 패터슨의 경기를 보여줬는데 '세상에 저렇게 멋진 경기가 있다니'라고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부모님께 복싱을 시켜달라고 졸랐나.

공부하길 바라셔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남대문시장 입구에서 미제 복싱 글러브를 발견했는데 가격이 2천 원이었다. 당시 2천 원은 요즘 30만 원 정도의 가치였다. 글러브를 사달라고 조를 때마다 공부나 하라는 핀잔을 들었다.

불안한 마음에 글러브가 잘 있는지 보러 7번 넘게 남대문시장에 갔다. 나중에 주인 아저씨가 사지도 않을 거면서 왜 자꾸 오느냐고 면박을 줬다. 그 아저씨, 그 꼬마가 훗날 세계챔피언 홍수환이란 걸 알았다면 지금은 뭐라고 하실지 궁금하다(웃음).

반대가 심했다는데 어떻게 복싱선수가 됐나.

반대하시던 아버지께서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김준호 선수 아들인 (김)택구를 만나 복싱장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택구와 스파링을 하면 매번 얻어터졌다.

사실 글러브를 낀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어렸을 때 보았던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그러다 내 가슴에 불을 붙이는 일이 벌어졌다.

그게 뭔가.

김기수 선배가 1966년 6월 25일 장충체육관에서 니노 벤베누티(이탈리아)를 판정으로 누르고 WBA 주니어미들급 챔피언이 됐다. 경기도 멋졌지만 서울시청 앞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는 걸 보고 나도 저 자리에 오르겠다고 결심했다.

그때 김선배는 스타였다. 최고 인기배우였던 김지미와 함께 ‘내 주먹을 사라’라는 영화에도 출연했다. 국내에 복싱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시작이 좋진 않았다고 들었다. 아마추어 첫 경기인 서울시학생선수권대회에서 졌다고 하던데.

원주에서 열린 두 번째 대회에서도 졌다(웃음). 질 수밖에 없었다. 김기수 선배의 폼을 따라 하는 데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다. 김선배는 오른손잡이지만 경기에서는 왼손을 주무기로 썼는데 이마저 따라 했다.

수그리는 자세를 인정하지 않는 아마추어에서 프로처럼 웅크리는 자세를 취해 벌점도 자주 받았다. 그러자 김준호 관장께서 프로로 전향하자고 말씀하셨다.

프로 데뷔 날짜가 기억나나.

어찌 잊어버릴 수 있겠나(웃음). 1969년 5월 10일이다.

경기결과가 무승부였는데.

김상일 선수와 싸웠는데 진 경기였다. 서울에서 열린 경기여서 지방 선수와의 경기에서는 홈링의 이점이 있었다. 첫 경기를 끝내고 복싱을 계속 해야 하나 고민했다. 링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세계챔피언이 될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자신감을 갖게 됐나.

최창배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 한 대도 맞지 않고 때리기만 했다. 김준호 관장님이 푸트워크를 잘 했다고 칭찬했다. 자신감이 생기니까 다음 경기부터 승승장구했다. 박영섭, 주홍택, 최용태, 백낙기를 차례로 꺾었다.

복싱에 전념하게 된 이유가 있다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한순간에 집안이 어려워졌다. 어머니는 미군부대 식당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부족한 걸 모르고 자라다 어려운 환경이 닥치자 집안을 일으켜야겠다는 마음이 불쑥 생겼다. 어머니가 쟁반을 들고 반찬을 나르는 모습 자체를 인정하기 싫었다.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데.

어렸을 때 아버지가 강원도에서 따로 사셔서 그런 것 같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상’이셨다. 엄격하면서도 자상하셨다.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복싱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아서라고 생각한다.

어려운 시기에 도와준 분이 있다면.

김준호 관장님 집에서 합숙할 때 ‘쇼토 아저씨’라는 분이 계셨다. 부평에서 정육점을 하던 분이었는데 경기를 앞두면 늘 고기를 먹게 해주셨다. 그 아저씨 덕에 영양보충을 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무엇을 먹고 운동했나.

고기는 구경도 할 수 없었다. 밥 위에 버터와 간장을 비벼 먹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남들보다 나은 편이었다.

그때 국산 삼강 마가린은 뜨거운 밥에 넣어도 녹지 않아 맛이 없었는데 난 (미군부대 식당 일을 하셨던)어머니 덕분에 최고의 반찬인 미제 버터를 먹었다. (잠시 생각하다)지금 생각해보니 내 주먹의 원천이 버터였다는 게 놀랍다(웃음).

홍수환이 일본의 가사하라 유에게 다운을 뺏은 뒤 의기양양해 하고 있다.
사진 제공=홍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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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전 5기의 영광

해외 원정경기를 자주 했는데.

홀로 낯선 땅에 서있으면 그때만큼 외로울 때가 없다. 일본에서 가와사키 앞바다를 바라보며 남진의 노래를 듣고 앉아서 운 적도 있다. 아버지 없는 설움 때문이었다.

복싱선수는 끓어 오르는 무언가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 부모 사랑을 다 받은 선수가 챔피언이 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마이크)타이슨도 엄마, 아빠 얼굴을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1974년 7월 WBA 밴텀급 타이틀을 놓고 아놀드 테일러와 맞붙었는데.

테일러가 쉽게 방어전을 치르기 위해 나를 지목했다. 테일러는 당시 세계랭킹 2위였던 나를 우습게 봤다. 펀치력도 별로라고 생각했고 한국이란 나라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조지 파나사스 프로모터가 바로 타이틀 매치를 주선했다. 그때 국내 반응은 시큰둥했다. 나를 따라온 언론은 MBC라디오 하나뿐이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까지 가 경기를 치렀는데.

도쿄와 홍콩 등 5곳을 경유해 30시간 만에 더반에 도착했다. 녹초가 됐다. 날씨는 덥고 몸은 지쳐 힘들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럴 때마다 헝그리 정신으로 이겨내자 마음 먹었다. 테일러 녀석을 죽여버려야겠다는 생각 외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당시 호텔 사장이 많은 정보를 알려줬다고 하는데.

테일러가 치른 모든 경기의 필름을 보여줬다. 자신의 호텔을 광고하기 위해서였다. '도전자가 이것에 숙박했어요'라는 간판을 호텔 밖에 걸어놓으면 더 많은 손님을 끌어 모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웃음).

필름을 자세히 보며 전략을 세웠다. 테일러는 스트레이트가 좋아 요리조리 피하면서 몸 쪽으로 조심스럽게 파고 들기로 했다.

SPORTS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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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은 주효했나.

그랬다. 팔을 휘젓다가 뻗어서 '작은 알리'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테일러가 계속 다운되는데 나중에는 불쌍해서 더 이상 못 때리겠더라. 악착같이 덤벼야 흥이 나는데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한국인 관중도 있었나.

더반항에 들어온 원양어선 선원 20명이 경기장을 찾았다. 남아공 응원단에 전혀 위축되지 않고 응원했다. 만 명이 넘는 관중보다 이분들이 더 튀었다. 욕을 퍼부으면서 열정적으로 응원했는데 알아듣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었다(웃음).

“엄마, 챔피언 먹었어”와 “대한국민 만세다”라는 모자(母子)의 대화가 엄청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경기가 끝나고 정신 없는 상황에서 MBC라디오 PD가 서울과 전화를 연결했다. 많은 분이 듣고 있는 방송인지 몰랐다. 어머니와 통화인 줄만 알았다.

많은 분들이 듣는 방송인지 알았다면 훨씬 점잖게 이야기했을 거다(웃음). 그 한마디로 어머니는 최고의 스타가 되셨다.

타이틀을 따고 기분이 어땠나.

챔피언 벨트를 보며 '죽도록 고생한 게 이것 때문이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쓸쓸해졌다. 그러나 문교부장관의 축전을 받으며 슬슬 입가에 미소가 생겼다.

진짜 기뻤던 건 한국에 돌아와서였다. 비행기에서 공항을 내려다보니 새까맣게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나 때문에 모인 사람들이었다.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 앞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김기수 이후 6년 2개월 공백을 깬 챔피언이라 더 많은 환호를 받지 않았나.

그것도 그렇지만 일등병 신분이라 더 주목 받았다. 어머니와 함께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박대통령은 체육관을 차려주겠다는 말까지 꺼냈다. 그러나 한 달 뒤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셔서 없던 일이 됐다.

1977년 11월 파나마 원정경기에서 WBA 주니어페더급 챔피언이 돼 한국복서로는 처음으로 2체급 정상에 올랐다.

상대인 엑토르 카라스키야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17살이었지만 11전 11KO승을 기록할 정도로 무서운 성적을 자랑했다. 카라스키야는 4라운드 이내에 결판을 냈다. 국내에서 나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라스키야의 주먹을 맞고 여러 차례 다운됐다.

이승엽이 홈런을 때릴 때 나는 소리처럼 짜릿했다(웃음). 그만큼 아팠다는 이야기다. 주먹이 날카롭고 정확하게 들어왔다. 앞서 싸웠던 선수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 경기에서 '4전5기' 신화를 썼다.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었나.

다운될 때마다 관중들이 크게 소리를 질러 나도 모르게 오기가 생겼다. 악으로 일어났던 것 같다. 다운되기는 했지만 경기 초반이라 바로 일어날 수 있었다. 6라운드나 7라운드에 넘어졌다면 일어나지 못했을 거다. 그때 컨디션이 최상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두 번씩이나 원정경기에서 챔피언 벨트를 땄지만 1978년 5월 국내에서 허무하게 타이틀을 내줬다.

한국권투위원회(KBC)와의 갈등이 큰 이유였다. 파나마 원정에서 챔피언 벨트를 딸 수 있었던 건 최근호 매니저가 성실했기에 가능했다. 최근호 매니저는 다음해 2월 일본의 가사하라 유와 방어전을 주선하기도 했다.

그런데 KBC에서 2차 방어전부터 매니저를 바꾸라고 지시했다. 혼란스러웠다.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과 할 수 없는 현실이 싫었다. 화가 나 경기 3일을 앞두고 최근호 매니저가 프로모터를 안 하면 챔피언 타이틀을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결국 두 명이 공동으로 프로모터로 나섰는데 나는 훈련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였다.

리카르도 카르도나와의 방어전에서 1회부터 얼굴이 피투성이가 됐다.

카르도나가 1라운드에서 고의적으로 눈 위를 찢었다. 피가 흘러내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사실 카르도나보다 권투위원회에 대한 화가 더 많이 났다. 링 위에서 헤매는데 어떤 사람은 날 보고 비웃기까지 했다.

선수 이후

카라스키야를 TV 프로그램에서 21년 만에 만났는데.

KBS의 '도전, 지구탐험대' 프로그램을 찍으면서 파나마에서 만났다. 오지탐험을 함께했는데 나를 보자마자 얼싸안으며 반겼다. 자기가 나를 얕봐 졌다고 말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고 했다.

은퇴한 뒤 KBS와 인천방송에서 해설을 했다.

전임 해설자가 개인적인 일로 그만 두게 돼 마이크를 잡게 됐다. 은퇴하면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이 해설이었다. 복싱 해설자 가운데 오일영씨를 가장 좋아했다. 그의 해설을 들으면서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왜 그만뒀나.

체질에 맞지 않았던 것 같다. 바른말을 하면 건방지다는 얘기도 있었고. (한참을 생각하다)말 못할 이유가 있다.

현재 강의를 하고 있는데.
홍수환은 복싱인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사진 송기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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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해설을 하면서 만난 (남)동우 형(현 삼척 시장)이 강의해 볼 것을 권유하면서 시작하게 됐다. 벌써 11년째다.

처음에는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하는 것만으로도 어려웠다. 한 번 하고 더 이상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덧 복서 현역 시절보다 더 긴 시간을 강의하고 있다.

강의의 주된 내용은 무엇인가.

정신으로 육체를 깨우자는 것이다. 가령 '연습하자', '놀자', '쉬자'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을 때 정신력으로 이 비율을 조절하라고 강조한다.

몸을 움직여 실천에 옮기는 자만이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싱 연습 안 하고 챔피언이 되는 선수는 없지 않은가.

체육관도 운영하고 있는데.

수강생들에게 인기가 높아 지관을 5개로 늘렸다. 대부분 다이어트 효과 때문에 체육관을 찾는다. 운동이 비타민만큼이나 필요한 시대라 그런 것 같다.

아무리 바빠도 보름에 한 번씩은 각 지점에 들르고 있다. 앞으로 일본과 베트남 그리고 미국 LA에 지관을 내는 게 꿈이다.

체육관이 한국권투위원회에 등록돼 있지 않은데.

일부러 하지 않았다. 프로선수를 키울 수 없지만 상관없다. 설립 때부터 사회체육 쪽에서 복싱의 저변을 넓히려고 만든 거다. 많은 사람들이 복싱을 배우고 사랑할 수 있는 공간이라면 그걸로 만족한다.

최근 전 WBC 페더급 챔피언 지인진이 K-1으로 이적하며 프로복싱 위기론이 다시 일고 있다.

프로복싱의 위기는 이미 장정구, 유명우, 문성길 이후 시작됐다. 고칠 점이 있다면 고쳐야 한다. 가장 먼저 계약금의 투명화부터 이뤄야 한다. 선수와 매니저 간 갈등의 시초는 대부분 돈이다.

민감한 부분을 없애 나가야 한다. (잠시 머뭇거리다)사실 이번에 (지)인진이에게 많이 실망했다. '고려한백'에 부탁해 연습비만 한 달에 500만원을 받도록 했는데 왜 복싱인 전체를 싸잡아 나쁘다고 말했는지 모르겠다. '개 같은 챔프였다'와 같은 말은 사회사업을 하는 기업인들에게 좋게 비쳐질 리 없다.

복싱인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뭉쳐야 할 때인데 싸우고 있다. 이러다가는 사회로부터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문제가 있으면 복싱인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처음 복싱을 시작했을 때 체육관 벽에 '사람이 먼저 되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홍수환
1950년 5월 26일 서울 출생
서울 수송초-중앙중-중앙고
1974년 WBA 밴텀급 챔피언
1977년 WBA 주니어페더급 챔피언
프로통산 49전 40승(13KO)5패4무


SPORTS2.0 제 66호(발행일 08월 27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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