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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중앙고보 18회 졸업앨범(1927년 3월 졸업) 기증식이 5월24일 오후 3시에 열렸다.
중앙고보(현 중앙고등학교) 18회는 1923년 6·10만세운동을 주도해 대한민국 독립 운동에 공헌이 큰 졸업생들이다. 기증된 18회 졸업앨범은 작고한 이민휘 교우가 갖고 있던 것으로 아내인 김경례 여사가 보관하고 있었다.
앨범에는 졸업생 66명의 사진이 있었는데 이중 절번에 가까운 31명은 경찰에 붙잡혔다가 재판에 넘겨지지 않고 졸업했다. 이민휘 교우도 종로3가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제 경찰에 붙잡혀 졸업앨범에서 그의 이름을 찾지 못했다. 역시 1년형을 살았던 주모자 이선호, 박용규, 이동환 교우과 나중에 동맹휴학을 주도해 제적 당한 조홍제(18회) 효성 창업주의 개인 사진도 없었다.
18회 졸업앨범은 복제품 제작 및 스캔을 거쳐 중앙학교역사관에 전시 또는 보관될 예정이다.
기증식에 참여한 이 교우의 넷째 아들인 규승 선생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앨범이니만큼 기념사업회와 후세의 독립운동 교육에 의미있게 활용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가족끼리 논의한 결과 사적인 보관보다는 6·10만세운동의 의의가 큰 중앙교우회,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 중앙학교에 기증하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라종일(50회) 6·10만세운동 기념사업회장은 “졸업앨범을 보니 18회 선배님들과 6·10만세운동의 뜨거운 독립운동의 숨결이 느껴져 감격스럽다”며 소감을 밝혔다. 채정석 교우회장은 “일제 강점기 시절, 94년이 지난 졸업앨범이지만 디자인이나 레이아웃이 지금 봐도 손색이 없이 완성도가 높은 걸 봐서 우리 선배님들의 높은 안목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며 “선배님들의 독립운동의 뜻을 후학들이 마음에 새길 수 있는 귀중한 장서 기증에 중앙교우를 대표해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고 밝혔다.
<참고 : ‘중앙중·고등학교100년사’ 제11장에 나오는 6 ․ 10독립만세운동과 중앙고보>
8시30분경 장의행렬이 종로3가 단성사 앞을 통과할 무렵 동양루(東洋樓・지금의 피카디리 극장 앞) 쪽에 도열해 있던 중앙고보 학생들의 봉도 열중에서 중앙고보 5년생 이선호(李先鎬)가 도로 중앙으로 뛰어나오면서 손에 들고 있던 한 뭉치의 ‘격문’을 뿌리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조선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이선호의 선창이 있자 박용규(朴龍圭), 이동환(李東煥), 류면희(柳冕熙), 조홍제(趙洪濟), 임종업(林鍾業), 이현상(李鉉相), 최제민(崔濟民), 권태성(權泰晟) 등이 대열 앞으로 나서서 ‘격문’을 뿌리며 ‘조선독립만세!’를 계속 외쳤다.
이때 일제 경찰은 이선호를 먼저 체포 결박하여 트럭에 싣고 갔는데, 이선호는 트럭에 실려 가면서도 묶인 양손을 치켜들며 연신 만세를 부르니 이를 본 중앙고보생들이 모두 이에 호응해서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당했다. 현장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일제 경찰에 쫓겨 달아났던 중앙고보생 다수는 후일 추가로 체포되었다.
당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던 중앙고보생의 명단은 앞에 거론한 9명 이외에 69명 등 거의 100여명에 이르렀다. 즉 앞에 거론한 이선호 등 9명 외에 강병도(姜炳度), 강정선(姜廷善), 계용순(桂瑢淳), 계익정(桂益禎), 고명신(高明信), 공원회(孔元檜), 권상룡(權祥龍), 권유근(權遺根), 김귀갑(金貴甲), 김규만(金逵滿), 김규순(金圭淳), 김상은(金相殷), 김성동(金聖東), 김성태(金性太), 김영길(金榮吉), 김영순(金永淳), 김영환(金永煥), 김장춘(金長春), 김종계(金鍾契), 김진기(金鎭器), 김태호(金泰浩), 김형양(金亨亮), 김홍신(金洪信), 남영희(南榮熙), 류복형(柳福馨), 문인근(文仁根). 박광옥(朴光玉), 박덕규(朴德圭), 박도근(朴道根), 박봉석(朴奉石), 박선석(朴善錫), 박승윤(朴勝允), 박용완(朴容完), 박찬식(朴燦植), 박칠복(朴七福), 박형식(朴瑩植), 백호제(白浩濟), 송종운(宋鍾韻), 신기창(申基昌), 신재항(辛在恒), 안민식(安敏植), 안왈봉(安曰鳳), 오근태(吳根泰), 이규석(李奎錫), 이길수(李吉洙), 이동환(李東煥2년생) 이민휘(李民徽), 이여안(李汝安), 이영갑(李永甲), 이은종(李殷鍾), 이재민(李在敏), 이철재(李哲宰), 이한영(李漢永), 이홍영(李洪永), 임원성(林元星), 장우식(張佑植), 장일정(張日正), 장재헌(張在憲), 정낙현(鄭樂鉉), 정달영(鄭達永), 정민환(鄭珉煥), 정수영(鄭壽永), 정종근(鄭鍾根), 차두삼(車斗三), 최삼준(崔三俊), 최중호(崔重浩), 최창기(崔昌耆), 최형련(崔炯鍊), 하봉길(河奉吉) 등이다.
순식간에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주위의 봉도민들까지 호응하였으니 오랫동안 숨을 죽이며 준비해 왔던 6․10독립만세운동의 봉화는 하늘 높이 치솟았다. 이때 중앙고보 체육교사로 민족의식이 강렬했던 조선소년군의 창시자 조철호(趙喆鎬) 교사는 이동환으로부터 거사계획을 듣고 학생들의 도열순위를 이동환의 요청대로 편성해 주었고, 현장에서 학생들을 선동하다가 구속되기도 하였다.
맨 아래 사진은 아랫줄 왼쪽부터 이규승(넷째 아들), 라종일(6·10만세운동 기념사업회장), 채정석(중앙교우회 회장). 윗줄 왼쪽부터 이방용(이규화(45회, 둘째아들) 교우의 아들), 이규준(다섯째 아들), 정해영(71회, 중앙교우회 사무부총장), 이승철(66회, 6·10만세운동 기념사업 상임이사), 정상혁(70회, 중앙교우회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