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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가요>
<선만일체(鮮滿一體)의 친일가요>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고 마침내 위성국가 만주국을 세워 중국 식민지화의 발판으로 삼았다.
한국에 이어 중국까지 군국주의, 제국주의의 마수를 뻗친 것이다.
대동아 공영권(大東亞 共榮圈)을 앞세워 차례차례 아시아 전 지역을 식민지로 침탈하고, 마침내 1941년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세계 제패의 야욕을 드러냈다.
이러한 와중에 전쟁 병참기지가 된 조선은 전쟁을 치루기 위해 갖은 물적, 인적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가수를 포함한 연예인들도 이러한 전시체제에 동원되어 군국주의를 옹호하고 전쟁을 격려하는 선전선동(agipro)의 나팔수로 동원되었다.
대동아 공영권, 일시동인(一視同仁), 동조동근(同祖同根) 등 소위 황도(皇道)예술, 총후(銃後)예술의 임무를 떠 맡아야 했다.
특히 선만일체(鮮滿一體), 오족협화(五族協和)라는 기치 아래 전개되던 만주국 식민정책을 옹호하고 선전하는데 많은 연예인들이 동원됐다.
1940년부터는 아예 가수나 연극, 영화인들은 일제로부터 공연예술 허가증인 ‘기예증(技藝證)’을 받아야 했고 그 만큼 철저한 감독과 통제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기예증은 가요 뿐 아니라 영화, 연극, 국악 심지어 서커스 단원까지 1년에 두 번씩 자격심사를 거쳐 부여했다.
학과시험과 실기시험으로 나누어 평가했으나 사상시험도 있었다.
주제는 ‘전시체제 하의 국민의 각오’같은 것이었다.
여기서 사상불온으로 낙인찍히면 그 자리에서 불합격이었다.
학과목이나 실기보다 사상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물론 그 사상은 황국 신민사상이었다.
1941년에는 기존의 ‘조선연극협회’와 ‘조선연예협회’를 통합하여 ‘조선연극문화협회’로 단일화 하여 통제를 더 엄격하게 강화했다.
매월 소속된 회원들을 집합시켜 사상교육과 궁성요배 행사를 거행했다.
궁성요배는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90도로 경례하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연예부대’ 혹은 ‘이동연예대’를 결성하여 전후방을 순회하며 전쟁을 독려하는 공연을 펼쳤다. 그야말로 전쟁의 선전도구, 나팔수가 된 것이다.
초기에는 한국어로 노래했지만 후에는 완전히 일본군가나 일본가요만 불러야 했다.
1937년에는 ‘유행가’라는 말이 퇴폐적이고 세속적이라 해서 ‘국민가요’로 부르도록 규제했다.
건전가요, 국책가요로 가기 위한 통제였다.
댄스곡인 ‘째즈송’도 이때부터 규제 대상이 된다.
1943년에는 적국인 영국과 미국의 노래들을 ‘적성(敵性)음악’으로 금지시켰다.
물론 이태리, 독일은 같은 주축국이었기에 제외됐다.
외국노래까지도 적국과 아국을 가리는 진영론이 지배했다.
이처럼 1940년 전후는 그야말로 한국가요의 암흑기였다.
특히 만주국이 세워진 1937년 이후의 가요들은 그야말로 만주천국을 노래하는 만주찬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미 일제는 만주사변을 치룬 후 1933년 만선일여(滿鮮一如)를 표방하고 1934년 본격적으로 만주이민 정책을 시행했다.
만주국이 살기 좋은 땅이라는 본격적인 정책홍보에 나섰다.
그 홍보에 앞장선 것이 대중가요였다.
만주야 말로 지상천국임을 강조하며 만주이주를 장려하는 선전선동의 노래들이 줄을 이었다.
일제는 만주국을 세웠으나 실질적인 지배와 군량미 비축을 위해서 조선인들의 강제이주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주찬가를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친일가요들은 대체로 행진곡 및 군가풍의 노래와 트롯이나 신민요풍의 노래로 대별된다.
<혈서지원>, <결사대의 아내> 등은 행진곡풍이고, <목단강 편지>, <정든 땅> 등은 트롯풍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일제 말기인 1940년 전후해서 친일가요가 아닌 일반가요에서도 행진곡, 군가풍의 장조(長調) 노래가 급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감격시대>(1939), <동트는 대지>(1939)는 완전히 행진곡 풍이고, <나그네 설움>(1940), <아주까리 등불>(1941), <찔레꽃>(1942), <번지 없는 주막>(1940) 등은 슬픈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장조를 써서 건전가요를 흉내내고 있다.
단조(短調) 일색인 트롯에서 일제 말기에 들어 장조 노래가 급증한다는 사실은 단조 트롯의 애상성을 벗어나 희망과 용기를 주는 시대 풍조가 반영된 것이다.
물론 그 희망과 용기는 황국신민을 위한 것이다.
대표적인 곡이 1941년 백년설이 부른 <복지만리>다.
<복지만리>는 같은 제목의 영화 주제곡이다.
이 영화는 선만일체(鮮滿一體) 사상을 선전하기 위해 김영수가 쓴 극본을 토대로 전창근 감독이 만든 국책영화다.
대동아 공영권을 실현하기 위해 만주이주를 권유하는 영화로 만주가 지상낙원이고 복지만리(福地萬里)임을 강조하고 있다.
일제가 내세운 오족협화의 이상촌을 건설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3절은 아예 일본어로 되어 있어 친일가요의 속성을 분명히 드러낸다.
<정든 땅>도 3절은 일본어로 되어 있다.
"달 실은 마차다 해 실은 마차다
청대콩 벌판 위에 휘파람을 불며 불며
저 언덕을 넘어 서면 새세상의 문이 있다
황색기층 대륙 길에 어서 가자 방울소리 울리며"
-백년설, <복지만리>
이처럼 <복지만리>는 그야말로 만주땅이 새세상의 문이요, 새천지의 천국임을 강조하고 있다.
만주 땅이 ‘백마가 달리던 고구려 쌈 터’로 묘사하여 그곳이 본래 조선땅임을 강조하고 있다.(생략 부분)
듣는 이로 하여금 애국심을 자극하여 옛 조선땅인 만주로 이주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
1941년 태평양 레코드사에서 나온 노래는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5만 장이나 팔리는 흥행을 거두었다.
"흥안령 마루에 서설이 핀다
사천만 오족의 새로운 낙토
얼럴럴 상사야 우리는 척사
(후렴)
아리랑 만주가 아리랑 만주가
이 땅이라네"
-백년설, <아리랑 만주>
백년설이 부른 <아리랑 만주>(1941)다.
우리 민족의 노래 <아리랑>이 만주벌판에 낭낭히 울려 퍼지고 있다.
그래서 아예 노래 제목부터 ‘아리랑 만주’다.
만주를 가로 지르는 흥안령 마루와 송화강 천리에 새봄처럼 새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 시대는 바로 노래에 나오듯이 ‘오족낙토’의 신시대다.
일제가 만주국을 세우면서 펼친 ‘오족협화(五族協和)’, ‘왕도낙토(王道樂土)’ 사상이 노래 속에 그대로 녹아있다.
그야말로 이 노래는 만주국을 찬양한 관제(官制)가요요, 국책(國策)가요인 셈이다.
5족은 만주족, 일본족, 조선족, 한족, 몽골족을 의미한다.
이들이 협화하여 이상국가인 왕도낙토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그밖에 ‘고향이 따로 있나 정들면 고향’이라고 만주를 제2의 고향으로 노래한 <정든 땅>( 백년설, 1943), 만주의 목단강으로 이주하여 성공한 오빠의 편지를 받고 감격해서 잠을 못 이룬다는 내용을 담은 <목단강 편지>(이화자, 1942), 만주로 이주해서 낮이면 농군이 되고 밤이면 책을 읽으며 성공의 길을 찾아가는 아들이 안심하라고 위로하는 <어머님 안심하소서>(남인수, 1943)가 대표적이다.
<목단강 편지>에서는 아예 ‘난초 피는 만주 땅에 흙이 되소서’ 라고 호소하고 있다.
아예 만주 땅에 일신을 바쳐 생을 마감하라는 뜻이다.
<만주신랑>(송달협, 1942)은 만주 땅에서 ‘새사랑, 새태양’의 신랑이 되어(1절), ‘새사주, 새역사’ 창조에 앞장 서서(2절), ‘새살림, 새나라’의 주인공이 되라고(3절) 노골적으로 선동하고 있다.
<행운의 밤차>(박세환, 1938)는 ‘흘러서 닿는 곳이 우리들의 새 고향/ 밤차야 어서 가자 새 고향을 찾아서’ 라고 노래하여 만주 땅을 희망에 찬 새 고향으로 찬양하고 있다.
조국땅이 낙후된 ‘헌 고향’이라면 만주 땅은 앞으로 우리가 정착해야할 파라다이스, 곧 ‘새 고향’인 것이다
그밖에 노골적인 만주찬가는 아니지만 만주를 떠도는 유랑과 방랑가, 이국정서와 향수를 자극하는 노래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영화 <반도의 봄>(1941)의 삽입곡인 <망향초 사랑>(백난아, 1941), <북극 5천키로>(채규엽, 1939), <향수열차>(이인권, 1940), <북방여로>(백년설, 1939), <오로라의 눈썰매>(남인수), <북국의 외로운 손>(남인수, 1937), <할빈 다방>(이난영, 1942), <만주의 달>(채규엽, 1932>, <울리는 만주선>(남인수, 1938), <목단강 술집>(계수남, 1941) 등이 대표적인 곡이다.
이들 노래는 노골적인 만주찬가는 아니지만 만주를 배경으로 청춘과 사랑을 구가하는 낭만과 꿈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광의의 만주찬가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