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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식(62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교우_<K스피릿> 인터뷰 기사 “대한민국이 처한 양극화‧통일‧동북공정의 답은 ‘삼국유사’에서”
지난 10월 개천절을 앞두고, 최광식 고려대 명예교수가 ‘《삼국유사》읽기’를 출간했다. 최광식 교수는 고대사 전공자가 드물던 1980년대 독특하게 《삼국유사》 연구를 시작으로 역사학자의 길을 밟았다.
또한, 2003년 중국 동북공정에 대응한 고구려사 왜곡 대책위원장을 비롯해 국립중앙박물관장, 제5대 문화재청장, 제46대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 장관 등 공직을 거쳐 역사가의 자리로 돌아왔다.
국립중앙박물관장 당시 박물관에 ‘고조선실’을 필두로 역사관을 설치했고, 문화재청장 시절에는 프랑스에서 외규장각 도서, 일본에서 조선왕실 도서를 반환받았다. 특히, 문체부 장관 시절 한류에 주목해 ‘K-Culture(컬처)’라 명명하고 다양한 문화외교를 했으며, 한글날을 법정공휴일로 되돌리는 데 앞장섰다.
지난 11월 18일 안암동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서 최 교수는 ‘《삼국유사》읽기’를 통해 지금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 그리고 역사연구 당시와 공직 시절 에피소드를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신라 삼국통일 후 고려까지도 친신라계와 친고구려계 대립, 두루 아우를 구심점 필요했다
최근 ‘《삼국유사》읽기’를 출간하셨는데, 지금 이때 다시 한번 삼국유사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 일연은 몽골의 침략과 간섭에 처한 당시, 지역과 계층 갈등을 넘어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 민족의 구심점을 제시하고자 《삼국유사》를 편찬했죠. 지금 대한민국은 지역과 계층 간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는데 우리에게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시사점을 줄 것입니다. 통일 문제도 그렇고, 최근 문화공정으로까지 확대된 동북공정 대응 문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이후 후삼국 시대, 고려 시대까지도 친신라계와 친고구려계의 갈등은 여전히 남아있었어요. 《삼국사기》가 친신라계인 김부식이 신라를 중심으로 민족의 역사를 재정리한 것이라면, 《동명왕편》은 친고구려계와 관련 있는 이규보가 고구려 동명왕을 영웅으로 찬미했죠. 일연은 이들을 아우를 수 있는 고구려와 신라 이전의 고조선, 부여 및 삼한을 언급한 《삼국유사》를 편찬한 것입니다.
당시 정계와 불교계, 지배층과 피지배층, 무신과 문신, 중앙과 지방, 불교와 유교 등으로 분열되었던 고려의 대단결을 위한 구심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일연은 고조선, 부여, 삼한을 언급하면서 우리 역사의 유구성을 강조하고,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에 주목했어요. 사실 홍익인간의 이념을 가져온 것은 환웅이죠. 환웅이 웅녀와 결합해 단군을 낳고,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면서 홍익인간 이념을 국가이념으로 삼았어요. 이와 함께 환웅이 농경을 처음 실시하였다는 점도 주목할 일이죠. 그 이전 환웅을 보낸 아버지 환인까지 삼성三聖으로 받들어서 삼신신앙이 널리 퍼졌던 것도 중요합니다. 《삼국유사》의 기술상 환인과 환웅은 신적인 존재겠지만,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은 국가를 건국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군의 홍익인간 이념을 양극화 극복과 남북통일, 대통합의 구심점으로 삼아야
지금 대한민국은 보수와 진보, 남녀, 지역 등 대립의 골이 깊고,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기도 합니다. 21세기에 통일을 이루고 대단합을 할 수 있는 구심을 《삼국유사》에서 찾을 수 있을지.
- 《삼국사기》는 국왕을 중심으로 해서 재상과 장군, 학자들 중심으로 기술되었고, 백성 이야기가 별로 없죠. 하지만 《삼국유사》는 ‘기이’편에 지배층 관련 서술 외에는 대부분 피지배층인 백성에 관한 이야기가 중심입니다. 당시 가장 중요했던 성불成佛을 기준으로 봐도 ‘성불 평등론’에 입각한 평등사상을 나타내죠. 왕이나 귀족이 아닌 평민이 성불하는 모습도 서술하고, 더구나 여종이 주인인 귀족보다도 먼저 성불하는 내용도 있는데 그 백성과 여종이 해당 편목의 주인공입니다. 민중에게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한편, 지배층뿐 아니라 피지배층도 모두 힘을 합쳐 국난을 극복하자는 의지가 보입니다.
게다가 일연은 최초 국가인 고조선을 세운 단군을 맨 앞에 편목해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자는 홍익인간 이념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도 단군을 민족의 원시조로 인정하고 있고, 고조선을 최초 국가로 인식하죠. 2002년과 2003년 개천절 남북공동 행사 당시 학계 대표로 학술회의에 참석하면서 그 가능성을 명확히 확인했어요.
따라서, 양극화를 극복하고 남북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단군의 홍익인간 이념을 남북통일과 대통합의 구심점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삼국유사》에 지금 중국이 벌이는 문화공정을 비롯한 동북공정 문제를 해결할 열쇠도 있다고 하셨는데.
2002년 시작된 소위 역사학 공정인 ‘동북공정’은 5년간의 한시적 프로젝트로 시작했는데, 그 이후에는 ‘장백산 공정’을 통해 한국의 백두산을 중국 명산으로 둔갑시켜 남북통일 이후 벌어질 ‘간도문제’를 대비한 선제적 포석을 깔고 있어요. 더군다나 요즘은 한복, 김치, 태권도 등 소위 ‘문화공정’을 통해 중국 문화의 일부로 주장하는 ‘중화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죠.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소수민족 중 하나인 조선족 문화를 자국 문화의 일부로 주장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주권국가인 대한민국의 전통문화를 중국 문화의 일부로 보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북공정에 맞설 해답이 《삼국유사》에 있다는 것은 고구려만 언급한 《삼국사기》와 달리 그 이전인 고조선과 발해 등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 고대사를 직접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삼국사기》에 단편적으로만 기술된 가야를 《삼국유사》에서는 가락국기로써 자세히 다루고 있어 일본의 역사 왜곡인 ‘임나일본부’설이 터무니없다는 걸 명확하게 밝힐 수가 있죠.
《삼국유사》는 중국, 일본의 역사왜곡 대응에 최적… 중국의 한복, 김치 등 문화공정 대응하려면 우리 전통문화 스스로 아끼고 향유해야
그럼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 왜곡에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고 보시는지.
정부와 민간의 대응이 유기적으로 잘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정부는 중국의 시대착오적 주장에 대해 적시에 항의하고, 적절한 대응을 꾸준히 해야 할 것입니다. 언론은 그러한 행태에 대해 문제점이 무엇인지 전문가들의 의견을 참고해 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은 우리 전통문화를 스스로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을 실천해나가는 캠페인을 벌이고, 중국에서 만든 김치보다 한국산 김치를 더 많이 먹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필요하죠. 한국인이 한복을 잘 안 입고, 한국 김치를 잘 먹지 않으면 중국인들이 한복과 김치를 자기들 것이라는 주장을 더 거세게 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문화 향유를 잘해야 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교수님은 한국, 한국인의 정체성, 한국인다움을 과연 어디서 찾아야 한다고 보십니까?
대한민국은 일제의 침략과 강점에 따른 식민지로 전락하고, 6.25 전쟁을 겪으며 세계 최하위 빈민국이었다가 지금은 선진국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후진국에서 선진국이 된 것은 세계 역사상 처음이라고 하죠. 저는 우리나라가 강대국들에 강하게 저항하면서도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 정신으로 평화를 사랑한 나라이기에 세계 여러 나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그래서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주변 강대국들과 끊임없는 항쟁을 벌여 살아남은 서너 나라 중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몽골의 침략에 맞서 몽골의 직할 식민지가 되지 않은 나라는 당시 고려와 베트남, 일본밖에 없어요. 일본은 바다가 있고 마침 태풍이 불어 해전에 약한 몽골군을 피할 수 있었고, 베트남은 정글이 있어서 살아남았지요. 고려는 산악 지형이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일치단결해 저항하였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입니다. 비록 부마국이 되었지만 직접 지배를 받은 것은 아니죠.
한국인은 내부적으로 갈등을 벌이지만, 외적이 쳐들어오면 일단 함께 힘을 모아 이를 물리치는 역사적 DNA가 있어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IMF 당시 ‘금모으기 운동’은 그런 역사적 DNA의 ‘근‧현대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 우리의 구심은 ‘단군과 홍익정신’이고, 한국인다움도 역시 여기서 찾아야겠죠.
그럼 우리의 홍익인간 정신이 세계인과 함께 공유하고 교류할 수 있는 사상이라고 평가하는 것인지.
물론이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건 꼭 어떤 나라, 특정한 계층, 특정한 성별에 대한 게 아니죠.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결국 ‘더불어 잘 살자’라는 것이고, 우리 민족만이 아니라 민족과 세계를 아우르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어 세계적인 보편성이 있는 것이죠. 지금 전 세계를 휩쓰는 K-콘텐츠하고도 일맥상통합니다.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갖췄으니까요.
홍익인간 정신의 보편성과 특수성, BTS 등 한류 K-콘텐츠와 일맥상통
이번 저서에서는 《삼국유사》를 ‘역사적 사료’로서 어떻게 접근하고 해석할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셨는데.
육당 최남선이 “《삼국사기》는 정사正史, 《삼국유사》는 야사野史”라고 한 이후 계속 그렇게 불렸죠. 정사든 야사든 사史는 사이니까 우리 고대사를 연구할 사료로써 다루어야 하는데 과거 그렇지 못했고, 학문적으로 처음 고대사 연구에 활용한 건 손진태부터죠. 지금은 역사 사료로써 접근하는 것에 이견이 없는 편입니다.
과거 역사연구는 왕과 지배계층 중심의 정치사가 주류로 거시적 측면에서 접근했다면, 21세기에는 판도가 바뀌어 문화사, 생활사 등 미시적 접근이 중요해졌기 때문에 《삼국유사》의 사료적 가치는 더욱 커졌다고 볼 수 있죠. 1980년대만 해도 《삼국유사》가 사료로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는데 2000년대부터는 확실히 달라졌죠.
《삼국유사》의 가치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정확히 평가하면 《삼국사기》는 나라에서 주관한 관찬사서官撰史書라면 《삼국유사》는 사찬사서私撰史書입니다. 예전에는 기전체 아니면 편년체로, 언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연표로 나타낼 수 있게 쓴 것을 ‘정사’라고 했어요. 《삼국유사》는 그런 기준에서 보면 정사가 아닌 거죠. 그렇다고 야사라고 하면 그냥 한담(閑談, 한가하게 주고받는 이야기)이나 무슨 설화인 줄 알잖아요. 그렇게 보면 안 되죠.
물론, 신화나 설화의 내용을 모두 사실이라고 해석하면 오류가 생깁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걸 그대로 사실이라고 해석하긴 어렵겠죠. 때로는 그 당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일부 사실들을 왜곡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정밀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결국 사료 비판과 해석을 통해 역사적 사실에 접근해야 합니다.
《삼국사기》는 정치사이고, 《삼국유사》는 사상사, 문화사인데 더 중요한 것은 《삼국유사》가 우리 문화의 ‘아카이브’라는 점입니다. 그걸 야사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K-콘텐츠의 소재가 거기에 담겨 있어요. 제가 《삼국유사》의 중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낀 게 2003년 중국 동북공정에 대응한 고구려사 왜곡 대책위원장을 맡았을 때입니다. 《삼국사기》에는 단편적으로만 소개된 고조선, 기록하지 않은 발해 등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 역사가 《삼국유사》에는 체계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니까 제대로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야사’라고 하면 중국도 “야사를 가지고 무슨 소리 하느냐”라고 할 것 아닙니까.
《삼국유사》 문화사, 생활사, 미시사가 중점인 21세기 더욱 사료적 가치 높아져…우리 문화의 아카이브, 야사라 하면 안돼
또, 이번 저서에서 역사가로서의 일연을 조명하고, 그의 발자취를 이야기하셨어요. 일례로 그가 가야사를 중요하게 기록한 것과 관련해서도 새로운 접근을 하셨죠?
일연의 고향인 경북 경산에서 낙동강만 건너면 가야지역이죠. 저는 일연의 속명인 ‘김견명’이 경주 김씨로 알려졌지만, 가야의 후손인 김해 김씨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또, 《삼국사기》에는 바다에 관한 내용이 별로 없는데, 《삼국유사》에는 많은 편이죠. 일연이 바다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건 몽골 침략 후 강화도에서 방어하면서 수군의 역할이 중요해진 것도 있겠지만, 그가 10여 년간 경남 남해에 머물며 대장경을 출간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삼국유사》에는 일연이 역사가로서 직접 현장을 탐사하고 확인하여 기록한 내용이 참 많습니다. 제가 2019년부터 아내와 함께 매달 《삼국유사》에 언급된 장소들을 답사하면서 분명하게 알게 되었죠. 《삼국유사》 중 권5에만 일연이 썼다고 기록되었고, 다른 권에서 제자인 무극이 썼다는 기록이 두 군데 나타납니다. 그래서 권5만 일연이 쓴 것인가라는 해석도 있었죠. 하지만 ‘탑상’편 등에 그가 직접 답사하고 쓴 내용이 있어서 무극이 쓴 부분 외 전체를 일연이 쓴 것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자면, 당시 《삼국유사》로 사학을 전공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인데 교수님이 역사연구에 뜻을 두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전 처음에 전망이 좋은 건축공학과를 다녔어요. 그런데 이과 과목보다는 역사, 철학 등 문과 과목이 훨씬 잘 맞았어요. 문과로 전공을 바꾸면서도 당시 경제개발이 가장 중요시되던 시기라 경제학과를 선택했죠. 그런데 1972년 10월 유신으로 인해 대학교가 휴교했고, 그 기간 역사책을 많이 읽었어요. 그러면서 ‘나라가 경제만으로 일어서는 게 아니구나. 우리 역사와 문화가 더 중요하겠구나.’라고 생각하고 고려대 사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사학과에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교하라’는 리포트를 준비하면서 《삼국사기》를 보니 왕이 중심이 되어 활동한 사실들의 나열이 매우 무미건조하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반면 《삼국유사》는 우리 민족 문화와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어서 평생 이걸 연구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대학진학때 운명적인 전공 만나려면 대세보다 자기가 잘하고 행복 느낄 수 있는 것 찾는 시간 필요해
지금도 역사연구는 조선 시대에 집중되고 그 이전으로 넘어가지 못한다는데 당시 《삼국유사》를 전공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사료가 많지 않은 것 때문이죠. 제가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해서 ‘무불습합巫佛習合’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는데 심사 때 ‘과연 학위 논문이 되느냐, 안 되느냐’라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할 수 없이 박사 논문 때는 《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를 바탕으로 제사제도에 관해 썼죠. 하지만 《삼국사기》를 연구한 덕분에 비교하면서 《삼국유사》를 더욱 깊이 있게 연구하게 되었죠.
별개의 질문을 드리자면, 요즘 청년들도 대학 전공이 자신에게 잘 맞는지 고민하면서 옮기거나 적응하지 못해도 버티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수님처럼 운명적인 전공을 만날 방법이 있을까요?
나 나름대로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할 수 있는지 그런 고민을 했으니까 평생 전공을 찾은 거죠. 흔한 말이겠지만, 청년들이 트렌드를 좇아가지 말고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 자기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걸 찾아갔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트렌드는 시기마다 계속 바뀝니다. 예전에는 10년이면 트렌드가 변했는데 이제는 더 빨라졌죠.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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