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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기타 세대와 포크송, 70-80의 신화>
6. 민중가요의 대부, 김민기
또 한명의 대표적인 민중가수는 김민기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그는 형이상학적 상아탑에 안주하지 않고 음악을 통해 사회미학을 펼치고자 하였다.
대학축제에서 통기타를 매고 맨발로 무대에 오르던 그의 모습은 또 한 명의 반전가수 밥딜런을 연상케 했다.
김민기는 고교시절부터 기타를 통하여 음악의 재능을 키웠고 대학시절 김영세와 함께 포크 팝 듀엣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를 결성하여 포크송 수용에 앞장 섰다.
민중가요의 대명사로 불리는 <아침이슬>을 1970년 작곡하여 재동초등학교 동창인 양희은에게 주었다.
그 노래로 민중가요 대부로서의 첫 모습을 드러냈다.
1972년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우리 승리하리라>, <해방가>, <꽃 피우는 아이>를 불러 경찰서에 연행됐다.
동시에 그의 앨범과 노래들이 방송금지되는 조치를 받았다. 민중가수로서의 첫 시련이 다가온 것이다.
김민기는 이에 굴하지 않고 앙가쥬망의 포즈를 이어갔다.
저항시인 김지하의 희곡 <목관의 예수>에 곡을 부쳐 노동자와 함께 공연에 나섰다.
<주여 이제는 여기>(1973)가 그 작품이다.
아울러 국악인들과 함께 소리굿 극본을 써서 <아구>를 공연했다.
마침내 <아침이슬>이 1975년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1977년 군 제대 후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 일명 <상록수>를 양희은을 통해 발표했다.
1978년 동일방직 노조 문제를 다룬 노래극 <공장의 불빛>도 발표했다.
이 노래극은 테잎으로 발매되어 노동자들의 집회에 자주 사용됐다.
1987년 탄광촌 이야기를 다룬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발표하고, 19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을 제작하여 ‘노찾사’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970년대 대표적 저항시인이던 김지하와 손잡고 희곡 <금관의 예수>,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노동자들과 함께 공연한 것은 그의 저항미학의 본령을 보여준 것이다.
단지 노래의 차원을 넘어 연극, 마당극 등 장르를 확산하여 민중의 투쟁의지를 전파했던 것이다.
음악, 연극, 문학, 무용이 한 양식으로 국한되지 않고 서로 경계를 허물고 장르를 넘나드는 양식개방주의가 1970-80년대 예술의 특징이었다.
그 중심에 김민기가 있었다.
문민시대인 1990년대 들어서 김민기는 뮤지칼 제작자로 변신하여 학전 소극장을 개관한 후 4000회의 최장수 기록을 남긴 록뮤지칼 <지하철 1호선>을 이끌었다.
아울러 어린이 뮤지컬도 제작하여 한국 뮤지칼 개척자로 큰 공적을 남겼다.
1971년 정규 음반인『김민기』를 냈는데 여기에 <친구>, <아침이슬>이 들어 있다.
1978년 <상록수>가 들어간 음반『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을 출시했다.
이러한 김민기의 음악인생을 살펴보면 그는 명실공히 민중가요, 앙가쥬망 음악의 대부요, 산파였음을 알 수 있다.
한대수가 첫발을 딛기는 했지만 김민기는 그 바톤을 이어 받아 민중가요의 토대를 굳건히 구축해 갔던 것이다.
김민기가 민중가수의 대명사요, 상징으로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명실공히 1970년대 대중음악을 민중음악으로 승화시킨 산파였다.
인구에 회자되는 그의 대표작 <아침이슬>이 상징하고 있는 바, 그의 음악은 암울했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시였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 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양희은, <아침이슬>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이다.
1연은 서정적인 흐름을 타고 있지만 2연은 분위기가 돌변하여 삭막한 현실을 조명한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 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처럼 어떤 시련이 닥칠지라도 끝까지 투쟁하여 이겨낼 것을 다짐하고 있다.
‘긴 밤, 태양, 묘지, 한낮의 더위, 시련, 광야, 서러움’ 등의 격렬한 어구들이 이러한 암울한 시대상황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신념과 투지를 드러내고 있다.
1970년대 10월 유신, 긴급조치, 계엄령 등 암울한 시대상황을 그리며 이에 대한 저항, 투쟁의지를 비장한 어조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노래 역시 금지곡으로 규제되었다.
노래 구절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 오르고’가 문제가 되었다.
‘묘지’는 ‘암울한 시대’를, ‘태양’은 ‘저항의식’을, ‘붉게’는 ‘공산주의 사상’을 그린 것이라는 이유다.
그럴수록 이 노래는 대학가의 항쟁가, 운동권의 투쟁가로 널리 불려졌다.
운동권 학생들이 아니더라도 1970년대 대학을 다닌 젊은이들이라면 어떤 모임, 어떤 자리에서도 마치 애국가처럼 부르던 애창가였다.
<아침이슬>이 1975년 금지가요로 낙인찍힌 것만 보아도 저항시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에 굴복하지 않고 그는 앙가쥬망 가요를 이어갔는데, <친구>, <늙은 군인의 노래>, <해방가>, <꽃 피우는 아이>,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상록수’) 등을 속속 발표했다.
이들 노래 역시 대부분이 금지곡이 되었다. 노래 제목부터 저항가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 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치른 들판에 솔잎 되리라"
-양희은, <상록수>
김민기가 작사, 작곡하고 양희은이 부른 <상록수>다.
노래의 주인공은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의연한 푸르른 솔잎처럼 이 시대의 비바람을 헤쳐가는 상록수가 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들’이 다시는 오지 않도록 땀 흘리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3절에서는 아예 ‘우리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깨치고 나가 끝내 이기리라’는 투쟁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쯤 되면 항쟁가요, 투쟁가인 셈이다.
물론 그 투쟁의 대상은 암울한 유신독재 상황이었다.
이 노래는 김민기가 군에서 제대하고 부평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야학에 참여해서 작곡했는데 노동자들의 결혼축가로 종종 쓰였다고 한다.
힘든 노동자 부부가 역경을 딛고 힘차게 살아가겠다는 삶의 의지로 해석된 것이다.
<친구>는 투쟁대열에서 희생된 친구를 떠 올리고 있고, <늙은 군인의 노래>는 직업군인의 슬픈 현실을 조명하고, <꽃 피우는 아이>는 희망을 잃어버린 세대의 절망을 노래하고 있다.
이처럼 비록 민중가요는 대학가 중심의 노래였지만 점차 대중들의 인기를 얻어가면서 대중가요로 자리를 잡아갔다.
이렇게 대학 항쟁가, 투쟁가가 1970년대 대중가요의 중요한 양식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