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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부인과 춤바람 2>
1960년대 이후에도 맘보붐은 식지 않고 <후라이 맘보>(김용만, 1961), <마도로스 맘보>( 백야성, 1962), <명동맘보>(권혜경, 1962), <노총각 맘보>(송해, 1969), <차이나 맘보>( 백일희, 1982)로 이어진다.
"밭김을 맬 때나 아낙네 맘보가 들린다
이가 빠진 할머니도 헤에이 맘보
아낙네도 맘보, 맘보다, 맘보시대다"
-김정애, <아낙네 맘보>
김정애가 부른 <아낙네 맘보>다.
도시, 농촌, 아주머니, 할머니 가릴 것 없이 온통 맘보춤에 취한 그야말로 ‘맘보시대’가 열렸음을 보여준다.
밭김을 매다가, 논모를 낼 때도 맘보춤 가락에 맞춰 일을 한다. 할아버지 담뱃대도, 이 빠진 할머니도 맘보가락에 춤을 춘다. 그야말로 맘보 천국이 열린 것이다. 남녀노소, 도시농촌, 지역과 계층을 초월하여 맘보춤이 사회 구석구석 독버섯처럼 피어났다. 호미자루 내던지고, 빠진 이를 흔들며 맘보춤을 추는 남녀노소들의 풍경이 도처에서 현란하게 펼쳐진다.
맘보춤이 유행하다 보니 거기에 걸맞는 ‘맘보바지’가 덩덜아 유행했고, ‘맘보캬라멜’까지 등장하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졌다. 심지어는 1930년대 유행하던 사회풍자가인 만요 양식을 닮은 풍자맘보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값 비싼 양식으로 배부르거나
보리밥 짠지 쪽에 배부르거나
목욕탕에 옷을 벗긴 다 같은 친구
값 비싼 넥타이에 춤을 추거나
노동복 고무신에 춤을 추거나
영구차에 타고 가긴 다 같은 신세
너도 맘보 나도 맘보 코리안 맘보"
-김정구, <코리안 맘보>
김정구가 부른 <코리안 맘보>다.
양식을 먹는 사람이나. 보리밥 먹는 사람이나 목욕탕에서 옷 벗기는 다 마찬가지고, 넥타이를 매는 사람이나 고무신 신는 사람도 죽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신나게 맘보춤이나 추자는 노래다.
브랜디-대폿잔, 양식-보리밥, 넥타이-노동복을 대비시키면서 부유층과 서민층의 계층의식을 은연중 부각시키고 있다. 1950년대는 부익부 빈익빈의 계층 갈등이 심화되던 시대였다. 그러한 사회현상을 꼬집으면서 그 계층 갈등을 맘보춤으로 풀어 보려는 풍자성이 돋보인다.
<후라이 맘보>(김용만, 1961), <월급날 맘보>(김용만, 1962)도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맘보다.
"월급날 받은 봉투 한 푼도 없어
친구 좋아 한잔 술에 맘보 맘보
젓가락 장단에 맞춰 어깨춤 절로 나네
얼씨구나 맘보, 절씨구나 맘보"
-김용만, <월급날 맘보>
김용만이 부른 <월급날 맘보>다.
‘바가지 박박 긁는 마누라 야단쳐도’ 월급날 술 마시고 맘보춤에 들썩이는 한량이 등장한다.
큰 딸이 나이론 치마, 작은 놈이 양복 한 벌 사달라 조르지만 맘보춤에 빠져 나몰라 하고, 월급날 빚쟁이 한테 쫓기지만 ‘양재기처럼 배를 내밀고’ (생략 부분) 맘보춤을 춘다. 노래 가락도 맘보리듬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만요풍 가락은 1930년대 강홍식, 안명옥이 부른 만요 <명물남녀>를 연상시킨다. 타락한 남녀가 카뱌레에서 탱고가락에 맞춰 춤을 추듯이, <월급날 맘보> 역시 맘보가락에 맞춰 사회 풍속도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1930년대 풍속이 1950년대로 그대로 옮겨 온 셈이다. 특히 김용만은 재치 넘치는 해학으로 사회 풍자가를 많이 부른 가수로 주목 받았다.
"인생이란 무엇인지 청춘은 즐거워
피었다가 시들으면 다시 못 필 내 청춘
마시고 또 마시고 취하고 또 취해서
이 밤이 새기 전에 춤을 춥시다"
-윤일로, <기타부기>
윤일로의 <기타부기>(1957)는 향락의 극치를 보여준다. 밤새도록 술 마시고 춤을 추는 캬바레 문화의 실상을 드러낸다.
‘인생이란 무엇인지 청춘은 즐거워’ 처럼 청춘을 술과 춤으로 태워버리자는 히도니즘(hedonism, 쾌락주의)의 허무한 열정을 노래하고 있다.
‘취하고 또 취해서’ 밤새도록 춤을 추는 젊은이들의 향락문화가 어느 정도였는지 이 노래는 증언하고 있다. 그야말로 향락주의, 도피주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얼시구 절시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황정자, <노래가락 차차차>
황정자의 <노래가락 차차차> 역시 퇴폐, 향락문화의 절정을 보여준다. ‘달도 차면 기울고 화무는 십일홍’인 것처럼 청춘은 한 순간이니 마음껏 즐기고 놀자는 것이다. 차차차 가락에 몸을 맡기고 ‘지화자 좋구나’를 신나게 불러 보자는 것이다.
"다방을 가고 영화를 보고
사교춤 추어야만 여자인가요
때 묻은 행주치마 정성이 어린
이러한 아낙네가 여성 넘버원"
-박경원, <남성 넘버원>
박경원이 부른 <남성 남버원>(1957)이다.
다방에 가고 영화를 보고 사교춤 추는 것이 당대 여성의 풍조임을 은연중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행주치마 두르고 가난한 집안 살림 알뜰히 살피는 여성의 이미지를 살려내고 있다. 이러한 모습들이 1950년대 향락문화, 소비문화의 자화상들이다. 결국 50년대 미국식의 춤 음악의 유행은 이러한 퇴폐문화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대중가요가 시대의 거울이요, 사회의 산물임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현상들이다.
이처럼 1950년대 서구의 댄스음악은 전후 피폐한 시대상황과 맞물려 퇴폐적 향락주의를 자극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한국 대중가요의 발전을 위해서는 서양음악과의 교류와 정착이 필수적이긴 하지만 불행히도 어두운 시대상황과 맞물려 퇴폐, 향락문화를 촉진하는 결과를 빚었다.
그러나 이렇게 부작용을 낳긴 했지만 순수히 음악적 차원에서 볼 때 서양음악의 수용은 한국 대중음악의 발전을 위해서는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 한국음악의 세계화, 개방화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이를 발판으로 1960년대 다양한 장르의 대중음악이 꽃 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자유부인>은 1950년대 대중음악이 꽃 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자유부인>은 문학에서 영화로, 다시 음악으로 재생산되고 확산되었다.
말하자면 예술의 다용화(多用化, multi-use)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개화기 소설 <이수일과 심순애>가 음악, 창극, 영화로 확산되던 다용화 현상이 그대로 재현된 양상이다. 그래서 <자유부인>은 더욱 문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