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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시대의 가요규제>
1970년대는 1972년 공표된 유신헌법의 시대였다. 유신헌법은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을 통제하는 법이어서 세상은 꽁꽁 얼어 붙고 말았다. 더구나 이 헌법을 비방하거나 위반하는 것을 막기 위한 긴급조치는 국민들의 입과 발을 묶어 버리는 봉쇄조치였다. 그리하여 1970년대는 소위 ‘긴조(긴급조치)시대’로 접어 들었다. 정부는 <동아일보> 광고금지, 휴교령 등으로 막아보려 했으나 유신 반대운동은 사회전반으로 확산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강제조치들이 연달아 발표되었다.
<동아일보>가 1974년 ‘자유언론 선언문’을 채택하여 유신 반대운동에 나서자 광고를 싣지 못하게 한 것이 유명한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다. 신문은 스폰서 역할을 하는 광고 없이는 운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광고금지는 결국 신문사를 폐쇄시키려는 조치였던 것이다. 이러한 유신헌법, 긴급조치, 언론통제 등의 상황에서 가요계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긴급조치는 예술계, 대중가요계에도 규제의 손길이 뻗쳤다. 대중예술, 특히 대중가요는 대중적 파급효과가 크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방지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자유당 시절 <유정천리>라는 노래 한 곡이 선거의 판도, 정치의 지형도를 바꿔 놓은 사실을 위정자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자유당의 부패, 부정선거를 박재홍의 히트곡 <유정천리>에 가탁(假託)하여 풍자함으로써 삽시간에 국민들의 여론이 들끓었던 것이다. 그 만큼 대중가요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인구에 회자되는 만큼 정치사회적 영향력도 큰 것이다. 치인, 언론, 학원가에서 유신 반대 운동이 확산되자 이를 통제하기 위하여 마침내 1975년 5월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9호’를 공포한다. 이어서 6월 문화공보부는 이를 근거로 구체적인 규제책인 ‘공연물 및 가요정화 대책’을 내놓는다.
산하에 ‘예술문화윤리위원회’를 설치하여 1968년 이후 1975년까지 7년간 발표된 대중가요 2만 3천여 곡을 심사하여 222곡을 금지곡으로 선정한다. 그 기준은 국가안보와 국민총화에 나쁜 영향을 주는 곡, 외래풍조의 무분별한 도입과 모방, 패배적이고 자학적인 노래, 선정적이고 퇴폐적인 가요 등이었다.
1975년 6월부터 10월까지 3차에 걸친 심사 끝에 <철새>, <기러기 아빠>, <무정한 밤배>, <나그네 주막>, <사람 나고 돈 났지>, <한잔에 한잔 사랑> 등 많은 노래가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여자의 운명은 사랑이기에
이 생명 다하도록 맹세했건만
무정한 밤배는 내 마음을 싣고
허무한 내 마음을 울려만 주네"
-패티김, <무정한 밤배>
금지곡이 된 패티김의 <무정한 밤배>(1969)다. 가사 어디를 봐도 금지곡이 될 만한 내용은 없다. 운명을 걸고 사랑한 사람과의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곡이다. 이 정도 내용이면 웬만한 대중가요의 기본정서가 아닌가. 일제 강점기 신파조 유행가는 이보다 심한 내용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 곡이 금지곡으로 선정된 것은 기준의 3항, 곧 패배적이고 자학적인 노래에 해당됐기 때문이었다. 사랑은 이별과 실연이 기본인 것이고, 그 슬픔을 달래주고 위안하는 것이 대중가요의 역할이요, 의무가 아닌가.
이런 노래를 금지곡으로 선정한다는 것은 사랑의 속성, 대중가요의 특성을 무시한 처사로 밖에 볼 수 없다. 그저 규제를 위한 규제, 막무가내식 규제였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미자가 부른 <기러기 아빠>(1969)도 그렇다.
"산에는 진달래, 들엔 개나리
산새도 슬피 우는 노을진 산골에
엄마구름 애기구름 정답게 가는데
아빠는 어디 갔나 어디에서 살고 있나
아아 우리는 외로운 형제 길 잃은 기러기"
-이미자, <기러기 아빠>
이 노래는 아빠 없이 엄마와 아기가 힘들게 살아가는 고통과 슬픔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나 너무 처량한 비탄조 노래라는 항목으로 금지됐다.
1960년대는 아직 6.25 전쟁의 후유증이 남아 있던 시대였다. 특히 전쟁 미망인들과 고아, 기아(棄兒)들의 문제가 사회적 생채기로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이 노래 역시 그러한 전쟁 후유증, 6.25 트라우마가 깔려있는 1960년대 사회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노래다. ‘철없는 들국화야 너를 버리고 남 몰래 숨어서 눈물 흘리며’ 떠나는 엄마를 원망하지 말라는 <들국화>(이미자), 낳은 정, 기른 정의 갈등과 슬픔을 노래한 <미워도 다시 한번>, <엄마 찾아 삼만리> 등의 노래도 그렇다. 산업화, 도시화의 뒷전에 밀려난 소외된 군상(群像)들 속에 6.25 전쟁 미망인과 고아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소외된 군상들의 애절한 사연조차 ‘패배적이고 자학적’인 노래로 규제했던 것이다. 발전적이고 밝은 면만 과장하고 어두운 면을 감추려는 위정자들의 가식과 위선에 불과한 조치였다. 그밖에 <0시의 이별>(배호)은 통행금지령 위반, <물 좀 주소>(한대수)는 물고문 연상, <거짓말이야>(김추자)는 불신감 조장, <동백 아가씨>(이미자)는 왜색, 일본 엔카풍의 노래라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이러한 규제의 분위기는 대중가요 뿐 아니라 대학가로 확산되어 포크, 록 음악까지 퍼져나갔다. 젊은이들에게 사랑받던 <왜 불러>, <아침이슬> 등이 금지곡으로 묶여 버렸다. 심지어 사회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외국가요까지 규제하기에 이른다. 반전운동의 상징이었던 밥 딜런의 <Blowing in the Wind>나 존 바에즈의 <Donna Donna> 등 200여 곡을 금지시켰다. 반전(反戰), 체제비판적인 풍조가 한국에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다.
"왜 불러 왜 불러
돌아서서 가는 사람을 왜 불러 왜 불러
토라질 때 무정하더니 왜 왜 왜
자꾸 불러 설레게 해"
-송창식, <왜 불러>
송창식이 부른 <왜 불러>(1975)다. 이 노래는 금지조항 4항인 선정적이고 퇴폐적인 노래라는 항목에 걸렸다. 1975년에 개봉된 청춘영화 <바보들의 행진>에는 <왜 불러>와 <고래사냥>이 OST로 삽입되어 사랑을 받았는데 두 곡 다 금지곡이 된 것이다. <고래사냥>에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 부분을 퇴폐적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실망과 절망을 딛고 고래 잡으러 동해 바다로 떠나는 젊은이의 이상과 꿈을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한대수의 <고무신>(1965)은 반체제적, 양희은의 <늙은 군인의 노래>는 군 사기 저하, <아침이슬>(1971)은 저항의식과 ‘태양’으로 상징되는 불온사상 고취, 이장희의 <그건 너>(1973)는 퇴폐조장이란 이유로 금지되었다. 대체로 작품 전체의 주제를 보지 않고 부분적인 가사만 보고 심사 기준을 맞춘 것이다.
이현령 비현령(耳縣鈴 鼻縣鈴)식으로 갖가지 이유로 금지곡의 딱지가 남발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당시 금지곡 규제가 얼마나 자의적이고 편향적이었나를 알 수 있다. 무분별한 규제였던 것이다. 인기가요 222곡 금지, 이는 가히 가요탄압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오직 정치적인 이유로 금지되는 현상도 일어났다. 심수봉의 <무궁화>(1985)는 국화(國花)인 무궁화를 소재로 애국심을 고취하는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심수봉이 대통령 시해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금지되었다.
독도 사랑을 통하여 애국심을 고취하는 제2의 애국가 <독도는 우리 땅>(1982)이 대통령 일본 방문을 앞두고 화해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금지시킬 정도였으니 대중가요가 정치풍향계에 얼마나 민감한가를 알 수 있다. 1970년대 길거리에선 희한한 풍경이 연출됐다. 순경들이 자를 들고 다니며 여자들의 치마를 재고 남자들의 장발을 단속했다. 일정한 허용치를 넘으면 즉석에서 머리를 바리캉으로 밀거나 파출소로 연행했다.
그래서 길이가 기느니 짧느니 실랑이 하는 진풍경이 백주대로에서 연출됐다. 단속근거는 소위 미풍양속이었다. 파출소로 연행되면 반성문이나 각서를 쓰고 풀려 났으나 남자들은 바리캉으로 밀어 버리기 때문에 곧장 이발소로 직행해야 했다. 길이가 짧은 미니 스커트를 입다 다시 적발되면 벌금형이나 구류에 처해진다. 그래서 그에 항의하는 노래까지 등장했다. 그것이 바로 송창식의 <왜 불러>다. ‘왜 불러, 왜 불러, 돌아서서 가는 사람을 왜 불러’.
물론 이 노래는 사랑을 포기하고 돌아서는 사람을 다시는 부르지 말라는 노래다.
하지만 별일 없이 지나가는 사람을 경찰이 왜 부르느냐는 항의 조 노래가 되어 대유행을 탔다. 또한 당시 민주인사들이 종종 검거되기도 하여 무고한 사람을 왜 부르는냐는 항의성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결국 이 노래는 의도와는 다르게 일종의 정치 저항가이자, 시대의 풍자가가 된 것이다.
결국 금지곡으로 단속됐다.
특히 <왜 불러>와 <아침 이슬>은 금지곡 명단에도 없이 금지됐다. 아예 심의대상에서 배제하여 ‘귀신 금지곡’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귀신도 모르게 금지곡으로 올려 놓았다는 뜻이다.
심지어 당시 기대주였던 맹인가수 이용복은 맹인이어서 보기에 안 좋다는 이유만으로 연예계를 떠나야 했다. 참으로 상식에서 벗어난 황당한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이처럼 시민들의 선량한 일상까지 규제한 살벌한 시대였다. 12시 이후에는 사람이 통행할 수 없는 통행금지 시대였다. 1970년대는 흑백사진 시대였다. 하지만 흑백사진 속의 주인공들은 어울리지 않게 모두 장발이거나 미니 스커트들이다. 스냅사진으로 찍은 사진 속에 우연히 찍힌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 만큼 그 시대는 장발족, 미니스커트가 유행이었다.
말하자면 남자는 길고, 여자는 짧던 시대였다. 왜 그런 패션이 유행했을까. 물론 머리나 패션은 개인의 취미고 취향이니까 다양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유행을 타면서 보편화된다. 개성의 일반화라고나 할까, 그것이 바로 유행의 속성이다.
너도나도 장발이고, 여름이나 겨울에도 미니스커트였다. 장발이나 미니스커트는 기성세대의 도덕가치, 기존윤리로 볼 때 분명 기준에 어긋난 패션들이다.
남자든 여자든 단정한 옷차림, 단정한 머리가 사회통념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발과 미니는 이에 대한 반항이고 도전이었다. 더구나 당시는 군부정권 시대여서 모든게 획일화, 규범화가 강요되던 시대였다. 군대의 규율처럼 모든 것이 통제되고 억압받는 시대인 것이다. 군사문화가 사회구석까지 파고들어 개인의 개성이나 개별적 가치가 철저히 훼손됐다.
대학생은 물론 여고생들조차 군복을 입고 교련을 받아야 하던 그야말로 유니폼(uniform)의 시대였던 것이다. 장발과 미니는 바로 이런 군사문화의 획일화, 제도화, 규격화에 대한 반항이요, 반발인 셈이다. 패션이란 이름으로 지배이데오로기에 맞선 일종의 문화적 저항이었다. 마치 조선말기 단발령이 내렸을 때 유림들이 항거하고 자결까지 감행했던 일과 흡사하다. 단발령에 대한 항거는 유교적 가치와 이념을 훼손하는 저항의 상징적 행위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장발, 미니의 대유행은 군사문화에 대한 항거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1970년대 장발 단속령은 일제시대의 단발령의 복사판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니 스커트 유행의 선두주자였던 가수 윤복희는 역설적으로 군사문화에 맞선 문화 투쟁가였다.
결국 1970년대 대중가요의 규제는 건전한 대중문화 촉진이라는 명분과 다르게 통치이념에 순응하도록 국민들을 길들이기 위한 문화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젊은이들의 의지와 패기를 꺾고 시대와 정권에 순응하는 국민을 키워내기 위한 상징적인 규제였던 것이다. 어느 비평가의 말대로 ‘75가요 대학살’은 이렇게 자행됐던 것이다. 그것은 가요 대학살이 아니라 문화 대학살, 정신 대학살에 버금가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