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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260회 작성일 2012-10-08 09:04
[스포츠 레전드]홍수환(60회) "옥희 때문에 타이틀을 빼앗겼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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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환 (사진=스포츠한국)
  [스포츠 레전드] 

홍수환 "옥희 때문에 타이틀을 빼앗겼다면…"


김석현 선임기자 kimminor@naver.com
입력시간 : 2012.10.05






 

 

"엄마, 나 '참피온' 먹었어!"

"그래, 수환아 장하다. 대한국민 만세다 만세야. 김기수 어머니가 그렇게도 부럽더니만…."

일상 생활에서, 혹은 TV 드라마에서, 혹은 영화에서 수없이 보고 들은 모자(母子) 간의 대화 가운데 이처럼 극적이고 즐거운 대화가 또 있었을까.

1974년 7월4일, 그날은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장대비가 새벽부터 지척을 분간할 수 없도록 사정없이 쏟아져 교통이 두절된 탓에 고교 1년생이던 필자는 등교를 하지 못하고 집안에서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안방 선반 위에 얹혀 있던 진공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온 앳된 목소리의 '한 젊은이'와 그의 모친 사이의 전화 통화가 바로 이것이었다.

'한 젊은이'의 이름은 홍수환(당시 24세).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 남아공의 항구도시 더번까지 날아가 치른 WBA(세계복싱기구) 밴텀급 타이틀매치에서 챔피언 아놀드 테일러를 5차례나 캔버스에 누이는 일방적인 경기를 펼친 끝에 심판 전원일치의 판정승을 거둔 뒤 라디오의 중계 마이크로 서울의 방송국 스튜디오에 나와 있던 어머니 황농선씨(당시 54세)와 주고 받은 격정의 대화였다.

60년대의 WBA 주니어미들급 챔피언 김기수에 이은 2번째 세계 챔피언. 그 많던 머리의 숱이 어느덧 듬성듬성 자리를 비워 지금은 가발을 하고 다녀야 할 정도로 긴 세월이 흘렀지만 그날의 감격은 세월이 흐를수록 오히려 더 가슴을 조일 만큼 생생해 진다고 한다.

현재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홍수환 스타 복싱 체육관'을 운영하며 한국복싱의 '내일'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그를 찾아갔다.

서울 시내에 있는 대부분의 권투체육관이 지하 아니면 지상 2, 3층에 있는 것과는 달리 이 체육관은 1층에다 사방이 통유리로 돼 있어 지나는 사람이 안에서 훈련하는 모습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이색적이었다.

▲ "이제는 말하겠다"

1978년 5월7일, 도전자 리카르도 카르도나(콜롬비아)를 상대로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치른 WBA 주니어페더급 2차 방어전에서 12회 TKO로 패해 타이틀을 뺏긴 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럼 그렇지, 여자를 데리고 그렇게 놀았으니 권투가 제대로 될 리가 있어."

"뻔한 거지 뭐. 연습을 제대로 했어도 카르도나를 이기기가 어려웠을 텐데."

"걔가 아직 고생을 덜했어."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여기서 '여자'란 가수 옥희씨(본명 김광숙)를 말한다.

"이제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건 정말 세상 사람들의 오해였습니다. 그동안 말을 해봐야 다 변명으로 받아들여질 것 같아서 말을 할 수가 없었는데 오늘 그 진실을 말씀드리지요."

사뭇 심각한 표정이다.

"제가 카르도나 그 친구보다 펀치가 조금 약한 것을 빼놓고는 모든 게 다 앞서 있었습니다. 당연히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을 갖고 링에 올랐지요. 그런데 1회전 시작하자마자 그 친구한테 왼쪽 눈 아래쪽 광대뼈 있는 곳에 버팅을 당했지 뭡니까."

버팅이란 서로 엉겨 있는 클린치 상태에서 주심 모르게 고의로 머리를 상대의 안면에 부딪히는 것. 실제 지금도 그의 왼쪽 눈 둘레로 그때 꿰맨 자국이 선연하다.

"버팅을 당하고 나니까 계속 피가 나오는 거에요. 피를 흘리니까 체력은 더 떨어지고. 솔직히 말씀드려서 어떻게 경기를 치렀는지도 모르고 12회전까지 간 겁니다. 그때 링 바닥을 벌겋게 물들인 피가 모두 제 눈에서 나온 거라고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하지만 피를 흘리고 타이틀을 뺐긴 것보다 더 억울한 건 그 이후에 나돈 소문이었다.

"제가 옥희를 처음 만난 게 77월 7월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급속하게 가까워졌지요. 그런데도 넉 달 뒤에 카라스키야 때려 누이고 4전5기 했지 않습니까. 그러고 또 두 달 있다가 일본에 가서 가사하라 한테 판정승하고 1차 방어했잖아요. 카르도나에 진 게 옥희 때문이라면 카라스키야나 가사하라 한테도 졌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의 말에 사족을 달자면 이렇다.

홍수환이 옥씨를 알게 된 건 정확히 1977년 7월13일. 어느 팬 모임에서였다.

본인 말대로 두 사람은 만나자 마자 친한 사이 이상으로 가까워져 어쩔 수 없는 관계가 됐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홍수환은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아 그로부터 4개월 후인 11월26일 중미 파나마로 건너가 그때 신설된 WBA 주니어페더급 타이틀을 놓고 당시 17세였던 핵토르 카라스키야와 맞붙어 '4전5기'의 신화와 함께 두 번째 챔피언이 됐다.

그리고 다시 2개월 남짓 지난 이듬해 2월1일에는 일본 도쿄 고라쿠엔에서 가사하라 유를 상대로 1차 방어전을 치러 5차례의 다운을 뺐는 등의 압도적인 우세를 보인 끝에 심판 전원일치의 판정승으로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옥씨와 한창 열애 중인 기간이었다.

따라서 홍수환의 주장을 요약하면 '내가 옥희와 열애를 하면서도 타이틀 따내고 방어까지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카르도나한테 진 걸 옥희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아 달라. 링 바닥에 피 흘린 것만도 억울한데 왜 누명까지 씌우느냐'는 얘기다.

▲꿀 잘못 먹어 빼앗긴 세계 타이틀

홍수환이 억울한 건 이것만이 아니라 한 가지가 더 있다.

이보다 2년 반이 앞선 1975년 3월14일 미국 LA에서 멕시코의 '하드 펀치' 알폰소 자모라를 상대로 벌인 WBA 밴텀급 2차 방어전에서 4회 KO로 타이틀을 빼앗겼을 때의 일.

지금껏 많은 사람들은 홍수환이 카운트 아웃이 되기 전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는데 자모라의 펀치가 겁이 나 일부러 일어나지 않고 패배를 자초한 것으로 믿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게 억울하고 분하다는 얘기다.

"밴텀급 한계체중이 53.2kg 아닙니까. 그때 2차 계체량 때까지 이걸 통과를 못했어요. 그래서 3차까지 가게 됐습니다. 근데 경기 당일 오전에 하겠다던 3차 계체량을 갑자기 낮 12시에 한다는 거에요. 여기서부터 일이 잘못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말일까.

"겨우 계체량을 통과하고
호텔에 돌아와 보니 1시가 넘었더군요. 게임 시간이 저녁 7시여서 점심을 먹고 조금 쉬었다가 경기장에 나가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또 날벼락 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

자세한 설명도 없이 게임 시간을 2시간 앞당겨 5시로 하기로 했다는 소식.

"어떡합니까. 따르는 수 밖에요. 항의를 해봐야 될 일도 아니고.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는 거에요. 게임 직전의 2시간은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이거든요. 뭘 먹기는 해야겠는데 음식이 당기지는 않고. 하는 수 없이 서울에서 훈련할 때 어떤 할아버지께서 체육관으로 갖다 주신 꿀을 두 숟갈 먹고 링에 올랐지요. "

이게 불찰(不察)이었다.

"빈 속에다 꿀을 먹고 나니까 목이 타고 갈증은 나고…. 죽겠습디다. 겨우 참아가며 게임을 시작했지요. 3라운드까지는 제가 게임을 앞선 던 걸로 기억합니다. 근데 4라운드 1분쯤이었나요. 대시해 들어가다가 자모라의 왼손 카운터를 맞고 쓰러지니까 못 일어나겠다라고요. 정말 뺏기고 싶지 않은 타이틀이었는데."

필자의 어렴풋한 기억으로도 그때 홍수환은 큰 '데미지'를 입지 않고 비스듬히 쓰러져 코피를 흘리며 두 다리를 뻗치고 앉은 자세에서 두 팔을 링 바닥에 짚은 채 주심의 '카운트 텐'을 기다리는 듯한 표정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이런 기막한 속사정이 있었던 줄이야.

"이걸 두고 사람들은 홍수환이가 겁쟁이니, 비겁하니 하고 말들이 많았던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패장이 무슨 할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나마 오늘 이렇게 당시 사정을 말씀드릴 기회가 생겼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해야겠군요."

▲파이트머니
200만원100만원 권투위원회에 기부한 어머니

홍수환은 원래 야구선수였다. 그것도 가장 어려운 포지션으로 통하는 유격수.

"제 고향이 서울 종로거든요. 학교도 지금 종로구청 자리에 있던 수송국민학교를 나왔고요. 그리고는 중앙중학교와
중앙고를 다녔지요. 중 3때까지는 야구를 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 힘이 좋았나 봅니다. 볼을 아주 멀리 던졌으니까요. 그래서 유격수를 했습니다."

야구를 계속했어도 성공하지 않았을까.

복싱에서 두 체급이나 세계제패를 할 정도면 야구선수로서도 충분히 대성할 소지가 있었을 테니.

"글쎄요. 아무 일도 없었으면 야구선수가 됐을지도 모르지요. 근데 고등학교 들어가서 얼마 안 돼 아버지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께서 복싱을 아주 좋아하셨거든요. 그래서 전향을 한 겁니다. 절더러 복싱선수가 되라고 유언을 남기신 건 아니었지만요."

프로 복싱 데뷔전은 고3때인 1969년 5월12일, 김상일과의 밴텀급 8회전이었다. 결과는 무승부. 이후 3년이 조금 넘은 1972년 6월4일, 당시의 동양챔피언이었던 필리핀의 알 디얀에게 도전해 판정승을 거두고 타이틀을 뺏은 것이 훗날 한국 유일의 '두 체급 세계챔피언'으로 대성하게 된 큰 계기였다.

1차 방어전에선 수코타이(태국), 2차 방어전에선 차르반타이(태국)를 각각 판정으로 누르고 타이틀을 방어했는데 차르반타이가 밴텀급 체중이 오버했던 사실이 다음날 밝혀져 경기결과가 무효로 처리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공석이 된 챔피언 자리를 놓고 필리핀의 에디 살로마와 대구에서 1973년 11월23일에 다시 타이틀매치를 벌여 판정승을 거뒀는데 당시의 필리핀 대통령 마르코스는 살로마가 이길 것을 기대하고 그에게 특별 트로피까지 만들어 보냈다고 한다.

승승장구하던 홍수환에게 마침내 세계 정복의 기회가 왔다.

서두에서 설명한 아놀드 테일러와의 일전.

'김기수 어머니'가 그토록 부러웠다던 '자기 어머니'의 한을 풀어준 엄청난 효도이면서 별다른 낙이 없었던 국민들에겐 더할 수 없는 기쁨을 선사한 국가적인 쾌거이기도 했다.

경기 장소인 남아공 더번까지의 직항노선이 없어 도쿄, 홍콩, 실론(현재의 스리랑카), 세이셀(인도양의 영연방 국가), 요하네스버그를 거치는 36시간의 비행 끝에 현지에 도착해 홈 관중의 열광적인 응원을 등에 업은 챔피언을 5번이나 다운시키면서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국민들의 가슴을 뿌듯하게 했다.

"그 경기의 파이트 머니(대전료)가 5,000달러였는데 돌아와서 우리 돈으로 바꾸니까 200만원이 되더군요. 그중에 어머니가 100만원을 달라고 하시길래 드렸더니 이걸 한국권투위원회에 기부하셨답니다. 제 어머니지만 참 대단한 분이지요. 나머지 100만원은 서울 갈월동에 전세방을 얻는데 썼습니다."

▲"4번 다운됐어도 맞은 것 같지가 않았어요"

1974년 12월23일, 페르디난도 카바넬라(필리핀)와의 1차 방어전을 판정승으로 장식한 홍수환의 2차 방어전 상대가 바로 그 악몽 같은 알폰소 자모라였다.

"지금 생각하면 창피하기도 하고 제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밥을 잘못 먹은 것도 아니고 꿀을 먹은 게 탈이 나 소중한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잃었으니까요."

그런데 홍수환은 그로부터 1년 7개월이 지난 76년 10월16일 자모라를 인천 선인체육관으로 불러들여 도전전을 치렀으나 12회 TKO패로 타이틀 획득에 실패했다.

11회까지는 그런대로 선전했지만 12회 들어 자모라의 연속된 펀치를 얻어맞으며 링사이드로 몰리자 멕시코인 주심이 경기를 종료시키고 자모라의 승리를 선언했던 것.

"그때나 지금이나 WBC 룰에는 분명히 한 라운드에 3번 다운이 돼야 KO를 인정하게 돼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주심이 제가 링에 몰렸다는 이유 만으로 자모라의 손을 들어줬으니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게임을 하다보면 링으로 몰리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는 건데. 그러다가 반격으로 돌아설 수도 있는 거고."

어쨌거나 이 경기의 패배로 홍수환은 자모라에게 10만 달러의 대전료를 지불했으니 그야말로 매 맞고 돈 잃은 결과가 된 셈이었다. 1년 7개월 전 LA에서 방어전을 치를 때 받았던 8만 달러를 고스란히 돌려주고도 2만 달러를 더 얹어줬다는 계산이 된다.

그의 총 전적 50전 41승(14KO) 4무 5패 가운데 2패가 자모라에게 당한 셈이다.

"복싱 인생을 이대로 끝내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론은 '아니다'였습니다. 밴텀급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 한 체급을 올렸지요. 주니어페더급으로. 그런데 마침 그때 WBA가 주니어페더급을 신설했지 뭡니까. 운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 거지요."

체급이 신설되다 보니 선수가 많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 그래서 성사된 '매치'가 바로 4전5기의 무대가 됐던 카라스키야와의 챔피언결정전이었다.

"하늘이 제게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고 정말 이를 악물고 훈련을 했습니다. 하루 3시간씩 도끼로 나무를 찍기도 하고 한 발을 땅에 대지 않고 다른 한 발 만으로 앉았다 일어나는 연습도
하루에 수십번씩 반복했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에는 허벅지가 바늘을 찔러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 지더군요."

카라스키야와의 경기 때 2회전에서 4차례나 다운됐을 때는 중계 아나운서조차도 '역부족'이라는 말을 했던 게 사실인데.

"당연하지요. 그리고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WBC 룰대로라면 사실 제가 3번째 다운됐을 때 경기는 자동으로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 17살짜리 어린 친구가 무슨 자신이 그렇게 있었던지 룰 미팅에서 무제한 다운제로 바꾸자고 우기는 거에요. 아마 저를 한 대라도 더 때려보려고 그랬던 거 같은데, 제 무덤을 제가 판 거지요."

게다가 한 발로 앉았다 일어나는 지옥훈련의 도움도 엄청나게 컸다고 한다.

"하체가 단단하니까 4번 다운이 됐는데도 전혀 맞은 것 같지가 않더군요. 정신이 좀 든다 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3라운드에 반격을 할 수 있는 힘이 있었던 거지요. 그래서 제가 예나 지금이나 후배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게 바로 하체훈련입니다."

3일 뒤 귀국해서는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대전료는 고작 3,000달러였다. 방어전도 도전전도 아닌 챔피언 결정전이었던 탓이다. 카라스키야도 물론 3,000달러.

▲옥희와는 1978년 1월부터 워커힐에서 동거해 1년 만에 헤어져

온 천하가 그의 세상이었다. 신문을 펼쳐도, TV를 틀어도 나오는 건 온통 '홍수환' 뿐.해가 바뀌어 78년이 됐다.

"그때부터 제가 옥희와 본격적으로 동거를 했습니다. 워커힐 펄룸(Pearl Room)에서요. 워커힐이 선경그룹 소유 아닙니까. 이름을 밝히긴 그렇지만 그 선경그룹 창업자 후손 중에 제 중앙고 동창이 있었거든요. 그 친구의 도움으로 거기서 훈련도 하고, 여자와 동거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이거 역시 제가 운이 좋았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설명한 대로 가사하라 유와의 도쿄 고라쿠엔 1차 방어전이 2월1일. 여자와 한창 동거 생활을 하다가 치른 게임에서도 그는 상대를 5차례나 다운시키며 간단히 타이틀을 방어했다. 파이트머니 2만 달러라는 '보너스'와 함께.

그리고 운명의 5월7일이 왔다. 리카르도 카르도나와의 2차 방어전.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자와의 동거 때문에 훈련을 게을리하거나 나태해지거나 한 것은 추호도 없습니다. 제가
교회 장로인 거 아시지요, 하늘을 두고 맹세합니다. 패인은 오직 하나, 1회전에 버팅을 당한 거 그겁니다. 아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앞이 보여야 상대를 때를 거 아닙니까. 세월이 흘렀다고 그럴 듯한 핑계를 대는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 결백합니다."

하지만 이 같은 홍수환의 속사정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슨 얘기를 해도 변명 내지는 핑계로 받아들여지니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사생활이 문란하다는 이유로 권투위원회로부터 징계를 받아 게임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실제로 1년이 훨씬 넘은 1980년 2월에야 염동균하고 마지막 게임하고 은퇴를 했으니까요. 그리고 옥희 하고는 78년 12월에 헤어졌습니다."

'천당에서 지옥으로'라고나 할까. 방랑의 세월이 시작됐다.

1980년대 초반에는 장정구(WBC 수퍼라이트급 챔피언)와 김철호(WBC 수퍼밴텀급 챔피언)의 지도자로 활약도 해보고 서울 신사동에 콘도
분양사무실을 내 사업도 해봤지만 '인생의 해결책 이 되지는 못했다.

"마침 미국 알래스카에 아는 분이 있어 그 분의 초청 형식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앵커리지 시내와 공항 만을 왕복하는 택시의 운전사로 근근이 먹고 사는데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오더군요. 역시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입니다."

택시 운전을 하면서 은둔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 '한국의 세계챔피언 출신 복싱선수'가 앵커리지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소문이 전해져 알래스카 주둔 미국 육군인 '포트 리처드슨'에 정식 복싱 코치로 부임을 하게 됐다는 얘기다.

"대우도 좋았습니다. 아주 편했고요. 거기서 87년까지 미군 장병들과 생활하다가 기왕이면 복싱 마케팅을 제대로 배워보자는 생각에서 LA로 거처를 옮겼지요. 돈 프레이저라는 유명한 프로모터 밑에서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이 정도면 한국에 돌아가서 한번 꿈을 펼쳐볼 수 있겠다 싶어 1992년에 영주권을 포기하고 귀국을 했던 겁니다."

"그래서, 꿈을 제대로 펼쳤나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국내에 돌아와 보니 제가 돈 프레이저에게서 배운 마케팅 기법을 활용할 만한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더군요. 복싱 시장이 미국보다 30~40년은 뒤져 있다는 사실을 그때 절감했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 그럭저럭 모아둔 돈으로 서울 방배동에 고기집을 차려 '호구지책'을 삼으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 1995년 1월 옥희씨와 재결합해 아들, 딸 하나씩을 두고 있다고 한다.

올해 한국 나이로 '60 고개'를 넘은 옥씨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왕성한 가창력을 보유해 지금도 '
가요무대'를 비롯한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한국복싱의 전성기 되살릴 터

'김기수 어머니'가 그토록 부러웠다던 어머니 황농선씨는 이미 94년에 타계했고 70년대 후반 '등대불이 왜 켜져 있는지 그대는 아시나요'라는 긴 제목의 노래로 인기를 끌었던 동생 홍수철씨(55)는 이미 오래전에 교회 목사가 돼 신앙 전파에 여념이 없다.

옛날 얘기만 하다 보니 정작 물어야 할 것을 묻지 못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현재의 근황과 앞으로의 포부.

"6년 전에 문을 연 이 체육관은 보시다시피 이렇게 성업중이고요. 그리고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지난 1월7일에 전국체육관관장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한국권투위원회 회장으로 추대를 받았거든요. 그런데 저와 뜻을 달리하시는 분들께서 그 회의의 절차를 문제 삼아 법원에 회장직무집행정지신청을 냈는데 이게 받아들여져서 저는 지금 회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에 대해서 항소를 해놓았으니까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빨리 해결이 돼야 할 텐데.

"꼭 제가 회장이 돼야만 복싱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어느 자리 어느 위치에 있던 우리나라 복싱의 화려한 전성기를 되살리는데 적으나마 힘을 보내고 싶습니다. 지금 일본만 해도 세계챔피언이 4명이나 되거든요. 우리는 한 명도 없지 않습니까. 저 같은 사람의 책임도 크겠지요. 어쨌거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느새 저녁이 되니 체육관에 훈련생들이 몰려와 샌드백 치는 소리가 아주 시끄럽다.

김석현 @naver.com

홍수환 약력

▲생년월일: 50년 5월28일 ▲학력: 수송초-중앙중-중앙고 

▲데뷔전: 1969년 5월12일(상대 김상일) 

▲주요전적: 1972년 6월4일 알 디얀(필리핀) 꺾고 밴텀급 동양챔프.

 73년 11월23일 에디 살로마(필리핀) 꺾고 동양챔프 복귀, 

74년 7월4일 아놀드 테일러(남아공) 15회 판정으로 꺾고 WBA 밴텀급 세계챔프. 

74년 12월28일 페르디난도 카바넬라(필리핀) 꺾고 타이틀 1차방어. 

75년 3월14일 알폰소 자모라(멕시코)에 4회 KO패 타이틀 상실. 

76년 10월16일 자모라에 도전전 실패(12회 TKO). 

77년 11월26일 헥토르 카라스키야(파나마) 3회 KO로 꺾고 WBA 주니어 패더급 챔프. 

78년 2월1일 가사하라 유(일본) 15회 판정으로 꺾고 1차방어. 

78년 5월7일 리카르도 카르노나(콜롬비아)에 12회 TKO패 타이틀 상실.

 80년 2월19일 염동균과 은퇴전서 무승부. 

통산전적 50전 41승(14KO) 4무5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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