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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건 조회 1,711회 작성일 2012-01-07 09:33
[j Focus] 한국서학회 명예회장 이곤(42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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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Focus] 한국서학회 명예회장 이곤

[중앙일보] 입력 2012.01.07 01:13

학교폭력 … 아이들이 먹 갈면 마음 부드러워질 텐데

[사진=박종근 기자]


그는 매일 먹을 간다. 직접 갈 때도 있고, 반백 년을 함께한 백발의 부인이 갈기도 한다. 또 한 해가 바뀌었지만 이 풍경은 수십 년째 그대로다. 이곤(82) 한국서학회 명예회장 얘기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 부모 밑에 태어나 탄압도 받고 전쟁도 겪었지만, 정작 무섭기는 요즘이 더하다고 했다. 세대 간 갈등, 학교폭력, 묻지마 살인 등…. 서울 이촌동 자택에서 만난 이 회장은 잠시 붓을 놓고 아내가 내어 온 원두커피를 마셨다. 달그락. 한 모금 마시고 한마디씩, 말은 되도록 신중히 하려고 한다.

“제가 감히 자격이 있다면 ‘심전경작(心田耕作)’이란 말을 해도 될까요. 마음의 밭을 간다는 뜻이에요. 그동안 바쁘게 사느라 남녀노소 모두 심성이 메마른 것 같아요. 사람들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인간미가 흘렀으면 좋겠어요.”

그가 서예를 주제로 오랜 시간을 들여 하려 했던 말은 결국 그것이었다. 중천에 뜬 해가 어느덧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글=이소아 기자

●서예의 매력이 뭘까요.

 “붓글씨는 단번에 사람의 인격과 성격, 인생관과 세계관이 모두 드러나요. 여기에는 숨을 곳이 없죠. 예민한 붓으로 얇은 종이 위에 딱 한 번 써야 하죠. 틀려도 고치거나 기댈 보조기구가 없고요. 오히려 그게 매력이죠.”

●전자책이 나오는 시대에 붓글씨가 설 자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실제 컴퓨터로 글꼴도 정하고, 묵색의 농담(濃淡) 처리까지 표현할 수 있어요. 서예가 위기상황이죠. 젊은이들에게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걸 우선 반성해야 해요. 하지만 인간의 마음을 기계로 나타내는 데엔 한계가 있어요. 서예는 심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예술이에요. 도덕이 무너지고 사회가 살기 힘들어질수록 우리는 점점 더 순수한 인간성을 추구하게 될 거예요.”

 이 회장은 한학을 두루 섭렵했지만 졸업장은 하나도 없다. 유·청년기를 보낸 시대가 너무 험했고 부모님은 그 시대에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이 회장의 부친은 함경남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두열 선생. 군산과 옥구의 3·1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해 옥고를 치렀다. 모친은 대한애국부인회와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에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정신여학교 교사 김영순 여사다. 두 분 모두 항일독립운동 대표들로 건국훈장을 받았다.

●어린 시절이 고되셨겠습니다.

 “(웃음) 국민학교 6학년 때 선생들이 창씨개명해야 졸업증명서를 써 준다고 했어요. 근데 당시 아버지는 창씨개명 반대연설을 하다 함흥 형무소에 들어가 계셨거든. 당연히 끝까지 반대하셨죠. 전 학교에서 밤낮 벌만 섰어요. 추워 죽겠는데 일본 동요 외고…. 일본인 교장이 교장실로 데려가서 뜨거운 물 한잔을 따라주면서 저더러 아버지를 회유해 보라고 했지만 끝내 안 됐죠.”

●부모님 원망은 안 했나요.

 “전 아버지를 정말 존경했어요. 일주일마다 한국 순사가 집에 와서 감시하고 갔는데 하루는 아버지께 큰절을 하더니 ‘연행하러 왔습니다’ 하더라고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혐의를 받은 거죠. 마당에 나가 수갑을 채우고 손까지 밧줄로 묶는데 많이 놀랐던 기억이 나요.”

●그래도 중등교육은요.

 “작은아버지가 아버지의 부탁으로 서울로 데려가 중앙학교에 보내줬어요. 1945년 4월에 입학했는데 영어 선생님이 늘 뒤통수를 탁 때리면서 ‘이놈 훌륭한 놈이야’ 하시던 기억이 생생해요. 그 학교가 반일(反日) 분위기가 강했는데 전교생 중에 저만 창씨를 안 했거든요.”

 그해 8월 해방이 되고 학교를 졸업하나 싶었지만 이번엔 한국전쟁이 터졌다. 청년은 애국심이 동해 생도를 모집하던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사관학교에서도 서예를 하셨나요.

 “전쟁 중이니 힘들었죠. 이러다 아버지가 어렸을 때 가르쳐 준 애국한시를 다 까먹겠다 싶어서 공사 노트에 한시를 써놨어요. 그런데 그게 딱 걸려서 교관한테 죽기 직전까지 맞았죠. 나중에 서울대 출신 교관이 때리는 걸 말리더라고요. 이거 읽어보니 애국시다, 나쁜 거 아니라고….”

 그가 전업 서예가로 정착한 것은 나이 쉰여섯 때였다. 다니던 하역 회사를 은퇴하고 사단법인 한국서학회를 만들어 한글서예를 연구하고 보급하기 시작했다. 서예가의 입장에서 일본이란 나라가 너무 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했다.

‘광개토대왕비’ 서체로 완성한 독립선언서 전문.
●어떤 점에서 그렇다는 거죠.

 “일본은 문화 선전이 대단했죠. 이건 딱 봐도 일본문화라는 걸 알 수 있도록 전통 문양과 색채, 자기네 ‘가나서예’를 전 세계에 홍보한 거죠. 고흐나 모네 같은 화가들도 일본문화에 반할 만큼요. 예술을 통해 나라를 알리는 실력이 탁월한 거죠.”

 이곤 회장은 지난해 10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2년 넘게 준비해서 한글과 한문작품 100여 점을 전시했다. 이 중 사람들의 눈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벽 하나를 모조리 차지한 ‘독립선언서’였다. 전지 24장을 이어 붙인 것으로 문체 공부에 4년, 쓰는 데에만 7개월이 걸린 역작이다.

●수십 년간 서예를 해오셨는데 이번이 첫 전시회라니 의외네요.

 “개인전이야 60·70세에 한 번, 회고전 한 번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때마다 위암·전립선암으로 고생을 해서 이제야 하게 됐어요.”

●무슨 문체를 4년씩 공부했어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를 연구해 익힌 ‘호태왕비서체’예요. 우리가 가장 강력했던 시기의 그 자존감을 담고 싶었어요. 고문을 뒤지고, 거의 매일 국립박물관을 오가고…. 원래 한글은 없는 건데 새로 적용해 쓰려니까 공이 많이 들더라고요.(웃음)”

●존경하는 서예가는요.

 “사람 글씨는 기본적으로 자기만족이에요. 그게 보편적·객관적으로 인정되면 훌륭한 거죠. 개인적으로 추사 김정희 글씨를 초격이라고 봅니다. 격을 뛰어넘는 완숙함이고 그게 바로 ‘참신’이에요. 그러려면 생활이 곧 예술이어야 하죠.”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해야 서예가 보통 사람들과 더 가까워질까요.

 “바로 그 일을 하려고 해요. 서예는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힘이 있어요. 좋은 글귀를 보고 먹을 갈아 붓을 적셔 글씨를 쓰면 마음이 부드러워지거든요. 대만에는 이미 서예치료학과가 있어요. 돌아가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도 아침에 한 시간씩 서예를 했다죠. 아이들한테도 어른들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올해부터 아이들과 성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려고 현재 교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답니다. 응원해 주세요.” 


WhatMattersMost?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


“우리 마누라 이영희요. 너무 고맙고 소중합니다. 평생 서예를 하니까 먹 가는 게 일인데 집사람이 하루 3시간씩 30년 넘게 먹을 갈았어요. 이 일을 오래 해서 그런가 농도를 기가 막히게 잘 맞춰요. 직접 글씨는 안 써도 작품을 보는 안목은 대단해요. 아마 나 없을 땐 내 작품 보고 욕도 많이 하겠지. 허허허.”

j칵테일 >>
“한·러 대통령이 꼭 전시회 보게…”

한글서예를 해외에 알리는 데 2005년 모스크바대 개교 250주년은 탐나는 기회였다. 이곤 회장은 3년 전부터 접촉을 시도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주변에선 ‘세계에서 제일 보수적이고 콧대 센 곳이 모스크바대’라며 포기하라고 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모스크바대 한국학 국제학술센터 소장인 미하일 박 교수에게 편지를 썼다. 박 교수는 “내 평생 온갖 설움을 다 받았는데 (전시회를 성사시키는) 이걸로 보상받고 죽겠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그로부터 7개월 뒤 드디어 ‘사도브니비치 총장이 한번 보잔다’는 연락이 왔고 이 회장은 한걸음에 러시아로 달려갔다. 그는 총장 앞에서 서예로 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시를 펼쳐 보였다. 죽어라 연습해 러시아어로 쓴 작품이었다. 총장은 러시아의 국민시인 푸시킨의 작품에 크게 감동했고 결국 모스크바 제2 국립박물관에서 ‘아름다운한글서예러시아전’을 열기로 했다. “너무 좋아서 울었어요.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믿어왔는데… 감격스러웠어요.” 박물관 측은 작품들을 기증해 줄 수 있는지 물었고 이 회장은 두 가지 조건을 걸었다. “몇 년 간격이 됐든 정기적으로 기획전시를 열어주세요. 그리고 혹시 한국 대통령이 오면 꼭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전시를 보게 해주세요.” 박물관장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며칠 뒤 서신을 보냈다. “확답을 드릴 순 없지만 최대한 노력해서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솔직히 이건 엄청난 제안입니다. 그런 조건을 건 사람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현명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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