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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534회 작성일 2008-05-02 09:32
[문화저널21] 이수화(51회),세상을 향해 외치는 바람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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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화(51회),세상을 향해 외치는 바람의 노래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부이사장 이수화 시인을 만나다.
 
최재원기자
↑광화문에 있는 작업실에서 글을 쓰는 있는 이수화 시인 © 최재원기자
 광화문거리에 봄을 깨우는 소리가 아스팔트를 적시는 한적한 주말 오후 이수화 시인(69)을 찾았다.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광화문 거리가 내다보이는 피맛골의 한 빌딩에서 창밖의 내리는 비를 보며 시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현재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1963년 ‘현대문학’으로 데뷔해 46년간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중견시인이다. 당시 등단했던 작가가 200여 명에 불과했던 점을 생각한다면 보통은 아니다. 또한, 젊은 시절에는 잘나가는 라디오 방송작가로도 이름을 떨치며 스타작가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6·25전쟁 휴전 후 아현초등(당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앙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문예반서 학교 교지인 계우(桂友)에 참여하게 되면서 문학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1학년이었던 그는 자신이 쓴 ‘봉은사’라는 시가 당시 국어를 담당하던 김열규(수필가) 씨에게 극찬을 받게 되면서 문학도로서 적극적인 활약을 시작하게 된다.. 그가 문예부 부장을 맡던 당시(1959년) 서울대학교에서 최초로 개최한 전국고교교지 대회에서 일등상을 차지했다. 당시 우승컵이 아직도 모교 교장실에 전시되 있을 만큼 큰 대회였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당시를 생각하면 온몸에 전율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어린 나이에 당대 문단의 쌍벽을 이룬다는 ‘未堂’선생과 ‘東里’선생을 모시고 교지 ‘계우’ 발간기념 석조전문학 밤을 3년여 간 열곤 했고, 그가 발표한 시를 두 선생이 칭찬했을 때 기고만장하기만 하기도 했다. 사실 그는 미당 서정주 선생의 추천으로 1963년 등단을 하게 됐고, 동리 선생의 그가 상을 받을 때 직접 찾아와 축하하기를 마다치 않던 분이라고 한다. 적지 않은 시간을 문단과 보내온 그에게 옛 문단이야기와 시인으로써의 삶을 들어봤다.


그때 그 시절 문단 이야기

이수화 시인이 기억하는 1960년대 문단의 모습은 평화롭고 따뜻했다. 그가 등단 했던 60년대 문단은 시인으로 이름을 떨치던 몇몇 선생들과 제자들로 문단의 성격이 갈려져 있었지만 지금의 파벌 개념이 아니였다고 한다. "당시 문단은 순수한 작품경쟁을 하기에도 벅찼고 배고팠던 시절이였다. 지금이야 등단 인원이 20,000여 명 이상이 되고 국가가 풍요로워 지면서 지역, 학벌간 파벌도 생기는 등의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지만 당시 등단작가가 200여 명에 불과했던 그 시절에는 작가들간에 견제할 겨룰도 없었다. 오히려 새로 등단한 작가가 있으면 그게 누구이든지 선후배간에 막걸리 한사발과 깍두기 안주를 주고받으며 축하하고, 서로의 작품을 평가하며 덕담을 나누는 게 전부였다."며 지금의 문단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음을 강조했다.
 
이어 그는 "당시 서로 간의 문단활동이나 작품활동에 도움을 주고자 조언하고 배려하는 아름다운 모습들만 기억에 남는다."며 "지금도 그 시절을 회상하면 가슴이 따뜻해 지는것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수화 시인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 이야기

↑ 이수화시인  © 최재원기자
1963년 현대문학 1월호에 초회 추천을 받은 졸작 ‘바람의 노래’는 한 소녀에 대한 시적 체험 이야기입니다. 1959년 12월 24일 성탄 이브에 문예모임의 한 소녀로부터 성탄절 모임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장소는 기구하다는 말을 써야 할만치의 종삼(지금은 없어진 단성사 뒤편 창녀촌) 지대에 있는 소녀의 고모 댁이었습니다.
 
소녀의 고모는 독실한 가톨릭 독신으로 신자수업을 하면서 창녀촌의 포주 집 문간에 방을 하나 세 얻어 살고 있었는데 소녀를 따라 창녀촌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골목 안으로 사나이들을 끌어들이는 창녀들이 하얀 소복차림(성탄전야에 가톨릭 여성 신자들이 입는 옷)의 소녀가 학생모를 쓴 소년을 끌어들이는 것에다 대고 낄낄거리고 있었고 소녀는 어둠 속에서 꽃처럼 웃었습니다. 소년과 소녀는 소녀의 고모방으로 들어가 이웃방에서 사나이들이 탕유하는 소리를 지겹도록 듣고 있었는데, 소녀의 고모님은 밤이 이슥해지도록 돌아올 줄 몰랐으며 우리는 그 고모님이 수녀가 될 수도 없고 안 될 수도 없는 기막힌 사연과 앨범과 포도주와 플라토닉 러브에 대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며칠 뒤 나는 ‘바람의 노래’라는 시를 썼습니다.
 
153행의 이 장시는 그해 전국고교생 문예 콩쿠르에서 미당 선생과 고 양주동 박사에 의해 수석 당선되었고 그 뒤 미당 선생의 추천으로 초회 추천작품이 된 처녀작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만남과 헤어짐, 남녀의 사랑, 사회 이런 모든 것이 섹스나 아름다움이나 고매한 인격 같은 것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어떤 불가사의 성에 의해 성취된다는 자기 확신이며 시인의 도덕심의 소산을 것입니다.


시(詩)를 버렸던 부끄러운 시절, 방송작가 이수화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수화 시인은 라디오 방송작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시인으로 등단하기 전인 1962년 KBS 1라디오 연속방송극 <압록강의 피가 마르기 전에>로 데뷔해 그 뒤로 약 20여 년 동안 방송작가로 활동했다. 그는 20여 년의 방송작가 활동을 자만했던 시절이라 말한다. 당시 KBS 드라마 당선작은 당시 금액으로 50여만 원정도 받았기 때문에 결혼자금과 기타 생활자금까지 넉넉하게 벌 수 있었고, 60, 70년대 라디오 드라마는 전 국민이 다 듣고 있을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었기에 드라마작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돈과 인기를 실감해서일까? 그는 당시 시절을 시(詩) 쓰기를 잊어버린 부끄러운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그가 시인 이수화로 돌아온 건 흑백TV시대가 가고 컬러TV시대가 왔을 때 쯤이다. 그는 "주위에 함께 드라마 시나리오 작업을 하던 선후배들이 과로로 작고하면서부터 이건 내가 원하는 문학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드라마 작가는 마감, 분량등 심리적인 압박감에 시달리며 결국 내가 원하는 작품을 만들지 못한다."며 당시 시인 이수화로 돌아온걸 다행이라고 말한다.

▲'좋은문학' 김순복 발행인(좌)과 이수화 시인(우)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 최재원기자
 
사람의 감정을 부추기기보다는 진실을 가진 작가가 되라.
 
이수화 시인은 평소 문단에 등단하는 젊은 작가들에게 평생을 걸고 글을 쓰려는 각오를 굳게 하라고 조언한다. 그는 최근 젊은 작가들이 문학을 지적 액세서리쯤으로 생각하고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태도를 비판하며,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는 문학작품집을 낼 때 작품해설도 없이 달랑 자기 작품만 내는 것보다 문학평론가나 선배들로 부터 정확한 평가를 받아 책을 내는 것이 좋다"고 충고한다. 그는 젊은 작가들에게 "베스트셀러작가가 되는 것도 좋지만 단순히 사람의 감정을 부추기기보다는 진실을 가진 진정성의 문학을 다루는 작가가 되기를 바란다"며 자신의 젊은 시절 경험을 빗대어 후배들에게 조언한다고 말한다.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부이사장 이수화 시인
 
한국의 문단은 크게 4가지 협회로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예술총연합회로 그 성격과 스타일이 나뉜다. 이수화 시인은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이하 펜클럽협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른 협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가 활동영역을 옮긴 건 다양한 문학적 접근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물론 이유야 여러 가지 가 있겠지만 전에 활동하던 협회의 몸집 부풀리기를 질타하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그는 "예전보다 협회 가입조건이 너무 허술한 것 같다."라고 말하며 "예전에는 보통 시인이 등단을 하고 협회에 가입하려면 최소 5년 정도의 활동이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부 협회에서 많은 회원 수를 확보하기 위해 1년 정도의 문단경력만 있으면 별 조건 없이 가입이 승낙된다."라며 현 문학 협회들의 몸집 부풀리기를 꼬집었다. 
 
이어 "그 외에도 문단의 잘못된 현실을 비판하고 바로잡고자 '펜클럽협회 부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임기가 올해로 끝나지만 기회가 된다면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싶다."라며 이사장직에 대한 계획을 간접적으로 내비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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