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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524회 작성일 2008-03-14 09:38
[주간동아] 화정 김병관(45회) 선생 기리는 지인들의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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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 김병관(45회) 선생 기리는 지인들의 회고


“만정(晩汀) 김소희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것입니다. (한숨 몰아쉬고) 고나헤~ 성화로구나헤~ 아깝다 내 청춘, 언제 다시 올거나, 철 따라 봄은 가고, 봄 따라 청춘 가니, 오는 백발을 어이를 할거나….”

가슴 깊이 취기가 젖어들면 화정 김병관(化汀 金炳琯) 선생은 구슬프게 ‘흥타령’을 불러젖혔다. 안숙선 명창은 “아주 걸쭉하고 자신 있게 잘 부르셨다. 참 멋있는 분이셨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우리 음악을 사랑하고 즐길 줄 아는 분이셨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이젠 화정의 ‘흥타령’을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됐다. 그는 2월25일 오전 9시40분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향년 74세의 나이로 이승을 떠났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애달파하는 지인들과 각계 인사들의 발길이 고려대 안암병원에 마련된 빈소에 4일장이 끝나는 28일까지 나흘 밤낮 끊이지 않았다.

1995년 2월25일 당시 김병관 동아일보 회장(앞줄 왼쪽)이 중국을 방문, 리펑 총리와 환담을 나누고 있다.

화정은 1934년 7월24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중앙고와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68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그는 총무국 광고국 판매국을 거쳐 85년 부사장, 87년 발행인, 89년 사장, 93년 회장, 2001년 명예회장을 거치면서 33년 동안 신문경영 일선을 지켰다. 그 길은 가시밭길이었고 고통이었다.



발행인 시절 박종철 사건 터져 … 정론직필 버팀목 구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화정을 기리는 추모사에서 “화정 선생에게 동아일보는 3대를 이어온 영광스러운 가업(家業)인 동시에 벗어던질 수 없는 무거운 십자가였다. 창업주 인촌 김성수 선생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의 어둡고 고통스러웠던 시기에 출발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역사를 헤쳐온 역사 깊은 신문의 운영을 책임지는 중압감에서 잠시라도 몸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위로했다.



화정은 자신의 삶을 오롯이 한국 언론 민주화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아일보 배인준 논설주간은 2월26일자 추모기사에서 화정의 과거사 한 토막을 소개했다.

동아일보 인쇄소에서 48면 합쇄돼 나온 신문을 살펴보는 김병관 회장. 그는 영원한 ‘신문인’이었다.

‘그가 동아일보 발행인이 된 1987년 경찰이 서울대생 박종철 군을 고문치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엄혹했던 그해, 1월19일자 동아일보는 ‘물고문 도중 질식사’ 제하에 1면 전체를 이 사건 관련 기사로 채웠다. 그뿐 아니라 당시 발행면수 12면 중 6개 면에 걸쳐 국가 공권력의 만행을 고발했다. 동아일보가 연일 터뜨린 고문치사 사건 속보는 그해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그때도 화정은 동아일보 기자들의 버팀목이었다.’

‘정론직필(正論直筆)’과 ‘공선사후(公先私後)’는 그가 평생 지켜온 소신이다. 이 소신은 그의 생활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정일 전 국회의원은 화정의 절친한 지인 중 한 명이다. 화정의 부인 안경희 여사 생전에는 내외가 함께 해외여행을 자주 다녔다. 이 전 의원의 기억 속에 화정은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는’ 언론인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이 전 의원의 회고다.

“그분은 불의와 타협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허허실실 웃더라도 자기 주관이 분명했다. 평소 술을 좋아했지만 취중에도 편집국장이 상의해오면 전혀 흐트러짐 없이 항상 공정하고 불편부당한 입장에서 냉정하게 지시했다. 다른 것은 양보해도 기사에서만큼은 양보란 없었다. 1990년 노태우 전 대통령 재임 중 3당 합당을 할 때도, 김대중 정부 때도 권력에 문제가 있으면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언론을 떠나서 다른 무엇을 할 수 없는 분이었다.”



화정의 초등학교 동창으로 60년 가까이 희로애락을 함께한 이상혁 변호사는 “투박한 얼굴에 말은 없고 눈만 껌뻑거려 남들에겐 무뚝뚝해 보였겠지만, 잔정이 많은 사람이었다”면서 “어느 여행지를 가든 1000~2000원 하는 값싼 기념품을 사가지고 와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직원들에게 나눠주곤 했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2월27일 서울 고려대 안암병원에 차려진 고 김병관 회장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이 변호사에게 화정은 로맨티스트이자 센티멘털리스트였다. 이 변호사에겐 잊지 못할 장면이 하나 있다. “한번은 술을 마시다가 불을 끄고 빛이 들어오지 않게 (방)문을 닫으라고 했다. 그리고 위스키 잔에 불을 붙이니까 어두운 공간에 파란 ‘유령불’이 피어올랐다. 그 앞에서 노래를 구슬프게 부르는데, 그런 시인이 어디 있나 싶었다. 정말 감명받았다. 어젯밤(2월25일) 집에서 똑같이 해봤다. 그 장면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술자리를 즐기면서도 화정은 근검절약했다. 회식자리에서 음식이 남으면 싸서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여행을 다닐 때는 되도록 고급호텔보다 깨끗하면서도 저렴한 호텔을 선호했다. 화정의 여행길에 자주 동반했던 오정소 전 국가보훈처장이 들려주는 일화 한 토막.

“그분은 호기심이 많아 평소 해외여행을 즐겼다. 네팔에 갔을 때의 일이다. 호텔방에 들어가 안내책자를 보고 숙박비가 300달러 정도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다른 호텔로 옮기자고 했다.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했다.”

그 엄격함은 과묵한 화정의 모습과도 통한다. 고려대 총장을 역임한 홍일식 한국인문사회연구원장은 화정을 이렇게 기억했다.

국립극장과 손잡고 ‘창작 창극운동’ … 국악 발전에도 한몫

“평소 말수가 적고 속이 깊어 정충(貞忠)한 맛이 있다. 좀처럼 자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 주변에서 오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옆에서 오래 지켜본 사람은 그의 성품을 잘 안다. 한번 마음먹으면 평생 변하지 않는 뚝심 있는 사람이다. 말보다는 행동이나 실천이 앞서는 사람이다.”

2월28일 오전 고려대 화정체육관에서 열린 고(故) 김병관 회장 영결식.
화정은 그 뚝심과 실천력으로 많은 것을 일궜다. 1989년 사장 시절, 그가 국립극장과 손잡고 펼친 ‘창작 창극운동’은 척박했던 국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해외 순회공연을 통해 세계적으로 큰 호응을 얻은 창극 ‘아리랑’을 비롯해 임꺽정, 안중근 , 김구, 홍범도, 전봉준 등이 그의 후원으로 재조명됐다.



1998년 10월 북한에 다녀온 화정은 사재를 털어 ‘화정평화재단’과 ‘21세기 평화연구소’를 설립했다. 얽히고설킨 한반도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인 99년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에 취임한 그는 ‘민족 고대’를 ‘세계 고대’로 키우기 위해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 결실이 바로 2005년 고려대 개교 100주년을 맞아 조성된 안암캠퍼스 중앙광장과 새롭게 지어진 ‘100주년 기념관’ ‘화정체육관’이다. 화정과 40년 지기인 김명하 K-BRAIN커뮤니케이션즈 회장은 “화정은 고려대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많은 애정을 쏟았다”면서 “기념행사는 그의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고 말했다.

화정은 올해 중앙중·고교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고 인문학 발전을 위해 공사 중이던 ‘인문학박물관’의 공사 진척 상황을 병상에서까지 직접 챙겼다.

하지만 그는 고독했다. 2001년 7월 김대중 정권의 세무조사와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아내를 잃은 슬픔은 쉽게 아물지 않았다. 김 회장은 “얼마 전 (화정을) 만났더니 생전에 부인에게 더 잘하지 못한 것을, 입이 무거워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꿈에서나마 얼굴을 보려고 아내를 생각하면서 잠드는데, 엊그제는 내 옷도 챙겨주고 하더니 어제는 보이지 않았다’는 말에 마음이 아팠다”고 전했다.

화정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자유 언론과 교육의 미래를 걱정했다. 식도암 수술을 받아 목소리를 잃은 그가 육필로 고대 학사일정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장례절차를 간소화하라고 당부했다는 한 유족의 이야기는 듣는 이를 절로 숙연케 한다. 그가 떠나던 날, 하루 종일 내린 눈은 그를 위한 축복이었으리라. ‘고나헤~ 성화로구나헤~.’ 화정이 떠난 이승 어디선가 ‘흥타령’ 한 자락이 구슬프게 흐르는 듯하다.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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