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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형 승인 2018.06.29 15:34
박민오 생애·독립운동 조명
통도사 출가해 중앙학교 수학
3·1운동 때 만세 시위 주도
1932년 하버드대 박사 취득
‘동양의 마크 트웨인’ 평가도
미국 하버드대학의 첫 한국인 박사는 통도사 승려 출신으로 3·1운동 때 학생 대표로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고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활동했던 박민오(朴玟悟, 1897~1976)인 것으로 나타났다.
황인규 동국대 역사교육학과 교수는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가 6월29일 서울 견지동 템플스테이통합정보센터에서 개최한 학술세미나에서 박민오의 생애와 독립운동을 조명했다.
박노영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던 박민오는 만해 스님과 인연이 깊었으며, 백성욱, 김법린, 신상완, 김상헌 등과 더불어 불교계를 대표할 정도로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21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는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학문에 뜻을 세워 미네소타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하버드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연구해 1930년 석사학위를, 1932년에는 박사학위를 각각 취득했다. 한국인 최초로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문학에도 자질이 뛰어나 ‘동양의 마크 트웨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전한다.
논문에 따르면 박민오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이라는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일생을 치열하게 살았던 입지적인 인물이다. 1897년 경남 남해 섬마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1살 때 집을 나와 양산 통도사로 향했다. 그곳에서 출가한 그는 통도사에 6년간 머물렀고, ‘옥돌 같은 깨달음’이란 의미의 ‘민오(旼悟)도 이때 받은 법명으로 추정된다. 통도사 주지였던 구하 스님이 서울 중앙학교(중앙중·고등학교 전신)를 인수해 교장을 맡고 있던 인촌 김성수에게 박민오를 추천함으로써 입학할 수 있었다.
인촌은 자신이 거주하던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50여명의 학생들과 세계정세 및 민족 장래에 대한 토론을 이어갔다. 실제 3·1운동에 대한 논의가 이곳에서 이뤄지고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데에서도 중앙학교의 민족적 성격이 잘 드러난다. 당시 중앙학교 4학년 급장을 맡았던 박민오는 행동대장 역할을 맡아 독립선언서 배포와 민중동원에 총력을 기울였다.
특히 승려였던 그는 전국 불교계의 총궐기를 위해 결성된 전국불교도독립운동 총참모본부의 참모를 맡아 중앙학림(동국대 전신)의 신상완, 백성욱 등과 함께 3·1운동을 진두지휘했다. 박민호는 3·1운동 전날 만해가 서울 계동 자택으로 긴급히 불러 서울과 전국 각지 승려 및 신도들을 총동원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대책을 논의할 때 참석할 정도로 만해의 신뢰를 받았다.
박민오는 3·1운동의 시작과 더불어 중앙학교 학생 등과 협력해 혁신단을 결성하고 ‘혁신공보’를 매일 발행해 독립운동을 고취시켜나갔다. 나중에는 또 다른 지하신문인 ‘자유신종보’의 제작과 배포에도 적극 참여했으며, 독립 자금도 모금했다. 특히 1919년 9월에는 혁신단 특파원의 임무를 띠고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때마침 국내에서 혁신단의 독립운동자금 모집 등이 탄로되면서 백초월, 백성욱 등이 체포됐고 박민오는 곧바로 수배대상으로 떠올랐다. 그는 한동안 임시정부의 일을 도왔지만 그곳도 재정적 어려움을 겪자 금릉학교를 거쳐 1921년 뉴욕으로 건너갔다.
황 교수는 박민오가 환속한 것을 이 무렵으로 추정했다. 그는 인쇄공, 행상, 접시 닦기로 생활비를 충당하면서도 공부에 뜻을 두어 에반스빌대학, 노스웨스턴대학을 거쳐 미네소타대학에서 학사학위를, 하버드대학에서 석·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박민오는 국제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중국인의 기회’ 등 저서를 잇달아 출간해 호평을 받았으며, 동양학 분야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그는 글을 쓰고 동서 문화의 상호 이해에 앞장서다가 1976년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져 있다.
황인규 교수는 “박민오는 불교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뛰어난 독립운동가였다”며 “박민오라는 인물이 근대 불교계와 독립운동사에서 위상이 새롭게 정립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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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100년사 213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