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자신에겐 인색했던 仁村… 농지개혁법 지지하며 900만평 헌납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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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자신에겐 인색했던 仁村… 농지개혁법 지지하며 900만평 헌납
- 입력 2018.07.21 03:00
[김동길 인물 에세이] (35) 김성수(1891~1955)
일러스트=이철원
내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한국 현대사의 길목을 지키고 서 있다가 한평생 존경하던 인촌(仁村) 김성수에 대하여 한마디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인촌은 일제하의 35년과 해방 후의 10년을 오로지 나라 사랑의 정신으로 일관한 겨레의 큰 스승이었다.
인촌 김성수는 1891년 전라북도 고창에서 조선조의 저명한 성리학자이던 김인후의 13대손으로 태어났고 그 할아버지도 군수를 지낸 바 있다. 아들이 없던 백부의 양자로 들어가 김연수와는 친형제이지만 사촌이 되었다. 그러므로 인촌은 가히 호남의 명문 태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열세 살 때 다섯 살이나 연상인 고광석과 결혼하였고 전라남도 담양군에 있는 창흥의숙에서 신학문을 접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 의숙에서 인촌은 한평생 친구요 동지인 송진우를 만나게 된다. 일본 유학의 필요성을 절감한 인촌은 송진우와 함께 동경 유학길에 올랐다. 그들은 정칙영어학교에 다니며 영어와 수학을 공부하였고 와세다대에 입학했다. 한일합방의 비보도 거기서 접하였다. 인촌이 와세다대에서 사귄 친구들은 장덕수, 신익희, 안재홍, 김병로, 김준연 등이었다. 1914년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졸업한 뒤 곧 귀국한 그는 조국을 위해 해야 할 일의 청사진을 마련하였다. 나이는 스물네 살밖에 안 되는 젊은이였지만 그의 꿈은 2000만 동포의 살길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혁명가 손문이 삼민주의를 제창한 것처럼 그의 머릿속에도 '민족, 민권, 민생'을 살리는 것이 절실한 과제였다.
나는 중앙고보에 다닌 적도 없고 보성전문에 입학한 적도 없지만, 인촌 김성수를 마음속 스승으로 모시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947년인가 1948년의 일로 기억되는데 3·1절 기념행사가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되어 나는 대학생의 한 사람으로 그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그때 인촌이 단상에 올라가서 던진 한마디가 족히 70년이 지난 오늘도 내 가슴속에 메아리치고 있다. 요약하면 이런 말이었다. '여러분, 전체주의나 독재 체제에서는 모든 일이 즉시에 해결되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는 일이 되기는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라는 한마디였던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평범한 말이지만 김일성의 하는 일을 내 눈으로 보고 월남한 나로서는 남조선의 모든 일이 느리게만 느껴지고 답답하게만 생각되던 터에 그 해답을 얻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인촌을 나의 스승 중 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인촌은 비록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자기를 위하여는 동전 한 푼도 아껴 쓰고 남몰래 독립운동 자금도 마련해 전달하였고, 가난한 학생을 돕는 일에 가진 것은 아낌없이 주었다. 특히 대한민국 헌법 기초위원 중 한 사람이던 고려대학 교수 유진호가 들고 온 농지개혁법에 동의함으로써 그는 자진하여 3000정보(町步)가 넘는 막대한 농토를 국가에 헌납한 셈이다. 그러고도 인촌은 단 한 번도 공치사를 한 일이 없었다. 1940년을 전후하여 인촌 김성수가 항일에서 친일로 방향을 전환한 것처럼 비방하는 몰지각한 사람들이 있는 건 사실이다. 강요에 못 이겨 라디오를 통하여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학병에 나가라고, 징병에 응하라고 권고한 일이 있다고 비난하는 자들이 있지만, 오죽 탄압과 협박이 심했으면 그런 방송을 하였겠는가 짐작해 볼 만한 아량은 없는가. 그가 당시의 신문과 잡지에 학병에 나가라고 권하는 글을 쓴 것이 있다고, 또는 징병제도를 찬양한 적이 있다고 인촌을 매도하는 자들도 있지만 생각하여 보라. 학생들을 이끌고 조선신궁을 찾아가 참배 아닌 참배를 한 일제하 기독교 학교의 교장들이 그 일을 원해서 했겠는가. 유명한 친일파 박춘금이 시내 식도원에서 인촌을 청해 놓고 권총을 휘두르며 일본 제국주의에 협조하라고 공갈 협박을 하였다는 사실을 아는가!
인촌 김성수의 64년의 삶은 우리 모두에게 무슨 특별한 뜻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인촌은 일제하 35년을 이 나라 지식인 선각자의 한 사람으로 고통스럽게 살았을 뿐 아니라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해방 뒤 혼란한 정국 속에서 그래도 대한민국의 제2대 부통령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지만, 당시의 자유당 정권이 그의 사상과 이념과는 거리가 먼 것이어서 임기가 차기도 전에 그 자리를 물러났다.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는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앙앙불락 지칠 대로 지친 인촌은 병을 얻어 20년을 더 살아야 할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손문의 삼민주의를 실천에 옮겨 보려고 온갖 시련을 다 겪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실패했다고 자인하였다. 본디 정치인이 아니었던 인촌은 정치인으로는 실패했지만, 중앙학교와 고려대학은 아직도 민족의 역군들을 길러내고 있고 그가 나이 30에 일궈놓은 동아일보는 오늘도 이 나라 굴지의 언론기관 중 하나로 국민의 존경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성장이 눈부신 시대를 맞이했지만, 경성방직은 국민의 경제생활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으니 누가 감히 인촌의 일생을 실패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인촌 김성수를 생각하며 나는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인촌 김성수는 1891년 전라북도 고창에서 조선조의 저명한 성리학자이던 김인후의 13대손으로 태어났고 그 할아버지도 군수를 지낸 바 있다. 아들이 없던 백부의 양자로 들어가 김연수와는 친형제이지만 사촌이 되었다. 그러므로 인촌은 가히 호남의 명문 태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열세 살 때 다섯 살이나 연상인 고광석과 결혼하였고 전라남도 담양군에 있는 창흥의숙에서 신학문을 접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 의숙에서 인촌은 한평생 친구요 동지인 송진우를 만나게 된다. 일본 유학의 필요성을 절감한 인촌은 송진우와 함께 동경 유학길에 올랐다. 그들은 정칙영어학교에 다니며 영어와 수학을 공부하였고 와세다대에 입학했다. 한일합방의 비보도 거기서 접하였다. 인촌이 와세다대에서 사귄 친구들은 장덕수, 신익희, 안재홍, 김병로, 김준연 등이었다. 1914년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졸업한 뒤 곧 귀국한 그는 조국을 위해 해야 할 일의 청사진을 마련하였다. 나이는 스물네 살밖에 안 되는 젊은이였지만 그의 꿈은 2000만 동포의 살길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혁명가 손문이 삼민주의를 제창한 것처럼 그의 머릿속에도 '민족, 민권, 민생'을 살리는 것이 절실한 과제였다.
나는 중앙고보에 다닌 적도 없고 보성전문에 입학한 적도 없지만, 인촌 김성수를 마음속 스승으로 모시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947년인가 1948년의 일로 기억되는데 3·1절 기념행사가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되어 나는 대학생의 한 사람으로 그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그때 인촌이 단상에 올라가서 던진 한마디가 족히 70년이 지난 오늘도 내 가슴속에 메아리치고 있다. 요약하면 이런 말이었다. '여러분, 전체주의나 독재 체제에서는 모든 일이 즉시에 해결되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는 일이 되기는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라는 한마디였던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평범한 말이지만 김일성의 하는 일을 내 눈으로 보고 월남한 나로서는 남조선의 모든 일이 느리게만 느껴지고 답답하게만 생각되던 터에 그 해답을 얻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인촌을 나의 스승 중 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인촌은 비록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자기를 위하여는 동전 한 푼도 아껴 쓰고 남몰래 독립운동 자금도 마련해 전달하였고, 가난한 학생을 돕는 일에 가진 것은 아낌없이 주었다. 특히 대한민국 헌법 기초위원 중 한 사람이던 고려대학 교수 유진호가 들고 온 농지개혁법에 동의함으로써 그는 자진하여 3000정보(町步)가 넘는 막대한 농토를 국가에 헌납한 셈이다. 그러고도 인촌은 단 한 번도 공치사를 한 일이 없었다. 1940년을 전후하여 인촌 김성수가 항일에서 친일로 방향을 전환한 것처럼 비방하는 몰지각한 사람들이 있는 건 사실이다. 강요에 못 이겨 라디오를 통하여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학병에 나가라고, 징병에 응하라고 권고한 일이 있다고 비난하는 자들이 있지만, 오죽 탄압과 협박이 심했으면 그런 방송을 하였겠는가 짐작해 볼 만한 아량은 없는가. 그가 당시의 신문과 잡지에 학병에 나가라고 권하는 글을 쓴 것이 있다고, 또는 징병제도를 찬양한 적이 있다고 인촌을 매도하는 자들도 있지만 생각하여 보라. 학생들을 이끌고 조선신궁을 찾아가 참배 아닌 참배를 한 일제하 기독교 학교의 교장들이 그 일을 원해서 했겠는가. 유명한 친일파 박춘금이 시내 식도원에서 인촌을 청해 놓고 권총을 휘두르며 일본 제국주의에 협조하라고 공갈 협박을 하였다는 사실을 아는가!
인촌 김성수의 64년의 삶은 우리 모두에게 무슨 특별한 뜻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인촌은 일제하 35년을 이 나라 지식인 선각자의 한 사람으로 고통스럽게 살았을 뿐 아니라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해방 뒤 혼란한 정국 속에서 그래도 대한민국의 제2대 부통령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지만, 당시의 자유당 정권이 그의 사상과 이념과는 거리가 먼 것이어서 임기가 차기도 전에 그 자리를 물러났다.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는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앙앙불락 지칠 대로 지친 인촌은 병을 얻어 20년을 더 살아야 할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손문의 삼민주의를 실천에 옮겨 보려고 온갖 시련을 다 겪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실패했다고 자인하였다. 본디 정치인이 아니었던 인촌은 정치인으로는 실패했지만, 중앙학교와 고려대학은 아직도 민족의 역군들을 길러내고 있고 그가 나이 30에 일궈놓은 동아일보는 오늘도 이 나라 굴지의 언론기관 중 하나로 국민의 존경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성장이 눈부신 시대를 맞이했지만, 경성방직은 국민의 경제생활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으니 누가 감히 인촌의 일생을 실패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인촌 김성수를 생각하며 나는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20/201807200162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