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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건 조회 299회 작성일 2008-12-11 16:33
[현대사 아리랑]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 위클리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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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아리랑]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2008 12/16   위클리경향 804호

반란군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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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조선혁명박물관에 전시된 이현상 사진.
“소련 군정 치하의 평양에서는 ‘소련에서 공부하고 와야 고위직에 등용될 수 있다’는 말이 상식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때문에 북로당 선전부장 김창만과 간부부장 이상조 같은 노른자위 당 간부들, 남로당의 핵심 간부인 이현상과 김삼룡이 소련 유학을 위해 강동정치학원에서 러시아어 공부를 하고 있을 때인 1948년 7월 말 경이었습니다.”

박병률이 한 말이다. 박병률은 강동정치학원 원장을 설립 때부터 끝까지 지냈던 사람이다. 김국후 기자가 엮어낸 <평양의 소련 군정>에 나온다. 박병률은 말한다.

“평양에 있지 말고 남으로 내려가라”
“이들은 술자리에서 북조선의 최고지도자 문제를 놓고 입씨름을 벌였습니다. 김창만이 ‘곧 수립될 공화국에서 김일성 장군이 북조선의 최고지도자를 맡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순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현상이 ‘김일성은 인민무력부장 정도가 적당하고 최고지도자는 박헌영 선생이 맡는 것이 남북 인민들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이에 이상조가 ‘박헌영은 당파 싸움을 일삼는 종파주의자이기 때문에 지도자로는 절대 불가하고 빨치산 대장 출신인 김일성 장군만이 우리 조선을 이끌 수 있는 자격이 있다’며 맞섰습니다. 분위기가 험악해져 술자리는 패싸움으로 번졌고, 두 파는 강동정치학원에서 훈련용 총까지 들고 나와 서로 위협할 정도가 됐습니다. 이 패싸움은 즉시 소련군정 사령부에 보고됐고 소련 군정사령부는 중앙당 허가이에게 ‘진상을 조사한 후 엄벌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중앙당은 이들의 소련 유학을 취소하고 김창만 선전부장을 내각 간부학교 교장으로 좌천시켰으며, 이상조 간부부장을 군대로 발령하는 동시에, 이현상과 김삼룡은 평양에 있지 말고 즉시 남조선으로 보내라는 엄명을 내렸습니다.

당시 소련 군정은 이 사건을 ‘김일성파’와 ‘박헌영파’의 노골적인 대결로 보고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남조선으로 밀려 내려간 이현상은 지리산 등지에서 빨치산을 지도하던 중 김삼룡은 지하에서 남로당을 이끌던 중에 각각 총살당하는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좌천된 김창만과 이상조는 나중에 복권되기는 했지만 결국 숙청됩니다.”

남조선 빨치산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 4000여 명 빨치산 지도자와 빨치산을 양성하였던 강동정치학원은 1948년 1월 1일부터 1950년 6월 25일까지 2년7개월여 동안 존속하였다. ‘박헌영 학교’라고 불릴 만큼 남로당세가 강했던 곳으로, 평양 인근 평안남도 강동군 승호면 대성리에 있었다. 박헌영이 비서로 있던 조두원(조일명)·사법상 이승엽과 함께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와서 1박2일 동안 학원생들을 격려하고 갔다고 한다. 박헌영의 세 번째 부인이 되는 윤레나(윤옥, 조두원 처제)도 학원생이었다고 한다. “리승엽이 강동정치학원 원생들을 무장시켜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 남로당 숙청 때 걸고 들어갔던 죄목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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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죽음을 보도한 1953년 9월 <동아일보> 기사. <실천문학사(안재성, 이현상평전) 제공>
이현상이 맑스레닌주의 정치학습과 유격전을 그 내용으로 하는 군사학습을 익히던 이때는 남조선 일대가 내란 상태였다. 제주도에서는 4·3항쟁이 이어졌고, 태백산·소백산 같은 산악지대에는 농군들로 뭉쳐진 야산대가 군경 토벌대와 맞서 있으며, 전라도 곡창지대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이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5·10단선으로 단독정부를 세운 이승만은 친일 지주·자본가·관공리를 주축으로 당을 만들어 “땅을 달라! 쌀을 달라!”는 인민들과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었다.

이처럼 엄혹한 때에 남로당 총책인 김삼룡과 간부부장 겸 노동부장 이현상이 중앙당이 있는 서울을 비우고 평양에 있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48년 4월 14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갔다가 7월 말까지 3개월 이상 머무는 것이니, 남로당 살림은 이주하·정태식에게 맡기고 모스크바로 유학을 가려 했다? 그렇다면 고통받는 노동자·농민과 그 고통을 함께 해야 된다는 볼세비키 규율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이현상이야 유격전술을 배워 남조선에서 유격투쟁을 벌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당수권한대행인 김삼룡은?

고보생 이끌고 시위 주도하다 투옥
중앙당이 있는 서울로 돌아온 김삼룡과 이현상을 기다리는 것은 반공이데올로기로 무장된 이승만정권의 경찰이다. 중요한 기밀서류 보따리를 들고 동가식 서가숙하던 남로당 중앙을 더 큰 곤경에 몰아넣는 사변적 상황이 일어나니, 이른바 ‘여순반란사건’이었다. 우익에서는 ‘반란’이라고 부르고 좌익에서는 ‘항쟁’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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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이 죽기 전날까지 은신했던 곳으로 알려진 빗점골 아지트 자리. 1953년 9월 18일 경남도당에서 온 조직책을 따라 산을 내려갔다가 시신으로 발견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박영발·송시백 등과 지내며 제5지구당 해산 작업을 했다. <실천문학사(안재성, 이현상평전) 제공>
남로당 중앙의 결의나 지원을 받아 일으킨 ‘당사업’이 아니었다. ‘제주도 폭도토벌’을 명령받은 14연대에는 좌익사상에 물든 군인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장교들은 중앙당 소속이었고 하사관들은 전남도당 소속이었다. ‘붉은연대’로 불리던 14연대만이 아니라 그때 국방군에는 남로당 당원이나 당원은 아니더라도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내세운 남로당 정책을 지지하는 군인들이 많았다. 여기에는 까닭이 있다. 국방경비대로부터 비롯된 국방군에는 농촌 출신이 많았다. 거의가 살인적 고리 도조인 3·1제에 치를 떨며 지주의 땅을 얻어 부치는 소작농이나 고용농이라고 불리던 머슴 출신들이었으니, 기본계급 농민의 자식들이 남로당에 들어가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반면에 경찰관들 가운데는 친일파가 많았다. 중앙 지휘부와 도경 간부급은 물론하고 경찰서장과 지서장까지 거의 일제시대부터 농민들을 괴롭히던 친일경찰들이었다. 빈농 출신 청년들은 국방군에 들어감으로써 우선 급한 숙식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경찰과 맞설 수 있는 군인 신분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에 하사관 이하 하급 군인들은 경찰관에 대해서 거의 본능적인 적개심과 증오감을 갖고 있었다.

“당적 죄악이며 당적 과오다.”
1948년 10월 22일 저녁, 순천역 앞에 도착한 이현상이 비통하게 부르짖었다는 말이다.
불바다를 이루고 있는 시내 곳곳에 널부러진 시신만 1000여 구가 넘었다. 이현상은 이 사태가 중앙당과 아무런 이음고리 없이 일으킨 커다란 과오로 보았다. 이승만 친일세력이 미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벌이는 제주도 양민 학살극에 동참할 수 없다는 민족·계급적 의분에서 일떠선 것이지만, 전략적 오류로 보았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완벽한 채비를 한 다음 객관적 정세가 임계점에 이르렀다는 과학적 판단이 섰을 때 일으켜서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 인민봉기인데, 하사관 몇 명이 주동하여 일으킨 우발적 사태였던 것이다.

무고한 인민대중의 희생과 혁명역량의 감소를 가져올 뜻밖의 사태 앞에 망연자실하던 이현상은 우왕좌왕하는 반란군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비록 씻을 수 없는 당적 과오와 당적 죄악을 저질렀지만 반란군들은 반드시 살려내야 할 가치가 있는 혁명역량들이었다. 수많은 인명이 살상될 시가전을 피하여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는 이현상 앞에 놓여진 것은 앞이 보이지 않는 가시밭길이었다. 승산 없는 유격투쟁이었으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조국해방과 계급해방을 위하여 30년 가까이 싸워온 불요불굴의 혁명가 앞에 놓여진 ‘고난의 행군’이었다.

남·북 어느 쪽에서 죽였는지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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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근교 혁명열사릉에 만들어진 이현상의 가묘. 1972년 사망한 부인 최문기가 여기에 합장되었다. <실천문학사(안재성, 이현상평전) 제공>
이현상(李鉉相)은 1906년 전북(지금은 충남) 금산(錦山)에서 태어났다. 전주이씨로 이른바 양반의 집 자손인데 면에서 첫째 가는 부잣집 4형제 가운데 막내였다. 보통학교를 나와 고창에 있는 고창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 2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 중앙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한다. 졸업반인 5학년 때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이 돌아갔고 그 장례식인 인산(因山)날 터진 것이 6·10만세운동인데, 서울시내 고보생들을 이끌고 시위를 주도한 것이 이현상이다. 왜경에 체포되어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하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났는데, 감옥을 나설 때는 이미 강인한 공산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감옥에서 여러 공산주의자들을 만나게 되면서 맑스엥겔스 사상을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인류를 지옥으로 몰아넣는 절대악인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고서는 조국의 해방도 노동자·농민을 머리로 한 인민대중의 행복한 삶도 이룰 수 없다는 확고부동한 사상을 갖게 된 그는 다음해 봄 밀항선을 타고 상해로 간다. 임시정부 난맥상에 실망하고 귀국한 이현상은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들어갔으나 4개월 만에 그만둔다. 28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고 고려공산청년회에 들어 학생 야체이카 책임자로 각급 학교 동맹휴학을 조직하다가 제4차조공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4년을 언도받는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만나게 된 것이 이재유와 20살 어린 나이 때부터 이미 탁월한 조직가 면모를 보이던 김삼룡이다. 1933년부터 이재유그룹으로 서울 동대문과 용산에 있는 각급 공장에 적색노조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운동을 하다가 11월 ‘이재유그룹 검거사건’에 걸려 7년간 복역한다. 1940년 ‘경성콤그룹’에 들어 인민전선부를 맡아보다가 10월 체포되어 2년간 미결수로 있다가 병보석으로 나와 다시 지하투쟁에 들어간다. 해방이 되면서 남로당 노동부장이 되었고, 여순사태가 터지면서 중앙당 결정에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가 남부군 곧 남조선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이 된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5년 동안 벌였던 결사항전에 대해서는 안재성이 쓴 <이현상 평전>에 자세하게 나온다. 이현상이 지리산으로 들어간 것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것이었다. 남조선이라는 지리적 조건 자체가 유격대투쟁이 불가능하다. 중국공산당 홍군이 강서에서 연안까지 368일 걸친 2만5000리 대장정 끝에 마침내 정권을 잡았다는 것은 그만큼 땅덩어리가 광대하여 유격전을 벌일 공간이 많았다는 것인데, 이현상유격군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라고는 기껏 사방 800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가 가장 중요한 화력 자체가 비교가 안된다. 세계 최강 미군 비행기가 끊임없이 퍼부어대는 최신무기 네이팜탄 파편만 맞아도 숯덩어리가 되는 판인데 이현상유격대 주무기는 갑오년 김개남(金開南) 장군 때 쓰던 화승대에 기껏 삼팔식장총이었다.

불뫼, 곧 화산(火山)이라는 아호를 썼던 이현상이 열반한 것은 1953년 9월 17일 밤 8시쯤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죽음에 대한 참모습은 오리무중이다. 토벌대로 나섰던 경찰과 군인들이 서로 자기네가 사살했다고 훈장과 포상금을 받기 위하여 싸웠는데, 분명한 것은 경찰과 군 어느 쪽에서도 그를 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계급해방과 민족통일을 위하여 신 벗을 사이 없이 밤을 낮 삼아 뛰어다녔던 이현상을 죽인 것은 누구인가? 남로당 숙청작업의 일환으로 이현상을 제거하라는 조선로동당 특명 받은 지리산 빨치산 가운데 누구거나, 북에서 직접 내려 보낸 특수공작대가 저지른 정치이데올로기적 살해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열 방 이상 총을 맞은 이현상이다. 시신 윗도리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 있다. 보리수 열매로 꿴 백팔염주와 볼셰비키 혁명사였다. 향수 47.

<김성동>

댓글목록

no_profile 전의진(高073) 개인프로필 프로필 차단하기게시글 차단하기 작성일
지금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서 치열하게 살다간 선배님들께 절로 고개숙여집니다. 
 (제가 학교졸업후 직장생활 첫 해인 1988년에 책  <남부군>이 출간되어 미음 아프게 읽은 기억이 나는군요.  그 해 한겨레 신문의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시리즈에 '남부군사령관' 이있었고요, 중앙 관련은 이렇게 적혀 있네요 ~~~
no_profile 전의진(高073) 개인프로필 프로필 차단하기게시글 차단하기 작성일
~~~ 고창고보에 다니다 그만두고 서울 중앙고보로 옮겼다. 중앙고보 재학때인 1925년 박헌영 등의 조선공산당 창설에 참여했고, 1926년 6.10만세사건 당시 유인물을 배포하다 출판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기소유에 처분을 받았다. 이듬해인 1927년 보성전문 법과에 들어간 그는 ~~~ 

(책갈피로 오려놓은 신문기사를 옮겨적었습니다. 지난 족적으로 훌륭한 중앙 선배님들 많으시지만, 질픙노도의 시절 주류의 반대편에 서셨던 분들도 조금 기억되었으면 하는 반가운 마음으로 적어 봅니다.  - 73회 전의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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