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 기사-고전속 제시문 100선, 채만식 '태평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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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속 제시문 100선] (56) 채만식 '태평천하'
식민시대의 모순을 풍자로 고발하다
◆원문읽기
아무려나 이래서 조손 간에 계집애 하나를 가지고 동락을 하니 노소동락(老少同樂)일시 분명하고, 겸하여 규모 집안다운 계집 소비 절약이랄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소비 절약은 좋을지 어떨지 몰라도, 안에서는 여자의 인구가 남아돌아가고(그래도 한숨과 불평인데) 밖에서는 계집이 모자라서 소비 절약을 하고(그래 칠십 노옹이 예순다섯 살로 나이를 야바위 치고, 열다섯 살 먹은 애가 강짜도 하려고 하고) 아무래도 시체의 용어를 빌려오면, 통제가 서지를 않아 물자 배급에 체화(滯貨)와 품부족이라는 슬픈 정상을 나타낸 게 아니랄 수 없겠습니다.
▶해설=채만식은 식민지 시대의 모순을 풍자적 기법을 활용하여 예리하게 비판한 당대 최고의 소설가 중 한명이었다. '레디메이드 인생'과 더불어 그의 대표작인 '태평천하'가 1937년 일제강점이 최절정에 달한 시기에 출간된 것을 고려할 때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풍자' 기법은 단순한 문학적 기법이 아니라 역사적 배경이 강요한 유일한 문학의 탈출구였다. 사실 그의 수많은 작품들 중 풍자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은데, 굳이 채만식을 풍자소설가로 분류하는 것은 '태평천하'가 그의 작품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그는 단순히 당시의 지배자인 '일본'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피지배국인 한국의 모순을 동시에 비판한다. 즉, 당시 한국 사회의 이중적인 모순 구조에 냉소를 퍼붓고 있다. 그가 중점적으로 비판하고자 한 것은 '식민지 치하에서의 자본주의적 모순'으로서, 특히 비정상적인 자본축적의 양상이었다.
자본주의가 자생적으로 싹트기도 전에 일본에 의한 타율적인 자본주의의 이식은 한국 사회를 왜곡시키기 시작했다. 그러한 잘못된 사회운영원리의 이식은 경제적 현상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 사회의 문화, 풍속, 가족관계까지 송두리째 파괴해갔다.
소설에서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주인공 윤직원(윤용규)은 자신의 손녀뻘 되는 소녀를 돈으로 매수하여 자신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한다. 더 가관인 것은 윤직원이 추근대는 소녀를 윤직원의 손자 역시 흠모한다는 것이다. 위의 원문에서 이 같은 반(反)윤리적 행위가 '경제원리'에 의해 풍자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한국 사회의 전통적 규범이 파괴되는 현상의 원인을 단순히 풍속의 타락으로만 파악한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자본주의적 관계에 의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원문읽기
"세상이 다 개명(開明)을 해서 좋기는 좋아도, 그 놈 개명이 지나치니까는 되레 나쁘다. 무언고 하니, 그 소위 농지령이야, 소작조정령이야 하는, 천하에 긴찮은 법이 마련되어 가지고서, 소작인놈들이 건방지게 굴게 하기, 그래 흉년이 들든지 하면 도조(賭租)를 감해 내라 어째라 하기, 도조를 올리지 못하게 하기, 소작을 떼어 옮기지 못하게 하기…."
이래서 모두가 성가시고 뇌꼴스러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 땅 가지고 내 맘대로 도조를 받고, 내 맘대로 소작을 옮기고 하는데, 어째서 도며 군이며 경찰이 간섭을 하느냐?"
이게 도무지 속을 알 수 없고, 해서 불평도 불평이려니와 윤직원 영감한테는 커다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던 것입니다.
▶해설=이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인물들의 단점을 총체적으로 결합시켜놓은 듯한 윤직원 영감의 단점 중의 하나가 위의 원문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윤직원에게 토지(재산)에 대한 국가의 관여는 자신의 절대적 소유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회가 토지에 기반한 공동체적 사회임을 감안할 때 윤직원 영감의 이와 같은 소유권 주장은 좋게 봐서 근대적 소유권에 대한 각성이고, 나쁘게는 천민 자본주의가 낳은 사생아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윤직원은 "세상이 다 개명을 해서 좋기는 좋아도~" 라는 발언을 통해 일본에 의한 개명(침략)을 전적으로 수긍한다. 수긍하는 이유는 나라가 망하건 말건 자신의 이익이 극대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농민에 대한 지주의 횡포를 방지하기 위한 '농지령' '소작조정령' 같은 법을 저주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단순히 윤직원이라는 한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님에 주목해야 한다. 채만식은 이기적인 윤직원 영감을 통해 토지를 매개로 한 자본주의적 억압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정착되어 가는 양상을 비판하고 있다. 마지막 문장에서 토지 관련 법령의 시행이 윤직원 영감에게는 '수수께끼'로 인식된다고 표현되어 있다. 수수께끼가 '맞추기 힘든 저차원의 유희'라는 것을 감안할 때 윤직원 영감에게는 다수의 농민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가 맞추면 상품을 주는 게임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채만식은 윤직원 영감의 '순진무구한(?)' 발언을 통해서 일본과 결탁한 자본가들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원문읽기
지주가 소작인에게 토지를 소작으로 주는 것은 큰 선심이요, 따라서 그들을 구제하는 적선이라는 것이 윤직원 영감의 지론이던 것입니다. 윤직원 영감의 신경으로는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논이 나의 소유라는 결정적 주장도 크지만, 소작 경쟁이 언제고 심하여, 논 한 자리를 두고서 김서방 최서방 이서방 채서방 이렇게 여럿이, 제각기 서로 얻어 부치려고 청을 대다가는 필경 그 중의 한 사람에게로 권리가 떨어지고 마는데, 김 서방이나 혹은 이 서방이나 또는 채 서방이 나에게로 줄 수 있는 논을 최서방 너를 준 것은 지주된 내 뜻이니까, 더욱이나 내가 네게 적선을 한 것이 아니냐? 이것이 윤직원 영감의 소작권에 의한 자선사업의 방법론입니다.
▶해설=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식민지 시기는 자본주의가 정착되어 가는 과도기였다. 자본주의가 발 딛는 과정에서 자본주주의의 핵심 권리인 '소유권'이 지주들에게도 자각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소유권이라는 권리가 무소불위의 절대적 권리로 왜곡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윤직원 영감은 소작권이 타인의 생존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단순히 사업의 한 수단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또한 소작농에게 땅을 임대해 주면서 '적선'을 베풀듯이 행세하고 있다. 본래 자본주의에서 '계약'은 쌍방 간의 상호 대등함을 전제로 하는데, 윤직원에게 소작권은 절대적 권리이므로 농민에게 소작을 허용하는 것은 '계약'이 아니라 '베품(적선)'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식민지 치하에서 왜곡된 자본주의의 운영원리를 신랄하게 비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지주들의 위선과 무지함을 드러내는 풍자적 면모가 잘 드러난 대목이라 할 것이다.
식민시대의 모순을 풍자로 고발하다
◆원문읽기
아무려나 이래서 조손 간에 계집애 하나를 가지고 동락을 하니 노소동락(老少同樂)일시 분명하고, 겸하여 규모 집안다운 계집 소비 절약이랄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소비 절약은 좋을지 어떨지 몰라도, 안에서는 여자의 인구가 남아돌아가고(그래도 한숨과 불평인데) 밖에서는 계집이 모자라서 소비 절약을 하고(그래 칠십 노옹이 예순다섯 살로 나이를 야바위 치고, 열다섯 살 먹은 애가 강짜도 하려고 하고) 아무래도 시체의 용어를 빌려오면, 통제가 서지를 않아 물자 배급에 체화(滯貨)와 품부족이라는 슬픈 정상을 나타낸 게 아니랄 수 없겠습니다.
▶해설=채만식은 식민지 시대의 모순을 풍자적 기법을 활용하여 예리하게 비판한 당대 최고의 소설가 중 한명이었다. '레디메이드 인생'과 더불어 그의 대표작인 '태평천하'가 1937년 일제강점이 최절정에 달한 시기에 출간된 것을 고려할 때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풍자' 기법은 단순한 문학적 기법이 아니라 역사적 배경이 강요한 유일한 문학의 탈출구였다. 사실 그의 수많은 작품들 중 풍자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은데, 굳이 채만식을 풍자소설가로 분류하는 것은 '태평천하'가 그의 작품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그는 단순히 당시의 지배자인 '일본'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피지배국인 한국의 모순을 동시에 비판한다. 즉, 당시 한국 사회의 이중적인 모순 구조에 냉소를 퍼붓고 있다. 그가 중점적으로 비판하고자 한 것은 '식민지 치하에서의 자본주의적 모순'으로서, 특히 비정상적인 자본축적의 양상이었다.
자본주의가 자생적으로 싹트기도 전에 일본에 의한 타율적인 자본주의의 이식은 한국 사회를 왜곡시키기 시작했다. 그러한 잘못된 사회운영원리의 이식은 경제적 현상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 사회의 문화, 풍속, 가족관계까지 송두리째 파괴해갔다.
소설에서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주인공 윤직원(윤용규)은 자신의 손녀뻘 되는 소녀를 돈으로 매수하여 자신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한다. 더 가관인 것은 윤직원이 추근대는 소녀를 윤직원의 손자 역시 흠모한다는 것이다. 위의 원문에서 이 같은 반(反)윤리적 행위가 '경제원리'에 의해 풍자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한국 사회의 전통적 규범이 파괴되는 현상의 원인을 단순히 풍속의 타락으로만 파악한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자본주의적 관계에 의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원문읽기
"세상이 다 개명(開明)을 해서 좋기는 좋아도, 그 놈 개명이 지나치니까는 되레 나쁘다. 무언고 하니, 그 소위 농지령이야, 소작조정령이야 하는, 천하에 긴찮은 법이 마련되어 가지고서, 소작인놈들이 건방지게 굴게 하기, 그래 흉년이 들든지 하면 도조(賭租)를 감해 내라 어째라 하기, 도조를 올리지 못하게 하기, 소작을 떼어 옮기지 못하게 하기…."
이래서 모두가 성가시고 뇌꼴스러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 땅 가지고 내 맘대로 도조를 받고, 내 맘대로 소작을 옮기고 하는데, 어째서 도며 군이며 경찰이 간섭을 하느냐?"
이게 도무지 속을 알 수 없고, 해서 불평도 불평이려니와 윤직원 영감한테는 커다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던 것입니다.
▶해설=이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인물들의 단점을 총체적으로 결합시켜놓은 듯한 윤직원 영감의 단점 중의 하나가 위의 원문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윤직원에게 토지(재산)에 대한 국가의 관여는 자신의 절대적 소유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회가 토지에 기반한 공동체적 사회임을 감안할 때 윤직원 영감의 이와 같은 소유권 주장은 좋게 봐서 근대적 소유권에 대한 각성이고, 나쁘게는 천민 자본주의가 낳은 사생아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윤직원은 "세상이 다 개명을 해서 좋기는 좋아도~" 라는 발언을 통해 일본에 의한 개명(침략)을 전적으로 수긍한다. 수긍하는 이유는 나라가 망하건 말건 자신의 이익이 극대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농민에 대한 지주의 횡포를 방지하기 위한 '농지령' '소작조정령' 같은 법을 저주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단순히 윤직원이라는 한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님에 주목해야 한다. 채만식은 이기적인 윤직원 영감을 통해 토지를 매개로 한 자본주의적 억압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정착되어 가는 양상을 비판하고 있다. 마지막 문장에서 토지 관련 법령의 시행이 윤직원 영감에게는 '수수께끼'로 인식된다고 표현되어 있다. 수수께끼가 '맞추기 힘든 저차원의 유희'라는 것을 감안할 때 윤직원 영감에게는 다수의 농민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가 맞추면 상품을 주는 게임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채만식은 윤직원 영감의 '순진무구한(?)' 발언을 통해서 일본과 결탁한 자본가들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원문읽기
지주가 소작인에게 토지를 소작으로 주는 것은 큰 선심이요, 따라서 그들을 구제하는 적선이라는 것이 윤직원 영감의 지론이던 것입니다. 윤직원 영감의 신경으로는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논이 나의 소유라는 결정적 주장도 크지만, 소작 경쟁이 언제고 심하여, 논 한 자리를 두고서 김서방 최서방 이서방 채서방 이렇게 여럿이, 제각기 서로 얻어 부치려고 청을 대다가는 필경 그 중의 한 사람에게로 권리가 떨어지고 마는데, 김 서방이나 혹은 이 서방이나 또는 채 서방이 나에게로 줄 수 있는 논을 최서방 너를 준 것은 지주된 내 뜻이니까, 더욱이나 내가 네게 적선을 한 것이 아니냐? 이것이 윤직원 영감의 소작권에 의한 자선사업의 방법론입니다.
▶해설=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식민지 시기는 자본주의가 정착되어 가는 과도기였다. 자본주의가 발 딛는 과정에서 자본주주의의 핵심 권리인 '소유권'이 지주들에게도 자각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소유권이라는 권리가 무소불위의 절대적 권리로 왜곡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윤직원 영감은 소작권이 타인의 생존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단순히 사업의 한 수단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또한 소작농에게 땅을 임대해 주면서 '적선'을 베풀듯이 행세하고 있다. 본래 자본주의에서 '계약'은 쌍방 간의 상호 대등함을 전제로 하는데, 윤직원에게 소작권은 절대적 권리이므로 농민에게 소작을 허용하는 것은 '계약'이 아니라 '베품(적선)'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식민지 치하에서 왜곡된 자본주의의 운영원리를 신랄하게 비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지주들의 위선과 무지함을 드러내는 풍자적 면모가 잘 드러난 대목이라 할 것이다.
김종현 S·논술 선임연구원 keatonn@nons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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