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쟁 特需의 現場을 지휘했던 승부사<font color=blue> 趙重建(42회) </font> - 월간조선 >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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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12회 작성일 2005-08-20 00:00
월남전쟁 特需의 現場을 지휘했던 승부사<font color=blue> 趙重建(42회) </fon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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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5월호
[인터뷰] 월남전쟁 特需의 現場을 지휘했던 승부사 趙重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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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은 海外로 나가 뛰어 人生 역전의 기회를 잡아라』
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 st-jung@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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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row.gif젊은이에게 꿈을 주려고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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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경제발전사에서 越南戰(월남전)의 의미는 현대 日本에 있어 6·25 전쟁에 비견될 만한 것이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약 5년간 越南에서 해외진출의 노하우를 쌓은 한국은 1970년대에는 中東붐을 이용하여, 오일달러까지 벌어들임으로써 「네이션 빌딩」의 토대를 마련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월남전은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國運 개척의 기회」였다. 당시 월남전 特需(특수)의 현장을 지휘했던 韓進商社(한진상사)의 CEO가 趙重建(조중건)이었다. 『그때 월남에서 원도 한도 없이 달러를 벌어들였다』는 한진상사는 이후 대한항공(KAL), 한진해운, 한진중공업, 한일개발 등을 인수 또는 설립하여 오늘의 한진그룹으로 성장해 왔다.

趙重建은 한진의 창업자이며 實兄인 趙重勳(2002년 별세) 밑에서 대한항공(KAL) 부사장, 한일개발 사장, 대한항공 사장, 대한항공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이제 「대한항공 고문」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그가 최근 자서전 「창공에 꿈을 싣고」를 발간,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올해는 花信(화신)이 유별나게 꾸물거렸다. 한강변에 개나리·진달래가 한꺼번에 開花(개화)한 날인 지난 4월4일 아침, 필자는 남대문로 2가 「해운센터 신관」 15층에 있는 趙重建 고문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그냥 헤는 나이로 74세. 그런 연령에도 그는 매우 건강했고, 레토릭이 화려했다.

─趙선생님의 자서전, 감명 깊었습니다. 글쓰기가 어디 만만한 일입니까…. 저로선 집필 동기가 궁금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에게 진취적인 기상을 심어 주고 싶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던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쳐 살아온 우리 또래의 이야기가 오늘의 젊은이들에게도 약간의 참고가 될 만하다는 생각에서 집필했습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는 개발연대에 벽돌 한 장도 쌓은 일이 없는 左派세력들이 대한민국을 끊임없이 헐뜯음으로써 젊은이들을 誤導(오도)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가치를 적극 평가한 선생님의 자서전 「창공에 꿈을 싣고」는 이런 세태에 대한 따끔한 경고로 여겨집니다.
『개발연대의 우리 젊은이들은 越南의 정글, 中東의 사막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을 누비며 물건을 팔고, 기술을 배워 오고, 건설을 하고, 물건을 날랐습니다. 총탄을 맞아 가며 일으켜 세운 나라가 우리 대한민국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서 이런 에너지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고, 청년실업이다 뭐다 해서 우리 사회와 기성세대를 원망하는 분위기만 감돌게 되었습니다. 이건 민족적 위기입니다. 오늘의 젊은이에게 「꿈과 의욕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 한국의 젊은이들은 세계로 뛰어나가지 않으면 活路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연간 40만 명의 대학 졸업자가 배출되지만 국내의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1960년대 한국인의 월남 진출은 오늘의 청년에게도 유효한 진취적 모델이다. 이제 말머리를 월남 진출, 그때 그 시절로 돌려야 할 것 같다.

arrow.gif『찰리, 너 越南 좀 가야겠다』
0505_305_2.jpg 1965년 12월, 월남 시찰에서 돌아온 趙重勳 사장은 가만히 그의 동생 趙重建 상무를 불렀다.
『야, 찰리(趙重建의 英語 이름)! 너, 월남 좀 가야겠다』
『뭐요, 월남? 한창 전쟁 중인데, 내가 거길 왜 가우?』
『야, 내가 가봤더니 전쟁, 그거 별것 아니더라』
『그런데, 거긴 왜요?』
『거기 퀴논港에 하역을 못 하고 대기 중인 배가 30여 척이나 되는데…, 이거 큰 찬스 아닌가? 니가 가서 보따리 좀 싸봐!』

「보따리 싸보라」는 말은 기획을 잘 해서 사업거리로 만들어 보라는 뜻이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도전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형에게 가서 말했다.
『알았시다. 3000달러만 준비해 주소』

1966년 1월22일, 그날은 구정날(설)이었다. 趙重建 상무는 낡은 타이프라이터 한 대와 3000달러, 간단한 옷가지만 가지고 월남으로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노스웨스트 항공사 지점장으로부터 『마이크 라이클 장군이 당신을 찾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마이크 라이클은 한국에서 美 8군 수송부장(대령)으로 근무한 뒤 준장으로 진급하여 美 육군수송학교 교장으로 전출했는데, 趙重建 상무와는 유별나게 친하게 지냈던 사이다. 두 사람은 美 8군 영내에 있는 「하텔스 하우스」에서 재회했다.
『마이크, 어디서 오는 길이여?』
『응, 월남에서 오는 길이지. 주월미군 부사령관 앵글러 중장을 수행해 도쿄를 거쳐 사이공에 갔다 왔어. 極東(극동)까지 와서 네 얼굴 안 보고 가면 안 될 것 같아서 연락도 없이 건너왔지』
『어, 그래? 나 내일 사이공에 가는데…』
『뭐? 뭘 찾아 먹으려구?』
『뭐긴 뭐야, 돈 냄새가 나서 가는 게지. 의정부(美) 1군단장을 하다가 웨스트모어랜드 사령관에게 스카우트되어 월남으로 전출한 하인게스 중장 있지? 급하면 그 사람한테 계약 좀 알선해 달라고 부탁하려는 참이여』
『뭔소리야, 찰리. 하인게스 중장은 전투 담당 부사령관이야. 너, 웃겨. 전투 하청 받으려고 그래? 내가 수행했던 앵글러 중장이 바로 웨스트모어랜드 주월사령관의 병참 담당 부사령관이야!』
趙重建은 만취한 가운데서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옆에서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있는 라이클 준장이 소개장 한 장만 써줘도 일이 훨씬 쉬워지는 것이었다. 趙重建씨는 이렇게 회고한다.
『아, 그런데 그때만 해도 내가 순진했어요. 예약해 둔 「에어 프랑스」 비행기표를 반환하거나 탑승을 연기하면 된다는 생각을 미처 못 했거든요』
『야, 찰리, 꼭 내일 가야겠어?』
『응, 내일 꼭 가야 해. 대신에 소개장 한 장 써 줘』
『오케이!』
그러나 라이클 준장이 술김에 쓴 肉筆(육필) 소개장은 엉망진창이었다.
『땡큐 마이크… 그런데 워싱턴에 도착하면 타이프로 다시 한 번 소개장 제대로 쳐서 보내줘』
趙重建 상무는 다음날 「에어 프랑스」를 타고 사이공으로 날아갔다. 그가 맨 먼저 할 일은 현지 상황을 파악, 웨스트모어랜드 사령관에게 건의서를 제출하는 일이었다.
우선, 그는 사이공 항만사령관 올리버 대령을 찾아갔다. 올리버 대령은 문산에 주둔했던 美 제1기병사단에 근무할 때부터 그와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그는 올리버의 전용 헬기를 얻어 타고 퀴논港으로 날아갔다.

arrow.gif웨스트모어랜드 사령관에게 보낸 趙重建의 건의서
0505_305_3.jpg 퀴논港에는 미국의 보급선 30여 척이 하역을 하지 못하고 3~4개월째 대기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는 현장에서 타이프라이터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웨스트모어랜드 사령관에게 보내는 다음 내용의 편지를 썼다.

<월남 및 동남아의 공산화 방지를 위하여 수고하시는 웨스트모어랜드 사령관 각하와 휘하 장병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저는 한진상사의 趙重建 상무라는 사람이며, 한국군 포병장교로 복무 중 미국 포병학교에서 한국군 유학 장교의 교관으로 2년간 근무하고 예편한 뒤 미국 친구의 도움으로 캘리포니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家兄과 함께 운송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장군님께서도 아시다시피 한국전쟁 당시 UN의 깃발 아래 미군이 한국을 지원하지 않았다면 한국은 공산화되었을 것이며, 저는 지금 사령관에게 이 건의서를 쓸 기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퀴논港의 현장답사와 담당관과의 면담을 통해 하역 인력이 없어 군수물자를 만재한 화물선이 3~4개월씩이나 대기, 작전에 막대한 지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한국을 구원하였듯이 월남전에서는 한국이 힘 닿는 데까지 미국을 도와야겠습니다.
퀴논의 운송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기 원하신다면 한진에 수의계약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계약일로부터 100일 안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작업을 시작할 것이며, 만일 100일 후에 작업을 시행하지 못할 때에는 지체 배상금으로 매일 1만 달러를 美 정부에 지급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이 작업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한진은 반공정신이 투철한 한국인만을 작전지역에 투입하겠습니다. 퀴논港으로 들어온 모든 군수물자의 하역·운송 책임을 한진이 담당할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좋은 회신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趙重建 상무는 이 문서를 50장이나 만들어 웨스트모어랜드 사령관실, 앵글러 병참담당 부사령관실, 그리고 계약처 등에 발송했다. 마침내 미군 측에서 계약관과 협의를 개시하라고 통보해 왔다. 그러나 계약관으로 나선 백인 중령은 여간 깐깐하지 않았다.
『이보시오, 미스터 趙. 美 육군에는 수의계약이란 게 없소. 우리는 일본·월남·호주 업체에도 경쟁입찰 의향서를 띄울 거요』
『여보시오, 중령! 나도 경쟁입찰 좋아하는 사람이오. 그러나 월남 업자와 경쟁입찰을 할 수는 없소. 왜냐? 베트콩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잖소』

arrow.gif요코하마 荷役요율의 3배 받아 낸 요금
0505_305_4.jpg 며칠 거듭된 실랑이에 약이 바짝 오른 趙重建은 병참담당 부사령관 앵글러 중장을 직접 찾아갔다. 그는 한눈에 趙重建을 알아보았다. 라이클 준장의 추천장도 이미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당신, 찰리 趙 맞지? 라이클이 추천서를 보냈더군. 그런데 계약은 땄소?』
『계약은 무슨 계약,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아니 왜?』
『계약을 못 땄으니까 귀국해야죠…』
『미스터 趙, 가긴 어딜 가. 내가 계약 따줄게』
『아니 계약관이 날더러 월남 업자와 경쟁입찰하라던데요』
앵글러 중장이 발끈했다.
『이런 바보 같은 계약관이 있나! 지금 퀴논港에 입항한 배 한 척당 하루 5000달러의 滯船料(체선료)를 물고 있는데! 경쟁입찰을 했다간 업자 모으고 선정하는 데만 6개월이 걸릴 텐데, 그 따위 한가한 소릴 하고 있더란 말이지? 이봐, 찰리 趙. 내가 딴 계약관 불러올 테니 귀국하지 마!』
당시는 병참문제가 화급했다. 군수물자의 수송이 늦어져 작전에 차질을 빚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계약관은 원칙만 들먹이고 있었다. 계약관은 즉각 교체되었다. 새로 교체된 계약관은 부산 하얄리아 부대에서 막 전출해 온 흑인 소령이었다.
『모두 나를 「찰리」라고 부르지. 너도 나를 「찰리」라고 불러 줘』
『으응, 찰리. 난 체스터 라이스 소령이야. 그냥 체스터라고 불러도 좋아』
『너, 웨스트포인트(美 육사)냐, ROTC냐?』
『나, 미시간 대학 ROTC 출신이다』
『난 캘리포니아 대학 나왔는데, 우리 학교 풋볼은 너희 미시간과 상대도 안 되더라. 미시간 풋볼, 정말 대단해!』
이런 대화로 물꼬를 튼 趙重建 상무와 체스터 라이스 소령은 금세 가깝게 되었다. 체스터-趙重建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趙重建 상무는 일본 요코하마 항구 하역요율의 3배가 되는 요금을 계약서에 적어 내었다. 체스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무슨 하역요금이 이렇게 비싸?』
『여긴 戰時 부두 아녀? 그리고 베트콩의 기습을 각오하며 하루 24시간 하역을 계속해야 하잖아. 이건 특수상황이라구』
한진의 계약단가가 비록 비싸기는 해도 1만5000t급 화물선 한 척의 하역을 3일 내에 처리한다면 그것은 미국 정부에도 대단한 이익이었다. 1966년 3월10일, 사이공 미군사령부에서 앵글러 중장과 趙重建 상무가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해 5월25일부터 1년간 하역 및 수송용역을 실시하되 작업에 차질이 있을 경우 300만 달러를 미군에 지급한다는 조건이었다. 계약금액은 당시론 기록적인 790만 달러에 달했다.

arrow.gif공산당을 증오하는 까닭
0505_305_5.jpg 여기서 趙重建이라는 인물의 성장배경을 잠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趙重建은 1932년 서울 종로에서 큰 포목상을 경영했던 아버지 趙命熙와 어머니 太天楫(태천즙)의 4남4녀 중 일곱 번째(3남)로 태어났다. 2002년에 작고한 趙重勳 한진그룹 회장이 그와 열두 살 차이의 둘째 형이었다. 趙重建의 젖먹이 시절에 세계적인 대공황의 여파로 집안 살림이 갑자기 기울었다. 거래처로부터 받은 어음이 모조리 부도가 나 버린 결과였다.

그때 휘문중학 3학년이던 趙重勳은 어려운 집안 형편을 살펴, 스스로 鎭海해원양성소(한국해양대학교의 前身)로 전학했다. 그곳은 매달 10원씩 봉급을 주고 해운 기술을 가르쳐 주던 기술학교였다. 졸업과 동시에 2급 기관사 자격을 취득한 趙重勳은 弱冠(약관)에 상해·요코하마 등지를 비롯한 東아시아 여러 항만을 돌아다니며 시야를 넓혔다.

그런 가운데 家勢가 회복되어 重建 소년은 1945년 仁村 金性洙 선생이 설립한 민족학교 중앙고보에 입학했고, 바로 그해에 8·15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좌익분자들의 조직적인 난동으로 사회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미숙한 美 군정보다 더 큰 문제는 빨갱이들의 공산화 책동이었습니다. 1947년 10월 어느 날, 동아일보 1면에 실린 사진 한 장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大邱 철도노조에 침투한 좌익분자들이 정복 경찰관을 살해, 그 시신의 발을 쇠사슬로 트럭의 꽁무니에 엮은 다음에 대구 시내 곳곳으로 끌고 다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만행을 저지르고도 「혁명을 위해서」라는 사명감에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빨갱이들의 생리라는 것을 그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의 형 趙重勳은 광복 후의 혼란 속에서도 트럭 한 대를 구입하고, 인천 海岸洞에 한진상사를 창업했다. 무역·수송 겸업이었다. 창업 5년째를 맞은 1950년, 한진상사는 종업원 40여 명과 트럭 30여 대를 보유한 기업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6·25 전쟁이 터졌다. 그때 趙重建의 나이 18세, 중앙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1950년 6월28일 아침, 그는 탱크의 캐터필러 소리를 듣고 미군이 반격해 온 것으로 착각, 서대문 집에서 거리로 뛰어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인민군의 탱크였다.
『그나마 처음 1주일간은 바깥에 나다닐 수 있었어요. 그 이후로는 「의용군 차출」이라는 명목으로 젊은이들을 붙잡아가는 바람에 나는 우리집 지하실에 숨어 있어야 했습니다』

─지하실에서 무얼 하셨습니까.
『NHK 라디오방송을 통해 미군이 참전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영어공부를 했습니다』

─아이구, 그런 경황에 영어공부라니…. 우리가 이길 것이라고 확신하셨군요.
『미군이 참전한 만큼 승리는 시간문제라고 판단했어요』

─그래도 답답했겠죠.
『하루는 궁리 끝에 애먼 다리에 석고 칠을 해서 깁스를 한 것처럼 꾸미고 그 위에 새빨간 물감까지 뿌려 戰傷者(전상자) 형색으로 외출을 했어요. 전차를 타고 광화문 네거리로 나갔다가 말로만 듣던 인민재판을 목격했죠』

arrow.gif군중의 狂氣
─어떻습디까.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공기를 찢고 울려 퍼져요. 「동무들! 이 金아무개의 아비가 국방군 고급장교입네다! 이 악질 반동을 죽여요, 살려요?」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군중심리는 광기, 바로 그것이었어요. 이윽고 그 인민군 여자 戰士가 따발총을 젊은이에게 겨누더군요. 「죽여라!」는 군중의 함성은 자꾸 커지는 겁니다. 인민군 장교가 턱짓을 하자 따발총이 불을 뿜었습니다. 따발총 소리마저 군중의 함성에 묻혀 버리더군요. 그건 인간이 아니라 야수의 세계였습니다』
9월28일, 서울이 수복되었다. 美 8군사령부에서는 통역관을 모집하고 있었다. 그는 통역관 시험에 합격했다. 곧 美 25사단 포병부대에 배치되었다.
『그때 나는 빨갱이 놈들, 어디 두고 보자는 심정이 되어 있었어요』
그는 10월 초부터 부대를 따라 사리원-개성-황주-평양으로, 다시 순안-영변-박천을 거쳐 압록강 남방 50마일 지점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곧 美 25사단은 중공군에 의해 포위, 고립되어 버렸다. B29폭격기가 융단폭격으로 길을 열어 주는 덕에 겨우 南으로의 탈출이 가능했다.
『1·4 후퇴 직전, 서울 집에 와 보니 가족들은 이미 피란을 떠난 후였어요. 빈 집에는 편지 한 장 놓여 있을 뿐이었지오. 부산으로 오라는 전갈이었습니다』
그는 미군 통역관을 그만두고 부산으로 내려가 가족을 만났다. 그 와중에 「제5기 육군 통역장교를 모집한다」는 방을 보았다. 이번에도 합격, 3개월간 기초훈련을 받고 1951년 6월1일 육군 중위(통역장교)로 임관했다. 근무지는 육군포병학교였다. 그때 포병학교 교장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의 金桂元 준장(10·26 사태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고, 沈興善 대령(후일 합참의장, 총무처 장관 역임)·송찬호 중령·정인환 중령 등이 참모로 근무하고 있었다.

arrow.gif통역장교로 입대― 朴正熙와의 만남
0505_305_6.jpg 1952년 2월경 鎭海의 포병학교, 東萊의 보병학교와 기갑학교, 大田의 통신학교 등 전투병과 장교 교육기관들이 광주 교외의 尙武臺(상무대)로 집결했다. 당시 열아홉 살 趙重建 중위의 임무는 미군의 포병교범 「FM6-40」을 번역하는 일이었다. 엄청 난해한 작업이었다. 그 결과 한국군 최초의 포병교재 「砲術學(포술학)」이라는 책이 완성되었다.

당시 한국군에는 포병 병과의 장교, 나아가 장군을 시킬 만한 人材가 거의 없었다. 당시 미군 편제는 사단장이 소장이고, 준장인 부사단장이 사단포병단장을 겸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국군 사단 포병단에는 소령·중령들밖에 없었다.

한국군사령부와 미군사령부는 일부 고참 보병장교들을 포병으로 전과시켜 사단포병단장에 임명하기 위해 특별교육을 시키기로 했다. 이런 가운데 포병학교 교장의 보좌관 겸 통역장교로 근무했던 趙重建 중위는 포병학교에 입교한 朴正熙·이상국·송석하·김동빈 등 고참대령들과 만나게 되었다. 특히 朴正熙 대령은 沈興善 포병학교장과 육사 2기 동기생이어서 자주 교장실에 들렀는데, 보좌관인 趙重建 중위를 「아우처럼 귀여워했다」고 한다. 그 무렵 趙重建 통역장교는 포병으로 轉科했다.
『보병·포병·기갑 등 전투병과 장교들은 통역장교인 나를 차별하고 무시하더군요. 기분이 나빴어요. 포병학교장의 허가를 얻어 보좌관 자격을 보유한 채로 3개월간 포병 초등군사반을 이수했어요. 그래서 1952년 말 희망한 대로 일선 포병부대로 전출하게 되었어요. 155mm 최신 곡사포를 철원까지 끌고 올라가 敵 진지를 향해 수없이 많은 포탄을 날렸습니다』
그는 제5韓美연합 155mm 포병단에서 약 10개월간 근무했다. 이듬해 유학시험에 응시하라는 육본의 명령을 받았다. 이번에도 합격하여 미국에 건너가게 되었다. 그는 오클라호마 소재 미군 포병학교에 가서 2년간 유학을 온 한국군 포병장교들에게 포술학을 가르쳤다. 그때 그는 미국에 6개월 코스의 유학을 온 朴正熙 장군과 노재현 장군(12·12 사태 당시 국방부 장관) 등을 다시 만났다.

arrow.gif캘리포니아 대학 졸업 후 형을 도와 한진상사 키워
1955년, 그는 포병대위로 미국 현지에서 예편하고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輸送學을 전공했다. 그에게 한 학기에 500달러씩 1년에 1000달러의 장학금을 지급한 스폰서는 월터 하스, 조지 스미스라는 이름의 캘리포니아 대학 선배 2명이었다. 그러나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그는 졸업 때까지 접시닦기 등의 아르바이트를 계속해야만 했다.
1959년, 캘리포니아 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한 그는 한진상사에서 형과 함께 일했다. 그의 귀국 당시 한진상사는 이미 美 8군에 연간 60만 달러어치의 용역(물자수송)을 하고 있었다. 영어가 자유롭고 미국대학을 졸업한 그의 가세로 한진상사의 연간 계약고는 금세 200만 달러로 늘어났다.
1964년, 趙重勳 사장은 일본에 가서 그곳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월남戰 상황에 대해 여러 가지 정보를 듣고 월남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1964년 8월2일 월맹군의 어뢰정이 美 해군 구축함을 공격한 통킹灣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이유로 존슨 美 대통령은 해상봉쇄를 선포했다. 그해 12월에는 朴正熙 대통령에게 월남 파병을 공식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에 우리 국회는 1965년 1월 2000명의 후방 건설부대 요원 파견안을 통과시켰다. 한 달 후 비둘기부대 제1진이 부산항을 출항해 월남에 상륙했다.
趙重勳 사장은 미국이 한국軍뿐만 아니라 민간기업의 참여도 바라고 있는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는 張基榮 부총리에게 청원, 경제시찰단을 구성하여 월남을 방문했다. 월남전에 우리 국군이 참전하는 만큼 기업인들이 외화를 벌어들일 기회를 찾자는 것이 그 취지였다. 시찰단은 중소기업 사장단 15명으로 구성되었는데, 趙重勳 사장은 「한국용역군납조합 이사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었다.

arrow.gif20만 주월 美軍의 병참·보급 0505_305_7.jpg
월남에 도착한 시찰단은 美 제1병참사령부 등과 접촉, 미군이 20여만 명이나 월남에 들어왔지만, 병참·보급 부문에 인력이 달려 큰 고통을 받고 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시찰단을 태운 비행기가 퀴논 上空을 날고 있던 때의 일화이다. 그날은 크리스마스 전날이었는데, 항만에는 화물을 만재한 배 30여 척이 몰려 있었다. 그때만 해도 퀴논은 항구가 아니라 어촌 수준이었다. 하역할 사람도, 장비도 부족해 배에 실은 군수물자를 부두에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趙重勳 사장은 순간적으로 창문을 등지고 휙 돌아앉았다고 한다. 행여 다른 사장들이 눈치챌세라 그런 자세를 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장들은 퀴논港의 그런 모습에서 「항구에 배가 많네」 하는 정도의 느낌밖에 받지 못했다. 滯船(체선)사태와 달러 벌이를 연결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시찰단의 마지막 방문지는 맹호사단이었다. 맹호부대를 방문한 趙重勳 사장의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맹호부대가 퀴논港 인근에 주둔하는 만큼 유사시에 지원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 선 것이었다.
문제는 하역 용역을 어떻게 따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물론 한진상사가 한국에서 미군 군수품 수송으로 신용을 얻고 있기는 했지만, 퀴논 지역은 베트콩의 습격이 밥 먹듯 벌어지는 전쟁터였기 때문이다. 총알과 폭탄이 날아다니는 死地에서 군부대가 아닌 민간기업이 군수물자를 수송한다는 것은 험난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趙重勳 사장의 마음은 급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동생 重建 상무를 불러 越南特需(월남특수)를 누릴 방안을 찾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趙重建 상무가 월남 현지로 날아가 미군으로부터 하역·수송의 용역을 따낸 것이었다.

arrow.gif베트콩도 겁을 낸 武裝 韓進맨 0505_305_1.jpg
하역작업이 시작된 지 1주일이 되는 날이자 트럭 수송 작업의 첫날이었다. 한진의 트럭들이 19번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베트콩은 한진을 벼르고 있었다. 베트콩은 질주하는 한진 트럭에 집중사격을 가했다. 그날 베트콩의 습격으로 한진은 5명의 아까운 청년을 잃었다. 趙重建 상무가 마이어 사령관에게 달려갔다.
『장군, 이야기 들었소? 내 두말 안 하겠소. 우리에게 M16을 지급해 주소』
『당신, 미쳤어? 어떻게 민간인에게 소총을 지급하란 말이야?』
『돈 벌러 와서 죽을 수는 없지. 우리도 방어를 해야 할 것 아니오!』
趙重建 상무는 분에 못 이겨 소리를 지르다가 애원하기 시작했다.
『장군, 제발 부탁이오. 한국 청년들, 다 군대 갔다 와서 총을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오. 우리가 절대 선제공격하지 않을 거요. 일과시간이 끝나면 총을 반환하겠소.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지 않소…』
마이어 장군도 마음이 움직였다.
『미스터 趙, 이건 사이공 사령부도 모르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일이오. 알겠소? 그러나 절대 먼저 쏘지는 마오. 알겠소?』
미군으로부터 M16 소총 500정과 캘리버 50기관포, 방탄조끼와 철모가 지급되었다.
며칠 뒤 다시 트럭 수송이 감행되었다. M16을 손에 쥔 한진맨들의 눈에서 독기가 번득였다. 바로 지난번의 매복장소에서 베트콩들이 다시 도발해 왔다. 그러나 한진맨들의 응전은 번개 같았다. 트럭행렬의 맨 앞차, 중간 차, 마지막 차에서 캘리버50 기관포가 불을 뿜는 것과 동시에 M16으로 무장한 한진맨들이 차에서 뛰어내려 차량을 엄폐물로 삼아 조직적으로 응사했다. 다들 왕년의 용사들이 아닌가. 베트콩은 혼비백산했다.

arrow.gif美 국방성에 그림으로 남은 한진맨의 전투
『지금도 美 국방성 軍史박물관에는 수송 도중 베트콩의 기습을 받아 대항하는 한진맨들의 모습이 기록화로 보존되고 있어요. 외국 민간기업의 활약상이 국방성 박물관의 기록화 주제로 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하더군요』
베트콩으로서는 웬만한 미군부대의 전투력을 능가하는 한진맨들의 전투력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베트콩은 소규모 병력으론 한진의 트럭을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더구나 얼마 후부터 맹호와 백마 부대원들이 현지 제대하여 한진에 바로 입사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라이 따이한(무서운 한국군)」으로 용맹을 떨치던 군인들이 한진코리아에 입사하자 한진맨은 더욱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한진은 미군으로부터 고기와 야채 등의 식량과 석유, 그리고 일용품을 싼값으로 지급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회사나 직원들은 알짜 돈을 모을 수 있었어요』
당시 퀴논에 있던 직원 한 명이 한 달에 최소 360달러를 벌었다. 현지 책임자로 있던 趙重建 상무는 한진맨들에게 월급 중 30달러만 주고 나머지는 고국의 가족들에게 무조건 송금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에 들어온 돈이 5년간에 1억5000만 달러를 웃돌았다. 요즘 시세로 치면 25억~30억 달러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그때는 우리 국민 1인당 소득(연간)이 200달러 정도밖에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arrow.gif1만3000t급 배와 수송기 구입
趙重建 상무는 당시 1만3000t급 화물선과 슈퍼 컨스틀레이션 비행기를 구입했다. 계약관이 그런 비싼 배와 비행기가 왜 필요하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만약 베트콩이 공격하면 미군보다 우릴 먼저 보호해 줄 수 있겠는가? 우리 배와 비행기가 있어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다. 만약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이 안전을 책임진다면 모르겠지만, 우리의 안전은 우리가 알아서 챙겨야 할 게 아닌가?』
그러나 사실 그것은 핑계였고, 어디까지나 미군 감사기관의 하역·수송요금 원가분석에 대처하기 위해 배와 비행기를 구입했던 것이었다. 배와 비행기 구입의 목적은 딴 데 있었다. 월남 생활을 3~4년 해보니 도저히 이 전쟁은 이길 수 없겠구나 하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철수 준비를 했던 것이다.
『한진 캠프 바로 옆에 미군 차량 수집소가 있었어요. 전쟁 말기에는 새 차들까지 고철로 입고되더군요. 미군 당국은 한진이 필요하다면 몽땅 가져가도 좋다고 해요. 그래서 007영화에 등장하는 폐차장用 대형 압축기를 구입, 고철로 만들어 1만3000t짜리 우리 배에 실어 계속 국내로 반입했죠. 나중에 미군들은 아예 창고 열쇠까지 주면서, 한진이 가져갈 수 있으면 다 가져가라고 해요. 베트콩에게 빼앗기는 것보다는 낫다는 거죠. 이때 가져온 고철을 인천제철에 주어 철근을 빼게 하여 그것으로 인천에다 컨테이너 부두를 건설했어요. 한진은 이 전용 부두를 20년 사용한 후 국가에 헌납했습니다』

─월남 特需가 우리 경제에 어떤 것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와서 월남사업을 뒤돌아볼 때 그것은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였습니다』
1960년대 말 한진상사는 당시의 삼성그룹을 내려다보는 기업으로 급성장했다. 1967년에는 한진해운(현재 세계 제5위, 한국 최대의 컨테이너船社)을 설립했고, 그해 9월에는 삼성그룹의 「동양화재해상보험(주)」를 인수했다.
1968년 2월에 「한국공항」을 설립하고, 3월에는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한진사옥(現 해운센터빌딩 본관) 건립에 착수했다. 한진빌딩의 부지는 李秉喆(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 조홍제 효성그룹 회장이 공동으로 소유했던 땅이었다.

arrow.gif朴대통령의 인간적 설득으로 大韓航空 인수
그러던 어느 날 청와대로부터 들어오라는 전갈이 날아들었다.
『왔구나!』
趙重建은 혼자 가겠다는 형 趙重勳을 따라 기어코 승용차에 동승했다.
『형, (항공공사 인수를) 하지 마시오』
『내가 미쳤냐?』
청와대로 향하는 趙重勳-重建 형제의 대화는 그것뿐이었다. 趙重建은 딱딱하게 굳어서 창 밖만 쳐다보는 趙重勳의 옆모습을 보고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떨었다.
『그분이 계신 방 안에는 형만 들어갔어요. 나는 로비에서 초조하게 기다려야 했죠. 한참 뒤 무거운 문이 열리면서 형이 로비로 나왔어요. 형의 얼굴을 보니 물어볼 것도 없데요. 웬 시체가 걸어나오나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회사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趙重建은 화풀이하듯 따져 물었다.
『그래, 인수한다고 그러셨소?』
『朴대통령이 인수하라고 명령을 하는데, 그걸 어떻게 거부하나?』
『그래, 겁나서 한마디도 못 하셨소?』
趙重勳이 벌컥 화를 내며 되받았다.
『그럼 니가 가서 NO라고 해봐!』
그때 우리나라에는 국영기업인 대한항공공사(KAL) 이외에도 1948년에 설립된 「대한국민항공사(KNA)」라는 민항사가 있긴 했지만, 적자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가운데 창업자가 투신자살하여 도산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당시, 서울-도쿄 간에는 미국의 노스웨스트 항공사와 臺灣의 중국민항공사만이 취항하고 있었다. 국적기에 의한 국제선 운영이 중단된 만큼 외국 항공사들이 멀쩡한 한국 항공권을 가져다 장사를 하고 있던 실정인 것이었다. 연간 수십만 달러의 외화가 새나가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나라의 자존심을 훼손하는 것이었다.

당시 朴대통령은 趙重勳 회장에게 『내 재임 기간 중에 대한민국 국적기를 타고 외국에 나가 보는 것이 소원』이라면서 항공공사의 인수를 권유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朴대통령의 인간적 호소에 「호걸풍」의 趙重勳 회장은 마다할 도리가 없었다고 한다. 월남 파병이 없었다면 한진상사의 월남 特需가 불가능했던 만큼 거부할 명분도 없었던 셈이다.

1968년 11월1일, 마침내 한진은 국영 대한항공공사의 인수 의사를 정부에 정식 통보했다. 납입자본금 15억원을 액면가대로 계산하여 5년 거치 10년 상환으로 하고, 항공공사의 누적 적자를 포함한 부채 27억원도 한진상사가 떠맡기로 합의되었다. 한진상사로서는 상당한 양보였다. 당시 항공공사의 가치는 액면가의 절반 정도로 평가되어 실제로 두 차례의 공매에도 응찰자가 하나도 나서지 않았던 실정이었다.

趙重勳-重建 형제는 부실투성이의 대한항공을 인수 5년 만에 흑자로 반전시켰다. 오늘날 대항항공은 여객 기준으로 세계 제15위, 화물수송 기준으로는 세계 제2위의 大항공사로 성장해 있다. 이같은 成就(성취)에 이르는 과정은 책 한 권의 기술로도 모자랄 만큼 숱한 눈물과 환희, 좌절과 극복의 비화를 내장하고 있다. 지면관계상 이 얘기는 다음 기회에 쓰기로 한다.

arrow.gif『해외 진출하려면 외국어·태권도·생존기술 미리 준비해야』
월남 特需를 현장에서 지휘한 趙重建씨에게 다음 한 가지만은 꼭 물어보고 싶었다.

─趙선생께서는 「좁고 어려운 나라 안에서 우리끼리 치사하게 물어뜯지 말고, 넓은 해외로 나가서 열심히 살아라, 그러면 성공의 기회가 그만큼 많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실행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젊은이는 해외로 나가 승부해야 人生 역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자면 몇 가지 준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해외에 진출할 젊은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외국어·태권도·생존기술입니다. 영어는 기본이고 중국어·일본어 등 진출하고자 하는 국가의 언어를 구사해야 할 것입니다. 태권도 유단자가 되면 해외에서 기죽지 않고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됩니다.
생존기술이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1人1技, 즉 자장면이나 한국음식 만드는 기술, 세탁기술 같은 것도 포함됩니다. 이런 교육을 軍 복무 중의 병사들에게 일과 후에 강도 높게 교육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해외로 진출하려는 젊은이에게 정착자금 5000~1만 달러쯤 지원해서 10년 후에 두 배로 갚도록 해도 좋습니다. 金正日에게 비자금을 대주는 것이 反민족적 범죄라면 이런 정착금 지원은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한 종자돈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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