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관악을 보라"고 노래한 시인의 외침에 그리 수긍이 가지는 않지만, 어쩐지 저는 "우리 교육의 현실을 묻거든 관악을 보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서울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불평등과 악의 근원입니다. 서울대 신입생이 영어나 한자 시험을 못 보면 바로 신문에 납니다. 그러면 "별것도 아닌 것들이…"라고 조소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이들은 "서울대생 공부 잘 하는 것도 다 옛날 얘기지. 요즘은 지방대 의대생보다 못한 걸"이라 말하며 서울대생 깎아내리기에 목소리를 높이기도 합니다.
조국의 미래가 서울대에 달렸는지, 서울대생의 학력 저하가 정말 심각한지 잘 모르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여전히 서울대에는 고교 시절 전교에서 몇 손가락 안에서만 놀던 수재들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런 수재들의 영어 실력 얘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사실 정말 하고 싶은 얘기는 서울대생의 학력 저하도 아니고, 서울대생의 형편 없는 영어 실력을 고발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바른 영어 교육을 위한 제언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런데 왜 하필 서울대냐고요? 교육자로서의 제 경험이 일천하여 서울대생 말고는 가르쳐 본 아이들이 별로 없고, 다행스럽게도 제가 가르친 아이들이 적어도 우리 교육 현실에서 매우 성공한 아이들이 틀림없으니 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얘기하는 것이 그리 부당하지 않은 것 같아서입니다.
"I am not a hobby(나는 취미가 없어요)" "What drunk he? (그가 무엇을 마셨죠?)" "I don't can speak well English (저 영어 잘 못해요)" 제가 가르치는 서울대생들이 실제로 말하거나 글로 쓴 영어들입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서울대 교양 영어 수업은 100% 영어로만 진행됩니다. 사실 이런 엉터리 영어라도 열심히 말하는 아이들은 참 대견한 편에 속하고, 상당수의 아이들은 수업 시간 내내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싶어합니다.
제가 무슨 정확한 통계에 의존한 것은 아니지만, 서울대에서 교양 영어를 직접 가르치고 있는 '현장감'을 가지고 한말씀 드립니다. 서울대생의 절반 가까운 아이들이 "I don't can speak well English" 같은 엉터리 영어를 간신히 구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묘한 것이 이런 아이들에게 "너 수능에서 영어 몇 개 틀렸냐?"고 물어 보면 거의 대부분 만점을 받았거나 2, 3개 미만으로 틀렸다고 대답합니다.(그랬겠지요. 그러니 서울대에 들어왔겠지요)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중간 고사에 어법상 틀리는 것을 묻는 문제를 내면 엉터리 영어를 구사하던 아이들 대부분이 기가 막히게 답을 찾아낸다는 겁니다.
이것이 과연 서울대생들만의 문제일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겁니다. 아마도 세칭 명문대 아이들 대부분이 안고 있는 문제일 테고, 결국은 우리 나라 교육이 구조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일 것입니다.
"시험 문제는 잘 푸는데 실력은 없다." 한마디로 이겁니다. 중고등학교 6년 동안 영어를 배우면서 문법을 내면화해서 말하고, 읽고, 쓰기를 가능하게 했어야 했는데 그런 훈련은 거의 안 하고 만날 수능 문제 답 찾는 연습만 했습니다. 시원하게 귀를 뚫어 듣기가 되게 한 것이 아니라, 듣기 문제의 유형에 따라 키워드를 가지고 답 고르는 방법만 배웠습니다.
공교육이 산적한 문제들로 인해 비효율적으로 돌아가는 동안, 학원과 개인 과외 같은 사교육 현장은 시험 문제 잘 찍는 쪽집게 선생님들의 몫이었습니다. 교육 정상화를 외치며 시작한 EBS의 영어 강의에도 스타 선생님들이 나와 시험 문제 풀이 방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서울대는 누가 갈까요? 국어, 영어, 수학 '다 잘 하는' 아이들이 가는 것이 아니라, 국어 시험, 영어 시험, 수학 시험 '다 잘 푸는' 아이들이 갑니다. 영어만 놓고 봐도, 영어 실력 좋은 것과 영어 시험 잘 푸는 것은 좀 다른데 말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은 학교에서 10년 동안 영어를 배워도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문법 혹은 독해 위주의 교육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영어영문학과를 나오고, 미국에서 언어학 박사 과정을 마치고, 어쩌다 서울대 교양 영어 교수진에 들어가게 된 저의 어쭙잖은 전문가적 견해를 밝히자면, 우리 나라 영어 교육이 바른 길에 들어서려면 문법과 독해 교육을 한층 강화해서, 문법적으로 말하고 쓰는 훈련을 체계적으로 시키고, 방대한 분량의 고급 독해 지문을 학생들에게 분석적으로 읽게 해야 합니다.
문법이나 독해는 죄가 없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못 하는 것은 문법과 독해만 죽어라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문법과 독해도 '제대로'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죄인은 바로 "시험 문제 풀이 비법"입니다. 문법과 독해도 제대로 못 하는 학생들에게 수능이나 토익에서 "잘 몰라도 높은 점수 따는 방법"만 가르치고 훈련시키니, 언제 영어다운 영어를 공부하겠습니까?
본디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일정한 수준의 실력을 닦은 뒤, 그 실력을 바탕으로 별 준비 없이 볼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영어 교육은 영어 실력 차근차근 쌓을 생각은 안하고, 시험 문제 잘 풀 궁리만 하고 있으니 영어를 10년을 해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겁니다.
처음에 언급했듯이 우리 교육의 현 주소가 궁금하면 관악을 보면 됩니다. 대한민국 제일의 수제들이 시험 문제 푸는 기계가 되었습니다. 수능은 만점을 받았건만 "나는 취미가 없어요"를 "I am not a hobby"라고 말합니다. 제대로 가르쳤으면 제대로 배웠을 똑똑한 아이들인데 말입니다.
교육부에 계시는 높은 분들은 EBS에 스타 강사들 출현시켜 시험 문제 풀이 방법 가르칠 생각 같은 것 좀 그만 하시고, 좀 멀리 내다 보고 제도를 만들어 주세요.
학교 선생님들, 학원 선생님들은 만날 제도 탓만 하지 마시고, 좀 나름대로 소신을 가지고 제대로 가르쳐 주세요.
학생들은 시험에서 고득점을 얻어야 하는 현실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너무 비법만 찾아 다니지 말고 실력 위주의 공부를 좀 해 보세요.
"금년 수능에는 이것이 나온다"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기꾼 선생님들은 제발 직업 좀 바꾸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