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村 金性洙先生任을 親日派 名單에 올리다니? >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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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917회 작성일 2002-04-02 00:00
仁村 金性洙先生任을 親日派 名單에 올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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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치욕적인 날이 어디 있을까? 1919년 1월부터 宋鎭禹,玄相允先生등과 中央高普 숙직실을 본거로 獨立運動을 펼방책을 熟議해서, 3.1운동의 불을 당겼고, 中央高普 樹州卞榮魯 선생은 3.1운동때 YMCA 구석진방에서 일경의 눈을피해 독립선언서를 英譯하여 海外로 發送하였다. 인촌 金性洙선생께선 1950년에 제2代副統領에 당선되셨으며, 李承晩독재를 반대하여,부통령직도 미련없이버리셨다. 先生께서 親日派였다면, 中央高普,普成專門 선생님을 모두 親日선생으로 보완하는것이 상식이거늘 어찌하여 그당시 쟁쟁하신 우국충정이 넘친 宋鎭禹,玄相允,趙喆鎬.民族愛國詩人 樹州卞榮魯선생등... 민족혼이 살아숨쉬는 독립투사님들만을 채용하였을까? 政府에선 어떻게 집권당에 반기를 드신분에게 國民葬으로 장례를 격상 시켜주었으며, 建國勳章무궁화章도 독립운동하신 애국지사에만 수여되는 훈장인데 어떻게? 親日派에게 追敍되였겠나? 해방맞아 反日感情이 극과극에달한 그 시점에서 선생이 親日派였다면 현명한 우리국민들이, 副統領으로 뽑았을까? 親日派죽음인데 왜? 온나라 국민들이 눈물바다로 슬픔을 함께 하였을까? 그날 국민장의 울고불고하는 모습들이 走馬燈 같건만.. 선생님을 親日派로 몰아세우다니? 돌아가신 인촌께서 억울한 이소리를 들으셨다면, 어떻게 생각하셨겟나? 中央高普서부터 普成專門, 高麗大學출신에 이르기까지 그많은 弟子들 모두들 어디갔나? 모두가 복지부동하고 있으니? 선생님이 억울하게親日로 몰린대도 누구한사람 나서 따져줄사람도 겨우다섯손가락 안밖이고, 기껏따진사람도 人生八旬에 소석李哲承 한사람이니 참으로 답답하구려! 집에서 기르던개도 밖에나가 얻어맞고, 들어오면 기분이 하루종일 나쁘거늘 하물며 故人이 되셔 말못한다해서 設立者선생님을 親日派로 모는데도, 그 많은 안암골 호랑이들 그기백과 젊음은 어듸가고, 불쌍한 종이호랑이가 되였는가? 民族高大가 4.19혁명때만 하여도 선배들의 올바른 國家觀과 正義感과 覇氣로 똘똘뭉쳤건만 주사파다, 전대협시대부터 尊敬하는 인물도, 先後輩도 모르는 앞뒤없는 電車같이 高麗大學 校庭의 仁村先生 銅像에 밧줄을 목에걸어 撤去一步前에 일어났던 사건주인공등등.. 싸가지없는 놈들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여 ~ 眼下無人에다 左衝右突에 天方地軸이니 民族高大가 親日高大로 變身되였으니? 嗚呼! 痛哉라 ! 이일을 어찌할꼬? ㅡ 끝 ㅡ 추신 : 당시 인촌선생님께서 친일 인사로 오해받은 경위를 설명하자면 일본제국주의가 패망직전에 일제말기의 타압은 극에 달했고, 日帝의 기관지신문 매일신문만을 남겨놓고, 東亞,朝鮮등..당시 우리민족계열 신문들은 모두 폐간시키고, 日本學軍募集을 위해 당시民衆들에 의해 尊敬받았던 이름을 盜用하여 學徒兵 自願글을 捺造(날조)하여 실었조 그런와중에 일제기관지에 실렸던 "學徒兵募集" "親日讚楊"이란글들이 나중에 억울하게도 親日派로 몰린 理由였습니다. 그당시 나라를 위한길에는 총을 들고 만주로가는것도 민족을 위한길이요, 국내에 남아 일제말기 탄압을 무릅쓰며,분루를삼키면서도, 민족후진교육을 지켜내고, 독립의 밑거름이 되였던 인재양성의 길은 더험한 가시밭길이 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와서 이게뭡니까? 끝으로 仁村의 親日論爭의 終止符를 찍은 결정적인 단서는 왜놈의 비밀문서에 의해서 심판이났습니다. 발견된 일본비밀문서에 의하면 당시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인들중 중요감시 대상을 4등급으로 분류했는데 1등급은 독립군과 그친족반란세력 2등급은 최대의 감시대상으로서, 독립군에 대한 간접지원이 의심되고, 언제라도 유사시에 일본제국에게 적대적인 인물이엿고, 3등급은 적대세력,4등급은 의심이 가는부류등이 었다. 인촌김성수선생님은 이상4등급중 2등급 감시요시찰 대상에 올라 있었든 것입니다. 이 사실이 알려진 이후부터 學界에선 仁村의 親日派論爭이 막을 닿게되였습니다 끝으로 중앙고보출신 수주변영로 선생님의 애국시 논개(論介)를 소개 합니다. * 논개 (論 介) 樹州 卞榮魯(1923.3 신생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고 강하다. 아~ 강난콩꽃 보다도 더푸른 그물결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아니 붉으랴 양귀비 꽃보다도 더붉은 그 마음 흘러라. 중략.. 中央高普 출신의 樹州 卞榮魯 선생의 대표작 [논개]는 임진왜란때 진주촉석루에서 왜장 게다니(主谷村六助)를 끌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순국한 義技 논개의 우국충절을 노래함. 저는 일찍히 이 이상의 구구절절 憂國忠節의 民族魂이 살아숨쉬는 명시를 보지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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